경기도 평택의 ‘밝은세상영농조합’ 양조장을 찾은 날은 숨 막히게 더운 날이었다. 지은 지 70년 넘은 한옥 대문을 삐그덕 열고 들어가니 마당에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얼음을 동동 띄운 막걸리가 유리잔에 담겨 있었다. 잔 가장자리에는 얇게 썬 오이 조각을 길게 둘렀다. 보기부터 예쁘고 시원했다. 와인에 잘게 자른 과일과 탄산수 등을 넣어 차게 마시는 스페인 술 상그리아가 떠올랐다. 우리 술도 이제 즐기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잔에선 은은한 배향이 났다. 입에 머금은 느낌은 가볍고 경쾌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땐 시원하고 깔끔했다. 막걸리는 시큼하고 텁텁하다는 편견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술이었다. 입안에서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없으니 연달아 술술 넘어갔다. 시판된 지 10년이 되었다는 이 술을 왜 여태 몰랐을까.
이혜인 대표(39)에게 들은 ‘호랑이배꼽 생막걸리’ 맛의 비밀은 생쌀 발효였다. 막걸리는 보통 쌀을 쪄서 밥이나 떡 혹은 죽을 만든 뒤 누룩을 더해 발효시켜 만든다.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도정한 현미를 바로 갈아 술을 담근다. 덧술을 두 번 하며 삼양주로 만드는데, 덧술 땐 백미를 쓰되 역시 생쌀을 갈아 넣는다.
익히지 않은 쌀로 술을 빚으니 당연히 일반 막걸리보다 발효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40일 발효 후엔 2~5도에서 저온 숙성을 두 달 더 거쳐 100일 즈음에 술이 완성된다. 생쌀과 장기 저온 숙성이 만들어낸 가볍고 부담없는 맛은 막걸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죽어라 퍼마시기보단 맛난 음식과 잘 어울리는 파트너로 술을 소비하는 요즘의 주류 트렌드와도 잘 맞는다.
생쌀 발효는 생과를 껍질째 사용하는 와인 제조법을 본뜬 것이다. 아이디어를 낸 건 이 대표의 아버지인 서양화가 이계송 화백(71)이다. 이 화백은 2000년대 여행한 남프랑스 와이너리에서 영감을 얻어 고향 평택에서 술 만들 계획을 세웠다. 부친이 과수원에서 기른 배로 와인을 만들려다 주변 만류로 막걸리로 주종을 바꿨고, 3년여 갖은 실험 끝에 독특한 막걸리 제법을 완성해냈다.
웃는 호랑이를 뜻하는 증류주 ‘소호(笑虎)’는 발아현미와 멥쌀로 원주를 담근 뒤 맑은 술만 떠내 이 화백이 직접 제작한 증류기로 상압 증류해 만든다. 소호 역시 생쌀 발효 레시피는 동일하다. 두 번 증류한 36.5도짜리와 세 번 증류한 56도짜리 두 가지 제품이 나온다. 3년 이상 달항아리에서 숙성한 소호는 생쌀을 발효한 술답게 고도주면서도 가볍고 깔끔한 피니시가 특징이다.
만든 술 이름마다 호랑이가 들어가는 건,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봤을 때 평택이 배꼽에 해당하는 지역이라서란다. 양조장이 들어선 평택시 포승읍은 이 화백 집안이 조상 대대로 600년 가까이 터잡고 산 함평 이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술 만드는 물도 이 화백 선친이 살던 집 앞마당의 지하수를 그대로 사용한다.
이 화백이 시작한 양조장은 이제 도예가 겸 요리연구가인 아내 이인자씨(67)와 속옷 디자이너 출신의 큰딸 혜범씨(41), 포토그래퍼 출신의 막내딸 혜인씨가 함께 운영한다. 제품 디자인과 홍보 등을 돕던 두 딸이 이제는 술 빚기도 도맡아 하고 있다. 예술가 집안의 술도가답게 시음장을 겸한 전시장은 다양한 작품이 술과 함께 어울린 갤러리 같은 분위기다.
증류주 소호의 라벨엔 ‘술 마시는 동안 항상 봄이길’ 바라는 뜻을 담은 이 화백의 추상화 ‘상춘’이 실려 있다. 호랑이배꼽 막걸리의 라벨 글씨는 이 화백이 술 한 잔 걸치고 눈을 감은 채 왼손으로 써갈긴 것이라는데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묘하게 술맛을 돋운다.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6000원(750㎖)으로 삼양주치곤 가격이 저렴하다. 증류주 소호는 200㎖ 용량의 36.5도 제품이 3만원, 500㎖ 병에 담긴 56도 제품은 20만원이다. 막걸리는 포털사이트 검색으로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소호는 양조장 방문객에게만 판매한다. 전화(031-683-0981)로 예약하면 시음을 포함한 양조장 견학(1만원)을 할 수 있고,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술 빚기 체험(3만원)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