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진짜 ‘문자 폭탄’이다···바바라 크루거 개인전 ‘포에버’

홍진수 기자
바바라 크루거가 한국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품 ‘무제: 충분하면만족하라’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바바라 크루거가 한국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품 ‘무제: 충분하면만족하라’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거대한 글자 8개로 꽉 채운 벽면, 전시장 바닥과 벽을 가득 메운 현란한 문장들. 27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막한 바바라 크루거(74)의 개인전은 ‘문자폭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문자에 둘러쌓여 있어도 그리 답답하지는 않다. 되려 궁금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작품 속 글을 하나하나 읽어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버릴 글이 하나도 없네”

바바라 크루거란 이름은 생소해도 그의 작품은 그리 낯설지 않다. 크루거는 잡지 등에서 차용한 이미지 위에 글자를 얹는 기법으로 현대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됐다. 미국의 의류브랜드 ‘슈프림’은 크루거의 작품을 따 브랜드 로고를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선명하고 눈에 잘 들어온다.

기법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크루거가 이미지 위에 쓴 문장들은 시적이면서도 날카롭다. 특히 1989년 내놓은 ‘무제: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는 ‘낙태할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나 ‘우리는 또 다른 영웅이 필요 없다’(We don’t need another hero) 같은 문장도 적절한 이미지와 함께 뇌리에 남는다.

이번 전시는 바바라 크루거가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여는 개인전이다. 지난해 문을 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개관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큰 공을 들였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크루거의 주요 작품 44점을 모았다. 크루거는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한글이 들어간 작품도 2점 만들었다. 전시장 입구에 세워진 ‘충분하면만족하라’는 큼지막한 글귀가 그 중 하나다. 크루거가 자주 쓰는 ‘Plenty should be enough’란 문장을 한국어로 해석했다. 글자 하나의 높이가 6m나 된다.

바바라 크루거의 ‘무제:영원히’. 천장을 제외한 모든 면을 글자로 가득 채웠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바바라 크루거의 ‘무제:영원히’. 천장을 제외한 모든 면을 글자로 가득 채웠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전시장으로 발을 떼면 ‘무제:영원히’란 작품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렬한 시각 경험을 주는 거대한 문장들로 천장을 제외한 벽면과 바닥을 모두 도배했다. 글씨가 워낙 크고 많아 한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전시장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읽을 수 있다. ‘YOU(당신)’라는 큼지막한 글귀가 새겨진 타원형의 볼록거울 이미지 속에는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란 문장이 들어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한다. 바닥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인용한 ‘만약 당신이 미래의 그림을 원한다면 인간의 얼굴을 영원히 짓밟는 군화를 상상하라’란 글이 쓰여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초기작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바바라 크루거의 초기작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바바라 크루거가 2018년 제작한 작품. ‘무제:진실의 최신버전’. 초기작과 달리 많은 색을 사용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바바라 크루거가 2018년 제작한 작품. ‘무제:진실의 최신버전’. 초기작과 달리 많은 색을 사용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제공

초대형 작품말고 소소한 작품도 볼 수 있다. 크루거의 초기작들은 작은 액자 속에 들어가 있어 한껏 다가가야 제대로 보인다. 당시에는 작품에 컴퓨터그래픽 등을 활용할 수 없어 글자를 이미지에 붙인 풀자국까지 남아있다. 또 ‘아카이브룸’에서는 작가의 육성이 담긴 인터뷰영상,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작업 등도 볼 수 있다.

크루거는 당대의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발언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김경란 큐레이터는 “크루거는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소통을 해왔다”며 “크루거가 잡지 디자이너 출신이라 광고같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대중에게 광고가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작품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영상이 더 익숙해졌으니 영상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에서 크루거의 영상작품 역시 만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기준 1만3000원. 전시는 오는 12월29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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