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픽, 여자아이들끼리의 사랑..."그때 그건 다 무엇이었을까?"읽음

이영경 기자
지난 19일 서울 중구 정동 경항신문사에서 만난 김세희는 “예전엔 정치와 문학이 극과 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경험과 감정들 또한 정치의 영역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정치와 문학은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다. 과거를 스스로 돌아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정치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지난 19일 서울 중구 정동 경항신문사에서 만난 김세희는 “예전엔 정치와 문학이 극과 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경험과 감정들 또한 정치의 영역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정치와 문학은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다. 과거를 스스로 돌아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정치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턱선을 따라 떨어지는 칼머리, 헐렁한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입고 남자 같이 건들거리던 인희는 여고시절 ‘이반’으로 불리던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인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나’를 찾아온다. 마치 허물을 벗듯 여고생 시절의 외모와 가치관 모두 바꿔버린 ‘나’와 달리 인희는 그 시절 그대로다. “그건 다 뭐 였을까”라는 인희의 물음에 ‘나’는 답한다. “그땐 다 미쳤었어.”

소설가 김세희(32)의 경장편소설 <항구의 사랑>(민음사)은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를 배경으로 아이돌과 가수를 사랑하고, 아이돌과 가수가 등장해 서로 사랑하는 팬픽을 쓰고, 그런 여자 아이들끼리 사랑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청춘의 한 시기를 지배했던 열렬한 ‘사랑’의 기억이지만, 대학 입학과 동시에 숨기거나 폐기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김세희는 정식으로 소환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정체성이란 게 단일하거나 고정돼 있는게 아닌데, 사회에서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에 맞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여겨지죠. 주류 문화가 인정하는 ‘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애버린 채 살고 있는게 아닐까요. 나는 훨씬 더 많은 존재이고, 단일하거나 고정돼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세희가 지금에 와서 여고생 시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이유다. 김세희를 지난 19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소설은 목포가 고향인 김세희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수 조성모를 좋아하고, 조성모를 주인공으로 한 중세 궁정풍 로맨스 소설을 팬픽으로 쓴다. 친구 규인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고, 선배 민선에게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대학 진학과 함께 모든 일은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버린다.

“여중·여고를 다니던 시절 여학생들끼리 사귀는 일이 지배적 문화일 정도로 흔했어요. 그런데 스무살이 되어 사회 주류 문화에 진입하면서 예전의 일들은 잊고 더이상 말하지 않게 됐죠. 우리 사회 주류 문화는 이성애 중심적 문화에요. 하지만 난 분명 다른 걸 봤었는데, 그때 그건 대체 뭐였을까란 생각이 들었죠. 저도 모르게 그때 일을 쓰고 있었어요.”

등단하기 전엔 2013년부터 써오던 소설이 이제서야 출간됐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늘 ‘해석’의 문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김세희는 “그 시절을 이해하는데 긴 시간의 공부가 필요했다. 최근 아이돌 팬 문화와 ‘빠순이’에 대해 다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고, 팬픽 문화와 동성애 관계를 연구한 논문을 보기도 했다. 공부를 하면서 그때 경험을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하는 능력이 더 많았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주류사회에 진입하면서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사랑만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죠. 여성들 사이의 관계도 다양하고 섬세할 수 있는데 사회에서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란 이야기를 듣고, 고정관념에 맞춰서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아요.”

경장편 소설 <항구의 사랑>을 펴낸 소설가 김세희.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경장편 소설 <항구의 사랑>을 펴낸 소설가 김세희.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소설은 해석하고 단정하기 보다 그 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무엇보다 여고생 시절 들뜬 사랑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학교에선 동성애를 단속하려 하지만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어”서 혼란을 겪고, 규인은 남자같은 여자 아이들을 보며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만들고 이미지를 흐려 놓는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이 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인 인희를 보고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지 못했다”며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하기도 한다.

김세희는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이라는 게 가변적이고 주변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최근 여성들 간의 사랑이나 관계에 대한 소설이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해 “유행으로 보는 시각이 일부 있지만,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들이 회상되고 이야기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면서 그동안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이 발화되는 과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춘의 감정과 고민들을 솔직하고 적실하게 짚어내는 것이 김세희의 장기다.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은 사회 초년생, 결혼을 앞둔 커플 등 다양한 청춘들의 고민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목받았다. <항구의 사랑> 역시 출간 직후 2쇄를 찍으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김세희는 “내게 소설은 삶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며 “제 소설 속 청춘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고 아름답지 못한 부분까지 솔직하게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세희는 현재 창비 블로그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란 장편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 사람들의 고민을 다룬 소설로 “직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상적 삶에서 오는 괴리에 대한 고민을 다뤄보고 싶다”고 말했다.

16개월 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세희는 “육아에 대해 언젠가 써보고 싶지만, 육아라는 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어서 언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그의 삶과 나란히 가는 그의 소설이 그려낼 다음 풍경이 궁금해진다.

아이돌, 팬픽, 여자아이들끼리의 사랑..."그때 그건 다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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