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황홀한 베르사유 ‘거울의 방’…달콤한 바게트 덕분에 생생한 기억

이민영 | 인류학자

파리의 빵과 디저트 즐기기

베르사유 궁전 방문이 벌써 3년 전이지만, 그때의 감흥이 생생한 이유는 바로 에릭 케제르의 바게트와 함께한 덕분이다.

베르사유 궁전 방문이 벌써 3년 전이지만, 그때의 감흥이 생생한 이유는 바로 에릭 케제르의 바게트와 함께한 덕분이다.

·프랑스 전통 빵 관광지에서 먹기

하루 관광 코스 넓은 베르사유
아침에 준비해간 바게트 제격
몽마르트르 투어 마친 저녁엔
프랑스 대통령이 매일 먹던 빵

프랑스는 미식의 나라로 소문난 곳이다. 프랑스 미식여행이라고 하면 ‘미쉐린 스타’로 대표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부터 떠오르겠지만,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정찬 코스에서 요리 부문은 생략하고, 빵과 디저트만 찾아다니면 어떨까? 그 나름의 달콤한 재미가 있다. 미식여행 중 ‘미식’에서 조금 힘을 빼면 ‘여행’을 좀 더 창의적으로 꾸릴 수 있다. 이런 방향으로 시도해본 나의 파리 미식여행 전략을 3가지로 정리해봤다. 첫 번째는 맛있는 빵·디저트를 구입해 관광지에서 먹기, 두 번째는 도심을 산책하며 맛있는 빵·디저트 가게 들르기, 세 번째는 빵·디저트와 관련된 유명인이나 장소의 아우라 흡수하기다.

프랑스 여행의 필수 코스인 베르사유 궁전에 에릭 케제르(Eric Kayser)의 바게트를 사갔던 적이 있다. 3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아갔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저 멀리 황금빛 궁전이 시야에 들어오던 그 장면! 궁전 안 ‘거울의 방’에서 황홀하게 고양되던 그 기분! 이 생생한 기억은 그날 숙소를 나오면서 구입했던 바게트 덕분이다. 하루 종일 봐야 할 만큼 넓다는 베르사유 궁전을 잘 보려면 속이 든든해야 할 터. 다행히 프랑스의 빵집들은 아침 7시 무렵 문을 연다. 국민 빵인 바게트를 아침식사용으로 사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덕분에 내 가방 속에도 따뜻한 바게트를 쟁여놓을 수 있었다. 거울의 방에서 찍은 사진에는 내 가방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바게트도 함께 찍혀 있다. 장인 에릭 케제르가 자연 액체효모를 이용해 밀가루, 물, 소금만으로 만든 전통 프랑스 바게트로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과 일본 왕실에서도 좋아한다는 빵이니 얼마나 그곳에 잘 어울리는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약속처럼 만약 전통 바게트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다면,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바게트를 먹는 것은 그야말로 프랑스적인 문화 체험의 정수가 될 것이다. 이외에도 다른 빵이나 디저트를 유명 관광지에서 먹는 변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판테온, 노트르담 대성당과 연계 코스를 짜면 좋을 예술가들의 카페 ‘레 되 마고’.

판테온, 노트르담 대성당과 연계 코스를 짜면 좋을 예술가들의 카페 ‘레 되 마고’.

