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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Detroit in ‘8 Mile’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야’

입력 : 
2019-06-12 16: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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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메카로 영광를 누리던 디트로이트는 어느 순간 희망이 사라진 무기력한 도시, 그리고 디스토피아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이런 디트로이트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 준 영화가 있다. 바로 커티슨 핸슨 감독, 래퍼 에미넴 주연의 ‘8마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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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의 디스토피아 현상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다. 러스트 벨트는 미국 오대호 연안에 위치한 공업이 발달한 주들이다.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이다. 이 중에서도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가 러스트 벨트의 핵심이다. 당시 선거 운동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러스트 벨트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을 집중 공략했다. 이들의 일자리를 다른 나라들, 즉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등이 빼앗아 가고 있기에 무엇보다 미국과 백인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아메리카 퍼스트’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백인 노동자들은 환호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트럼프 대통령은 20세기 이후 세계에서의 미국의 위치와 책임, 즉 세계 경찰, 세계의 소비 시장, 동맹의 주축 역할 포기 및 축소를 선언했다. 동맹국들에게 높은 관세를 매기고, 주한 미군 분담금의 증액 요구, 중국과의 무역 전쟁, 백호주의 이민 정책, 미국과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등, ‘아메리카 퍼스트’ 전략의 일환들을 ‘진짜 실천’에 옮긴 것이다. 대통령 재선을 목표로 한 트럼프의 이 같은 정책은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본래 러스트 벨트는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었다. 오대호 연안에 자리 잡은 러스트 벨트의 도시들은 풍부한 자원, 노동력 그리고 발달된 수륙 교통 등으로 미국 내에서 가장 먼저 공업화를 이루었다. 20세기 초 이 러스트 벨트는 큰 공장들이 즐비했다. 중공업, 제조업을 중심으로 도시마다 돈과 사람이 넘쳐났다. 그야말로 ‘백 년 동안의 행복’이었다.

지금은? 러스트 벨트의 영화와 쇠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도시가 있다. 바로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다. 디트로이트는 미국의 자존심, 자동차의 메카였다. 1903년 포드, 1908년 GM, 1925년 크라이슬러가 들어서면서 미국 자동차 빅3이자 세계 자동차 빅3가 이 도시에 존재했다. 만들어 내기만 하면 팔렸다. 수십만 명의 직원들이 산업화, 대량화의 상징처럼 북적거렸다. 특히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다. 그 시절, 디트로이트는 미국의 공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디트로이트에도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 시작은 미국이 주도한 자유 무역 협정이었다. 미국은 자국 시장의 문을 여는 대신 세계에도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저렴하지만 성능 좋고 예쁜 외국 자동차들이 몰려들었다. 토요타, 혼다 등을 선봉으로 한 일본의 공습,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유럽산 자동차들, 가성비 대비 성능 갑인 한국산 자동차도 그중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자동차에 깜짝 놀랐다. 크기만 하고 기름 잡아먹는 하마 같은 미국산 자동차가 자동차의 전부인 줄 알았던 미국 소비자들은 외국산을 선택했다. 그 직격탄이 바로 디트로이트에 떨어졌다. 20세기 후반부터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한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빅3는 2008년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그야말로 전멸한다. 크라이슬러와 GM은 손을 들었고 포드만이 트럭 위주의 생산 전략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공장이 망하자 노동자들은 필요 없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도시의 빈민이 되었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슬럼화되었고 디트로이트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2013년 『포브스』 선정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의 불명예를 안았고, 그해 디트로이트는 파산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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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Crisco1492
