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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부터 1910까지… 그 시간을 만나는 여행-석조전 대한민국 역사관

입력 : 
2019-07-17 14: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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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수록 아까운 시절이 대한제국 13년이다. 상상력을 좀 보태자면, 조선의 근대화는 정조 때 움트기 시작, 1884년 갑신정변 때 작은 화산으로 터졌고, 1894년 동학혁명으로 대폭발을 일으켰다. 같은 시기 갑오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었으나 일본의 간섭과 아관파천으로 실패했고, 결국 1897년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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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기운 여명의 대한제국 청명한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섰다. 미루고 미뤄왔던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이 오늘의 여행 목적지이다. 대한문을 마주보고 서면 고종의 장례식이 담긴 흑백 사진이 오버랩 된다. 우리가 ‘고종’이라고 부르고 기억하는 그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폐위된 비운의 인물이다. 또한 그 죽음에 대한 명쾌한 원인이 의심되는 개화기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독살설’, ‘이완용’, ‘이완용, 천왕 앞에서 고종 독살 맹세설’, ‘식혜’, ‘궁녀 의문사’, ‘뇌출혈’ 등의 미확인 키워드들과 함께 열렸다. 장례식에 모인 조선인들의 마음은 처참했다. 나라를 빼앗겼다. 오랜 세월 왜구, 왜놈이라 불렀던 일본이 어느새 강대국이 되어 조선의 심장을 뽑아버렸다. 임금이 있으되 을사오적 등 500년 조선을 쥐락펴락 했던 귀족 사대부들이 여전히 주무르고 있다. 그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토왜’(土倭, 친일부역자)들이다. 위약했으나 나름 강제 병합을 무효화 시키려고 파닥거렸던 황제가 강제 폐위되었고,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차라리 피 터지는 전쟁 끝에 점령당한 것이라면 속이 이토록 터지진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속고 누구에게 뒷통수를 맞은 것일까. 고종의 장례식은 1919년 3월3일에 치뤄졌다. 그즈음 일본에서 벌어진 2.8독립선언, 3.1만세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그리고 해방 직후까지 줄기차게 이어온 무장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제국의 출발은 조선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면서 사실상 시작되었다. 그리고 외세의 중심에 일본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열강 그룹에 진입하는데 성공한 일본. 그러나 국내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특히 매우 불평등한 미국과의 통상조약 내용이 알려지면서 민심이 부글부글해졌다. 국제 조약이라는 게 그렇다. 말로는 국가 대 국가의 당당하고 평등하며 불가역적인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강대국 논리에 약소국이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뒤집어지는 일도 있다. 미일통양조약도 그랬다. 일본은 이에 미국이라는 센 놈에게 덤비며 ‘재협상’을 요구하는 대신,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볼 생각을 했다. 그것이 ‘정한론’이었다. 조선을 쳐 국민의 시선을 끌고, 새로운 경제적 돌파구를 만들어 보겠다는 계략인 것이었다.

그들은 운요호 등 군함들을 조선에 보내 무력시위를 했다. 운요호와 또 다른 군함 한 척이 부산 앞바다에 불법 정박한 후 함포 사격 훈련을 빙자한 무력 시위를 했다. 당시 부산에는 ‘초량왜관’이라는, 오늘날 국제시장의 원조라고 할 만한 ‘무역지대’가 있었다. 고려 말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들과 그들의 노략질을 ‘정상적인 무역 시스템’으로 운영해보려 했던 조선의 신무역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중단되었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약 80년 후에 다시 문을 열었다. 미국에 뺨 맞고 조선에 화풀이 하는 일본의 태도는 몹시 공격적이었고 구체적이었으며,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조밀한 프레임으로 운영되었다. 운요호는 부산 함포 시위에 이어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강화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남해안과 서해안의 해류를 측량하는 실질적 침략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운요호가 조선의 해양을 제멋대로 운항하는 동안 조선의 군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못했다. 결국 강화도 앞까지 당도한 운요호는 본격적인 도발을 시작한다. 초지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식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상륙을 시도했고, 급기야 위협 포사격을 하자 ‘니들이 먼저 무력을 사용했다’며 당시로서는 최첨단 군함이라 할 수 있는 운요호의 포문을 모두 열었다. 아시다시피 운요호 포격으로 강화도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고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이라는 이름의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법률적으로 개방되었고, 서구의 근대화 문물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조선은 자주적 준비 없이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게 된 것이다. 1876년의 일이었다.

