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숙 <할매의 탄생> 작가

증오와 고통의 글쓰기

[최현숙의 내 인생의 책]④토지 - 박경리

“최가놈 집구석에 재물이

이고 이도 묵어줄 사램이 없을 긴께.” 자식이 일곱 딸린 과부가 최참판네 문전에서 구걸하다 쫓겨나 굶어 죽어가며 퍼부은 저주다.

과부의 악다구니를 빌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 박가네에게 퍼부은 욕설일까. 아버지를 증오한 죗값인 듯 자신에게 닥쳤던 고통에 대한 독한 수긍일까. 최가네는 곧이어 닥친 역병으로 외동딸 서희만 남고 다 죽었고, 박경리 역시 사는 내내 증오와 고독과 고통에 붙들렸다.

남편은 결혼 4년 만인 6·25 때 좌익이라는 죄목으로 죽고, 이어 세 살 아들은 병원에서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죽었다. 참척(慘慽)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고 영안실 쪽 담벼락 아래 길을 일부러 지나다녔다. 증오와 고통을 긁어모아 글 쓰는 힘을 만들었으니, 가히 악마적 글쓰기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임종조차 지키지 않을 만큼 컸고, 남성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굳어졌다. 1955년 소설 <계산>으로 등단했으니, 여성 작가의 글쓰기를 위해서는 일찍 혼자가 된 것이 다행이다 싶다. 박경리의 집안도, <토지>와 다른 작품들 속 집안도 여성들이 실질적 가장이며 모계를 통해 내력이 이어진다. 이미 작가로서의 안정적 지위에 오른 1969년, 이전 모든 작품을 습작이라 치고 스스로를 글 감옥에 가두어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실패하면 삯바느질로 살겠다며 원고지 곁에 재봉틀을 놓았다. 악이 승리하는 세상 꼬라지에 치를 떨면서도 그래서 더 글로 항거하면서, 25년 만인 1994년 <토지>를 끝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죽음을 맞고 싶은 듯 시의 끝을 쓴 얼마 후, 2008년 5월5일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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