▶희망이 사라지자 사람도 사라졌다 오대호로 캐나다와 연결되는 아름다운 도시 디트로이트의 시작은 1701년이다. 프랑스 탐험가 앙투안 캐딜락에 의해 도시는 건설되었다. 훗날 미국산 자동차의 상징 같은 캐딜락의 이름 또한 앙투안 캐딜락에서 따온 것이다. 1903년부터 1925년까지, 자동차 빅3가 디트로이트에 자리 잡으면서 디트로이트는 ‘모터시티Motor City’ 또는 ‘모타운Motown’이란 자랑스런 별명도 얻었다. 디트로이트의 절정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였다. 미국의 모든 중무기와 수송 수단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와중에 디트로이트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인의 밀집이었다.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늘자 인구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계 아메리칸들이 디트로이트에 몰려들었다.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자리부터 주거지 문제에까지,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첫 인종 폭동이 1943년에 발생했다. 34명이 사망하고 무려 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동은 가라앉았지만 원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인구는 약 190만 명으로 미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가 되어 있었다. 도시의 중심은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도심을 떠나 변두리로 이주했다. 1967년 다시 폭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주 방위군이 출동해 총격전이 벌어졌다. 디트로이트 도심은 점점 슬럼화되어 갔다. 백인들과 부자들은 더 변두리로 나가거나 디트로이트를 떠나기 시작했다. 인구는 계속 줄어들었다. 생산력이 있어 세금을 낼 수 있는 시민이 떠나자 시의 재정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시는 점점 낙후되었다.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인구는 줄어들어 21세기 들어 금융 위기까지 겪으면서 50만 명도 되지 않았다. 디트로이트 시민 중 80%는 흑인이고 또 약 35%의 시민이 극빈층이다. 미국 도시 중 최고의 범죄율을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 가로등 불빛도 켜지 못하고 사람이 떠난 빈집이 무려 8만여 채에 달할 정도로 디트로이트는 황폐화되었다. 디트로이트는 희망이 없는 도시, 무기력한 도시 그리고 디스토피아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이런 디트로이트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 준 영화가 있다. 바로 커티슨 핸슨 감독, 래퍼 에미넴 주연의 ‘8마일’이다. ‘8마일’은 미시간주를 관통하는 간선 고속 도로 중 하나인 도로 M-102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도로를 기점으로 북쪽인 도시 외곽은 백인들의 주거지, 남쪽 지역은 흑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영화에서 ‘8마일’은 인종별 거주지를 나누는 기준이자 동시에 빈부 격차를 나타내고 또한 현실과 이상, 절망과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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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미국 최고의 백인 래퍼 에미넴의 자전적 이야기를 가미했다. 실제 디트로이트에서 살면서 힙합 클럽 랩 배틀에 참가했던 에미넴은 영화 속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가난한 백인이었다. 묘하게도 디트로이트에서는 ‘역인종 차별’이 존재한다. 바로 힙합 신 내부에서다. 한때 블루스와 소울이 디트로이트를 풍성하게 했던 ‘모타운 레코드’의 뿌리처럼 힙합과 랩은 마치 흑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백인이 한다? 영화 속 쉘터클럽에 모인 많은 흑인들은 백인 청년 지미 래빗이 랩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래빗은 첫 번째 배틀에서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실패한다. 하지만 그에게 랩은 희망이다.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랩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미래를,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래빗은 이를 악물고 독하게 랩 배틀에 참가해 마침내 챔피언이 된다. 상대의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고 이를 공격해야 하는 ‘디스’전. 래빗은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다. “그래 나 백인이야. 어쩔래?” 영화 속 래빗과 실제 에미넴은 많은 부분이 닮았다. 홀어머니, 가난한 집, 백인이라 차별받는 래퍼 등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랩 배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디트로이트다. 황량한 도시, 차를 타고 갈 때마다 마주하는 차창 밖 도시 풍경은 마치 2차 세계대전에서 폭격 맞은 유럽의 도시를 방불케 한다. 빈 건물, 어두운 거리,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들, 비어 있는 마트, 할 일이 없어 배회하는 사람들.