한양에 신천지가 열렸다. 그곳이 정동, 광화문, 사직동, 서소문 일대였다. 모두 당시 궁궐이 있던 덕수궁을 둘러싼 동네들이다. 이것은 구경꾼 인류 조선사람들에게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정동 일대에 가면 ‘양탕국’이라 불리는 커피를 파는 곳이 있었고, 피부가 하얗고 키가 엄청 큰 사람들이 양복이라는 것을 입고 활보하고 있었으며, 생전 처음 보는 드레스와 턱시도, 안경, 카메라, 스파게티, 스테이크, 샐러드 등 서양 문물이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은 제국들의 공사관이 그 나라 건축 공법으로 지어졌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생전 처음 보는 학교가 생겼다. 또 러시아정교회, 성공회교회, 정동교회 등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핍박의 대상이었던 서양 종교들의 예배당이 들어섰다. 손탁호텔 등 서구식 호텔도 등장했다. 수천 년을 계급 사회에 살던 조선의 백성들이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조선의 근대화 물결은 이렇게 출렁이기 시작했고, 근대화, 평등화를 위한 백성의 주장은 갑신정변과 동학혁명 등으로 분출되었다. 갑신정변도 실패했고 동학혁명도 미완으로 끝났지만, 세상은 급격하게 근대 세계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끝내 조선왕조가 문을 닫고 대한제국이라는 근대 국가가 열렸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는 어제까지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적지 않은 백성의 불안한 희망과,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 등 세계 열강들의 압박, 그리고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선왕조 600년 동안 누려온 권세를 놓지 않으려는 사대부와 왕족의 각기 다른 미래를 위해 열린 것이다. 대한제국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이전부터 스멀스멀 진행되어 온 개화기 신문명의 도입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역사를 되새김할수록 드는 생각이다. 대한제국 스스로, 대한제국의 역량만큼, 대한제국 국민의 바람만큼 근대화가 차근차근 이뤄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수록 아까운 시절이 대한제국 1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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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탄생과 함께 세상의 중심이 된 황궁이다. 조선 시대 때만 해도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해 숨어살다 돌아온 선조와 왕실은 그야말로 궁궐은커녕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정궁과 이궁이었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기존 궁궐들은 주로 불에 타 버렸다. 그러니 그가 다시 한양 돌아왔을 때는 집무실도, 누울 곳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광해군이 왕족인 월산대군 저택과 주변 민가를 취합해 ‘정릉동행궁’으로 만들어 아버지 선조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왕이 살았던 곳이니, 덕수궁은 훗날 궁궐을 다시 창덕궁으로 옮긴 뒤에도 궁궐의 지위를 누렸고,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는 제국의 황궁으로 재탄생했다.

1897년 개국한 대한제국의 석조전은 광무황제(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와 순헌황귀비의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1900년에 착공해서 1910년에 완공했는데, 아시다시피 1910년은 대한제국이 망한 해로, 결국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실질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이후 1933년 덕수궁미술관, 1938년 이왕가미술관,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1955년 국립박물관 등 용도 변경을 거듭한 끝에 원형의 흔적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회복한다’는 취지로 복원 작업을 시작,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정리되었다. 원형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사진도, 제대로 된 자료조차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문화재청은 벽체를 철거하여 건축의 원형을 회복하고 평면도, 그리고 당시 석조전을 취재해 보도한 신문 기사 등을 참고해 공간을 구성, 대한제국 당시 각 실의 위치를 설정했다. 석조전의 원형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왕실과 관련된 공간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전무할 수가 있는 것일까. 예측컨대, 관련 자료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정부 또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고, 어디엔가 보관되어 있을 수 있다.