·도심 산책하며 빵 가게 들르기

파리 여행 첫날엔 시테섬으로
둘째 날 아침은 무프타 시장에서
‘칼 마를레티’ 500겹 페이스트리
2000겹 ‘되 밀푀유’·마카롱 궁합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몽마르트르 언덕 역시 바게트의 추억이 짙은 장소다. 여행 인솔자로서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바게트와 함께했던 그날만큼 또렷하게 기억나는 때도 없다. 몽마르트르 투어를 마치고 내려오던 어느 겨울 저녁. 배가 슬슬 고프고 다리도 아파오던 그때, 가이드는 우리를 인근 빵집으로 인도했다. 바로 2010·2015년 프랑스 전통 바게트 경연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르 그르니에 아 팡’(Le Grenier A Pain)이라는 곳이었다. 가이드는 길쭉한 바게트를 몇 개 사서 우리에게 나눠주며 “프랑스 대통령이 매일 먹던 빵”이라고 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엘리제궁에 1년간 빵을 납품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여행자들은 한국에서 환상을 키워온 진짜 ‘파리 바게트’를 찾았다는 감동에 바게트를 폭풍흡입했다. “아, ‘파리 바게트’라는 것은 프랑스의 문화적 상징이자 프랑스 최고의 문화상품이구나.” 그날 가이드에게 들은 몽마르트르의 화가 관련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전통적인 빵 제조방식을 지키면서 하나의 문화로 키워가는 국가적인 전략에 감탄했던 기억 또한 생생하다.

전통 바게트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빵집뿐만 아니라 다양한 디저트 맛집들도 추천할 만하다. 한국에도 진출한 글로벌 맛집들의 본점은 물론 ‘프랑스 국가공인 최고장인’(Meilleur Ouvrier de France·MOF 교육부·노동부 주관으로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콩쿠르를 통해 선정하는 장인으로 17개 직업군 200여개 분야를 대상으로 한다)을 획득한 파티셰(제과제빵사)와 쇼콜라티에(초콜릿 요리사)의 가게들도 프랑스 문화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가게들만 찾아다니면 금세 배가 불러오면서 칼로리 폭탄을 맞게 되니 산책을 겸해 틈틈이 찾아가볼 것을 권한다.

이런 인체공학적 철학으로 만든 나의 프랑스 미식여행 팀의 야심찬 첫날 코스는 시테섬과 뤽상부르 공원 사이에 걸쳐 있는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es)와 라탱(Latin) 지구다. 프랑스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구글맵을 켜고 다음 가게들을 검색해 별표를 해놓은 뒤, 파리에 도착한 첫날에 가기를 권한다. 왜 첫날이냐고? 나의 여행공학적 실험 데이터에 따른 것이다. 2000년 전 파리의 역사가 시작된 시테섬에서 파리 여행을 시작한다는 상징성도 부과할 겸, 프랑스에 온 달콤한 기분도 온몸으로 느낄 겸,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부은 몸에 혈액순환도 시킬 겸 산책과 미식을 함께하면 행복한 여행의 시작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제과업계의 피카소’라 불리는 오너셰프가 운영하는 마카롱 전문점 ‘피에르 에르메’ 매장 내부.

‘제과업계의 피카소’라 불리는 오너셰프가 운영하는 마카롱 전문점 ‘피에르 에르메’ 매장 내부.