도시는 어느 시점에 멈춰 있다. 발전도 희망도 멈춰 있고 그 안에서 젊은이들은 울분과 분노만 만들어 낼 뿐이다. 물론 지금의 디트로이트는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사람과 일자리도 늘고 각종 스포츠 경기도 활성화되고 거대한 빌딩 건설 계획도 잡혀 있다. 하지만 한 번 쓰러진 거인은 다시 일어서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랩뿐이라면 디트로이트가 예전의 영화를 되찾는 데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백인 청년 래빗은 말한다. “그거 알아?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이 말이 비단 래빗만의 생각일까. ‘헬조선’이라는 이름에 마땅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잠시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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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Mike Russel
▶청년들의 유일한 희망은 랩 배틀 챔피언 1995년 미국 디트로이트, 도로 8마일이 가로지르는 변두리 힙합 클럽의 화장실. 거울 앞에 한 청년이 서 있다. 밖에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고막을 찢는다. 사람들의 야유와 함성이 음악에 더해진다. 거울 속 자신을 보는 남성, 헤드폰을 끼고 손과 몸을 움직이며 입으로는 무엇인가를 계속 중얼거린다. 그는 지미 래빗(에미넴)이다. 마치 거울 속 자신과 눈싸움을 하듯 쳐다보던 래빗은 밖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헤이 래빗, 빨리 나와. 네 차례야!” 래빗은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 순간, 너무 긴장한 탓일까. 래빗은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구토를 한다. 래빗은 링 위에 오르는 권투 선수처럼 체다, 솔 등 친구들에 휩싸여 무대로 걸어간다. 발걸음이 무겁다. 무대에 오르는 래빗. 맞은편에 서 있는 흑인은 이 지역의 최강 힙합 그룹인 프리월드의 실력자 리틀 틱(프루프)이다. 리틀 틱은 ‘이건 뭐야, 백인이잖아?’ 하는 표정으로 래빗을 쳐다본다. 이곳은 랩 배틀이 벌어지는 클럽 쉘터다. 매주 금요일 폐허가 된 공허한 도시 디트로이트의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상대를 ‘디스’한다. 그리고 최후까지 살아남는 강심장 래퍼가 챔피언이 된다. 이기면 돈과 명예를 얻고, 지면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치욕을 감수해야 한다. 쉘터의 랩 경연에 참가하는 이들은 거의 흑인이다. 힙합, 랩은 리듬 앤드 블루스, 소울과 함께 흑인들의 전유물인 셈이다. 그 사각의 링에 백인 래빗이 올랐다. 동전이 하늘 위로 올라가고 리틀 틱의 45초 디스 랩이 시작된다. “이 자식은 뭐야, 골로 보내 주겠어. 난 너의 하얀 면상 때문에 웃지. 여기가 바로 힙합, 너는 관광객. 랩 실력 형편없는 흰둥이, 난 토끼의 귀를 잘라 해프너에게 보내 줄 거야. 이게 힙합이야. 넌 네 동네로 꺼져. 가서 백인들과 야구나 해.” 래빗은 눈앞이 깜깜해진다. 같은 313그룹 크루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서 있는 래빗. 흑인들은 야유를 퍼붓는다. 압박해 오는 긴장감. 결국 래빗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조롱이 쏟아진다. “힙합은 백인들의 것이 아니야.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래빗은 자신을 위로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쉘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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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의 기족은 어머니와 늦둥이 여동생 릴리뿐이다. 트레일러에 살고 있는 어머니 스테파니(킴 베이싱어)는 매일 술에 절어 빙고나 하는 것이 일이다. 아니, 하나 더 있다. 나이 어린, 래빗의 학교 선배와 동거한다. 스테파니의 꿈은 자동차 사고를 당한 뒤 알코올 중독이 된 동거남이 탈 보험금을 빼돌리는 것이다. 보험금이 나올 동안, 스테파니는 그의 섹스 파트너 노릇을 감수한다. 그것도 나이 어린 딸 앞에서. 래빗은 여자 친구를 만난다. 