석조전 설계는 미국인 하딩(J.R. Hard-ing)이 완성했고, 일본의 타이세이 건설(당시 이름 오쿠라도보쿠구미)에 의해 구조체 공사가 이뤄졌다. 인테리어 즉, 내부 공사는 ‘메이플’이라는 가구 제작 및 실내디자인 회사에서 담당했고, 그들의 카탈로그를 참고해서 가구 배치도 이뤄졌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석조전 구조와 가구 등은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게 아니라 근거가 되는 자료와 주변 정보를 취합해 재구성 한 산물,이라는 게 관람객의 생각이자 해설사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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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건립, 대한제국 선포 황제, 중앙홀, 귀빈대기실
▶대한제국 석조전을 여행하다

100년 전 대한제국을 전시한 석조전 투어는 한 마디로 새로운 지식에 대한 고마움과 착잡함, 호사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일단 일반 건축물이 아닌, 궁궐에 들어가 황족이 사용했던 고풍스러운 최고급 가구들과 집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호사의 극치에 오를 수 있었다. 옷장, 의자, 침대, 협탁, 거울, 욕조, 세면대, 식탁, 그릇, 접시, 수저, 그리고 방방마다 화려한 빛을 밝혀주는 샹들리에 등등은 마음의 호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투어는 1층 중앙홀에서 출발했다. 석조전 중앙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공간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석조전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아칸서스 잎 모양으로 장식한 몰딩, 과일 띠 주름, 장식기둥, 좌우대칭 배치 등이 그 근거이다. 중앙홀에서 꼭 살펴야 할 가구는 ‘중앙홀 탁자’. 석조전에 배치했던 오리지널 가구로, 창덕궁 희정당에 보관하던 것을 이관한 것이다. 탁자 뒤 횃불 모양의 입식 전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던 석조전의 입식 전등을 복제한 것이고, 접견실 문 앞에 세워둔 화병은 일본 도쿄의 구 영친왕저택에 남아있는 석조전의 화병을 복제한 것이다. 다음은 귀빈대기실. 그러니까 황제를 만나러 온 국내외 관료나 인사들이 순서를 기다리던 응접실이다. 석조전의 실내 디자인은 영국인 로벨Lovell이 총감독으로 영국 메이플사가 시공했는데, 준공 당시에는 벽면에 영국 자연주의 풍경화가 걸려있었지만 훗날 사라졌고 1929년 작가미상의 작품 ‘석조전’과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휴버트 보스의 1899년 작품 ‘서울 풍경’을 복제해 걸어두었다.

‘석조전 건립’, ‘대한제국 선포’, ‘대한제국 황제 폐현 의례’ 방에는 석조전의 건립 역사와 대한제국의 의미와 ‘형식의 대변환’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은 왕국이었지만 대한제국은 황제국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의 자객에게 명성황후가 죽은 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한다. 일국의 왕비가 사무라이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판국에 왕의 목숨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다. 대한제국의 대한은 고대 삼한을 통합한다는 뜻이고,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왕은 황제로, 왕의 복식은 붉은 색에서 황제의 복식인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뜨락에 있는 환구단에서 황제로 등극했을 때 고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을 몰아내고 완전한 자주 근대국가를 꿈꾸었음은 물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내 정치는 일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고 대한제국의 조정은 친일파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 였다.

‘대한제국 황제 폐현 의례’는 황제국에 걸맞은 황궁 예법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공간으로 당시 서양 의례를 도입해서 정리한 ‘대한예전’, ‘예식장정’ 등의 내용을 엿볼 수 있다. 황제와 황후를 폐현하는 곳은 ‘접견실’이다. 조금 전 중앙홀에서 들여다 보았지만, 역시 석조전에서 첫 번째로 화려하고 위엄 있는 공간이다.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오얏꽃무늬)을 주제로 하는 디자인이 독특했다. 접견실 바로 옆에는 소식당이 있다. 영국산 오크로 장식한 이 방은 1933년 일본의 건축 잡지 기사에 나온 사진을 근거로 복원했다. ‘대한제국의 외교’ 방에서는 마음이 몹시 착잡해졌다. 대한제국이 열리기 한참 이전인 1879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다. 일본의 요청에 의한 일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이 통치 체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외교적 조치이기도 했다. 일본과의 조규 이후에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의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각국 외교관들이 정동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국내 외교관의 해외 진출도 이때 집중되었다. 민영환, 이범진, 이한응 등이 유럽과 미국 등에 파견되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이 박탈당했을 때와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그들은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옆방에는 ‘대식당’이 있다. 전형적인 서양 식당이다. 대한제국 시절 외국인이 참여하는 연회에는 당연히 서양식 코스 요리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대식당의 테이블은 대한제국 의례서 ‘대한예전’의 ‘연향도’ 그림을 근거로 재현한 것으로 좌석은 12개이고 식기는 대한제국 이화문 백자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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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호강하는 석조전 2층 테라스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은 어느 방에 들어가든 19세기 가구와 문장, 디자인 등에 매료되고 만다. 석조전 1층이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등에 집중되어 있다면, 2층은 황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실들로 이뤄져 있다. 사진으로 남겨진 대한제국 황실 사람들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카메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들의 표정과 시선에서 심지어 인간의 평등마저 느끼게 된다. ‘황제 침실’은 원래 고종의 침실로 사용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조선 왕도에 익숙한 고종은 석조전이 아닌 덕수궁 함녕전에 계속 머물렀다고 한다. 대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영친왕이 귀국할 때마다 석조전을 이용했다. 이 밖에 황제 서재, 황후의 거실, 황후의 침실도 석조전 2층에서 만나게 되는 공간들이다.