·예술가들의 아우라 느껴보기

왕실 공식 납품 ‘드보브 에 갈레’
전설의 빵집 ‘푸알란’ 3대째 성업
사르트르·보부아르 토론한 명소
카페 레 되 마고·카페 드 플로르

시차 때문에 일찌감치 배가 고파오는 다음날 아침에는 무프타 시장으로 향하자. 장바구니를 든 파리지앵들을 따라 빵집에서 빵도 사고, 치즈와 과일을 구입해도 된다. 시장 끝자락에 있는 유명한 빵집 ‘칼 마를레티’(Carl Marletti)의 오너 셰프가 유명 디자이너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생상푀유(Cinq Cents-feuille·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페이스트리를 ‘1000장의 잎사귀’라는 뜻의 밀푀유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그 절반인 500겹의 페이스트리를 표현한 말), 2009년 ‘르 피가로’에서 파리 최고의 타르트로 뽑은 타르트 시트롱. 인근 에릭 케제르의 바게트를 아침 메뉴로 권한다. 든든한 식사 후에는 프랑스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판테온(Pantheon), 소르본대학, 노트르담 대성당 등을 구경하면 된다. 점심은 르 프티 퐁투아즈(Le Petit Pontoise)처럼 미쉐린 가이드북에 수차례 소개된 레스토랑을 골라도 좋고, 대학 근처 ‘먹자골목’의 허름한 식당이나 캐주얼한 레스토랑의 3만원 이하 가격대의 런치 코스를 즐기면 좋다. 단, 레스토랑에서 커피는 참았다가 카페에서 마실 것을 권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토론하고, 피카소와 브라크가 큐비즘을 구상했다는 예술가들의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와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를 빼먹으면 안되니 말이다. 예술가들의 아우라를 느끼며 커피를 마신 후에는 본격적으로 디저트를 탐험해보자. 먼저 소개할 ‘드보브 에 갈레’(Debauve et Gallais)는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루이 18세, 샤를 10세에 이르기까지 왕실에 공식 납품을 담당한 업체이자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초콜릿 전문점이다. ‘피에르 마르콜리니’(Pierre Marcolini)는 세계 파티셰 대회와 유럽 챔피언 대회를 휩쓴 장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이색 재료로 만든 초콜릿을 내놓는다. 초콜릿의 광대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마카롱 전문점 ‘피에르 에르메’(Pierre Herme)의 오너 셰프는 ‘제과업계의 피카소’라 불린다. 2000겹의 ‘되 밀푀유’와 환상적인 마카롱에서 창의성이 돋보인다.

1932년 개업한 이래 3대에 걸쳐 성업 중인 빵집 푸알란의 대표 메뉴 ‘미슈’.

1932년 개업한 이래 3대에 걸쳐 성업 중인 빵집 푸알란의 대표 메뉴 ‘미슈’.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자 영화 <다빈치 코드>에도 나왔던 생쉴피스 성당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두 군데 빵집을 기억하자. 프랑스의 전통 빵을 부활시킨 전설적인 빵집 ‘푸알란’(Poilane)은 1932년 개업한 이래 3대에 걸쳐 성업 중이다. 맷돌로 간 밀가루, 프랑스의 유명한 천일염인 게랑드 소금, 물을 넣어 만든 반죽을 장작불로 구워 낸 빵 ‘미슈’가 대표 메뉴다. 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미슈는 다른 음식과의 궁합도 좋아서 유명 레스토랑에서도 구입해 간다. 두 번째 빵집은 2016년 전통 바게트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라 파리지엔’(La Parisienne)이다. 뤽상부르 공원 바로 앞에 있다.

하루의 마무리로는 달콤한 초콜릿이 제격이다. 실험 정신으로 유명한 초콜릿을 만드는 크리스티앙 콩스탕(Christian Constant)의 가게, 프랑스 국가공인 최고장인이 최상의 원료로 만드는 초콜릿으로 알려진 장 폴 에벵(Jean Paul Hevin)의 가게가 마지막 추천 코스다. 이렇게 빵집 순례를 마치면 어느새 양손에는 그날 저녁과 다음날 먹을 디저트까지 묵직하게 들려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프랑스 최고의 버터, 치즈, 햄, 차, 와인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도보로 몇 분 거리에 ‘라 그랑 에피스리 뒤 봉 마르셰’(La Grande Epicerie du Bon Marche)라는 대형 식료품점이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고급 백화점 봉 마르셰의 별관에 펼쳐진 2500평의 공간에서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행은 기억이다. 풍부한 달콤함과 더불어 프랑스 여행을 한다면 그 순간의 감각은 더욱 생생해질 것이다. 프랑스 문화와 글로벌 미식산업의 감각까지 키워오는 것은 덤이다.

▶필자 이민영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⑥황홀한 베르사유 ‘거울의 방’…달콤한 바게트 덕분에 생생한 기억

덕업일치를 꿈꾸는 관광인류학자. KBS 여행 전문 팟캐스트 <여행상상> 진행자. 여행작가·해외여행인솔자로 70여개국을 다니며 미식,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요가, 순례 등 다양한 테마여행을 탐구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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