여자 친구는 “나 임신했어”라고 말하고 래빗은 말없이 그의 유일한 재산인 고물 자동차를 여자 친구에게 줘 버린다. 이제 갈 곳도, 잘 곳도 없다. 죽기보다 싫지만 래빗은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젊은 동거남이 있는 트레일러로 간다. 여동생은 오빠 래빗을 반가워하고 어머니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한다. 어머니의 동거남은 래빗을 조롱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래빗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폐차장에서 일하는 래빗에게 유일한 희망은 랩이다. 래빗은 종이에 가사를 적는다. 래빗뿐만이 아니다.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은 희망도 의욕도 없다. 그저 허망한 미래를 꿈꾸며 오늘 하루를 즐기는 것뿐이다. 그들처럼, 도시도 망가져 버렸다. 한때 미국의 모든 자동차를 생산해 냈던 활기찬 도시 디트로이트는 망해 버렸다. 백인들은 변두리로 떠나고 그 빈자리는 흑인들이 채웠다. 불 꺼진 가로등, 폐허가 된 빌딩, 상하수도는 물이 끊기거나 막히기 일쑤고 도로는 울퉁불퉁해졌다. 젊은이들은 그저 부유한다. 그들의 유일한 낙은 음악이다. 힙합과 랩만이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희망이자, 놀이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래빗이다. 래빗에게 위안은 친구들이다. 그나마 주체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퓨쳐(메키 파이퍼), 항상 미래를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잘되고 난 뒤를 고민’하는 몽상가 솔(오마 벤슨 밀러), 말보다는 행동이 항상 앞서는 DJ 이즈(데안젤로 윌슨), 성실하지만 둔하고 착한 체다 밥(에반 존스). 이들은 매일 모여 랩을 하고 그리고 꿈을 꾼다. ‘우리, 언젠가는 성공하겠지. 그러면 이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탈출하자. 멋지게.’ 래빗은 첫 번째 패배 이후 다시는 랩 배틀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래빗의 눈에 비친 도시는 회색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조차 회색이다. 래빗은 친구에게 말한다. “난 집도 없어. 검은 비닐에 옷을 넣고 다니지. 넌 그럴 때 있니?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야.”

래빗이 랩 배틀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 윙크(유진 비어드)가 어느 날 래빗을 찾아왔다. 윙크는 래빗에게 데모 테이프 녹음을 주선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사실 데모 녹음비조차 없는 래빗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래빗은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다음 날, 래빗이 일하는 공장으로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알렉스(브리트니 머니). 알렉스는 오빠의 차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놀림받는 동료를 도와주는 래빗을 보고 관심을 갖는다. 래빗과 알렉스는 우연찮게 부딪치고 서로 쿨하게 ‘퍽 큐’를 날린 뒤 헤어진다. 래빗은 클럽에 간다. 그곳에서 다시 알렉스를 만난 래빗. 그녀는 모델 지망생. 곧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다. 알렉스는 래빗에게 “너의 랩은 좋아. 내 생각에 너는 뜰 거야. 금요일 랩 배틀에 나와. 그리고 날 초대해 줘”라고 말한다. 래빗은 확답하지 않는다. 래빗과 이야기하는 알렉스를 보고 말을 건네는 윙크. 윙크는 알렉스에게 “내가 화보집을 만들 수 있게 알아봐 줄게”라고 말한다. 래빗은 속으로 생각한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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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대 포드 자동차 공장의 교대 시간(위키피디아) 2 1973년 기차에 실려 이동하는 새 자동차들(위키피디아) 3 버려진 자동차 공장(위키피디아 ©Albert duce) 4 제너럴 모터스 헤드쿼터(©James Marvin Phelps)
▶‘그래,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어!’