가슴이 탁 트이고, 마치 내가 황족이나 된 것 같은 즐거운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곳도 있다. 테라스가 그곳이다. 테라스에 서면 석조전 정원은 물론 덕수궁 대부분을 조망할 수 있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덕수궁 서관도 이곳 테라스에서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투어에 참가했던 그날, 날씨가 얼마나 청명하고 예쁜지, 테라스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시간이 칼이어야 하는 가이드 투어의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테라스를 떠나 다시 실내로 돌아오면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 등 대한제국 황가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진다. 고종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명성황후와의 사이에서 4남1녀를 낳았고 그중 둘째 아들이 바로 순종이다. 순종은 조선과 대한제국을 통틀어 최후의 왕이 된다. 명성황후 사후 순헌황귀비가 고종 곁에 있었는데, 순헌황귀비는 권력보다는 여성문제, 교육문제 등에 신경을 썼고, 관련된 활동도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야기가 석조전 투어의 마지막 순서이다. 영친왕은 고종과 순헌황귀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다. 그는 1897년에 이곳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1922년 일본 왕족의 딸 마사코와 결혼한 그는 끝내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서 고국의 해방 소식을 들었고 1962년에 이르러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은 후 1963년에 부인과 함께 귀국, 남은 삶을 한국에서 보냈다.

공식적인 가이드 투어가 끝나면 석조전 중앙홀 밖으로 향해야 한다. 자유관람이 가능한 지하 출입구는 건물 옆면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는 고종의 근대적 개혁 활동, 대한제국의 신문물, 당시 덕수궁 주변 풍경, 석조전 복원기 등 실물보다는 사진과 텍스트를 통해 대한제국 당시의 세상을 소개하고 있다. ‘구경 재미’는 비교적 반감되지만, 대한제국을 알뜰하게 공부하기에 이만한 공간도 없다. 대한제국 시절에 제도화 한, 토지대장, 등기부, 도량형 통일, 미터법 도입 등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제도들도 모두 그때 새로 시작된 것들이다. 우편학당, 전무학당(전기), 상공학교(경영), 경성의학교(의료), 광무학교(광산) 등 전문 학교도 고종이 이끄는 대한제국 때 만들어졌다. 해외여행에 필요한 여권도 그때 생겼다. 전화, 전차, 교과서, 서양식 병원, 군악대도 대한제국의 유산이다.

대한제국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에 최소 두 번 정도 가볼 것을 권한다. 먼저 지하에서 대한제국의 개념을 제대로 공부하고, 그 다음에 심화 투어 가이드에 참여하면 이해가 훨씬 쉽겠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국주의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시대 때 이뤄졌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비록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자립적인 근대화를 지속할 수는 없었지만, 대한제국 이전부터 서서히 움트기 시작한 민중의 근대화에 대한 희망, 조정도 동의한 개방의 필요성, 실질적으로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던 근대화 과정들을 보면, 역시 근대화의 뿌리는 대한제국에서 시작되었고, 일제의 근대화 작업은 ‘수탈 구조’를 만들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근대화 작업, 우리가 스스로 했다면 더 잘 했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은 이야기하고 있다.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8호 (19.07.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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