래빗은 여동생 릴리를 돌본다. 랩 가사를 쓰며 동생을 쳐다보는 래빗. 래빗은 이번 데모 테이프 녹음이 잘 되면 지긋지긋한 트레일러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헤드폰을 끼고 랩을 연습하는 래빗, 이런 오빠의 모습을 종이에 그리는 여동생. 래빗은 여동생이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는다. ‘나를 실제보다 크게 그렸네. 그래 오빠의 꿈은 랩이고, 어린 동생 릴리의 꿈은 오빠니까.’ 래빗은 그때 트레일러에서 터져 나오는 큰소리를 듣는다. 엄마의 동거남이 막상 보험금이 나오자 엄마를 나몰라라 하고 떠나 버린 것이다. 엄마는 그 보험금에서 일부라도 받기 위해 그의 섹스 파트너가 되어 주었는데. 래빗은 술에 취한 엄마와 싸운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그 답답함을 푸는 것이다. 래빗은 데모 녹음을 상의하기 위해 윙크를 찾아 프로덕션으로 간다. 그곳에서 래빗은 윙크와 알렉스가 섹스를 하는 것을 본다. 흥분한 래빗은 윙크를 두들겨 팬다. 래빗은 윙크에게, 엄마에게 아니 세상에 분노한 것이다. 그날 밤, 래빗은 프리월드 그룹과 마주친다. 윙크의 일을 보복하려 래빗을 찾아온 그들에게 래빗은 무참하게 얻어맞는다. 좌절한 래빗에게 퓨쳐가 찾아온다. 그는 래빗에게 자신이 랩 배틀 신청을 했다며 대회에 나가라고 한다. 래빗은 자신이 없다. 퓨쳐는 래빗에게 도망가지 말라며 화를 낸다. 래빗은 고개를 숙인다. 그날 밤, 공장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 래빗에게 알렉스가 찾아온다. 알렉스는 뉴욕으로 떠날 것이라며 작별 인사를 한다. 래빗은 랩 배틀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쉘터는 열기로 가득하다. 래빗은 랩 배틀에 참가한다. 래빗은 독기를 품었다. ‘그래,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잖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야. 까짓것 해 보자.’ 알렉스가 조용히 래빗을 응원한다. 래빗은 현란한 랩 솜씨로 상대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 상대는 바로 프리월드의 리더 파파 덕. 랩 배틀의 MC는 래빗의 친구 퓨쳐다. 동전이 하늘로 올라가고 래빗이 선공이다. 시간은 1분30초가 주어졌다. 래빗은 눈을 부릅뜨고 파파 덕을 쳐다본다. 그의 눈은 이글거린다. 그의 가슴에 가득 쌓여 있는 울분, 불만, 좌절 등이 먼저 튀어 나가려 다툼을 한다. “여기, 313동네 사는 사람들 모두 손들어 봐. 무게 잡지 말고, 너희는 왜 손을 안 들었지. 원팍 투팍 스리팍…. 난 흰둥이. 돈도 없어 집도 없어. 엄마 트레일러에 얹혀사는 백인 쓰레기. 능력 없어 여자 친구도 친구에게 뺏기는 졸장부. 내 친구는 지 허벅지를 총으로 쏴 버렸지. 그래, 난 너희들에게 쌍코피 터지고 여자도 빼앗겼지만 너의 비밀을 알지. 크랜브록 사립 학교 다녔지. 이 무늬만 갱스터의 본명은 클라렌스, 더구나 얘는 엄마 아빠 사이도 좋아. 부모님과 아주 행복하게 살았대. 넌 반만 꺾인 갈고리. 난 백인 쓰레기야. 그래서 내가 역겨워. 뭐 같은 랩 배틀. 난 여길 떠날 거야. 날 더 디스할 것이 있으면 실컷 씹어 봐. 나는 토끼, 너는 터틀….” 음악이 끝나자 래빗은 아카펠라로 랩을 이어간다. 환호가 터진다. 래빗에 이어 마이크를 넘겨받은 파파 덕. 비트가 흐른다. 하지만 파파 덕은 마이크를 들지 못한다. 그가 준비한 디스를 래빗이 스스로 다 해버린 것. 더구나 클라렌스라는 귀족적 이름에, 명문 사립학교 크랜브록을 다녔다는 자신의 이력은 이곳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파파 덕 또한 잘 알고 있다. 파파 덕은 마이크를 퓨쳐에게 던지고 무대를 떠난다. 313그룹과 쉘터의 관객들은 새로운 챔피언 탄생을 축하한다. 친구들은 래빗을 둘러싸고 열광한다. “잘했어, 래빗. 이제 네가 뉴 챔피언이야. 축하하는 의미로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해야지. 가자, 래빗!” 래빗은 무심한 듯 친구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꺼낸다. “나 공장에 야근하러 가야 해.” 몸을 돌리고 걷는 래빗. 래빗은 자신을 무시하던 래퍼들에게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래빗은 가슴 속의 울분을 토해 낸 것이다. 걸어가는 래빗을 뒤로하고 그의 강렬한 랩이 흘러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Lose Yourself’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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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Stephanie Hume
“만약에, 네가 단 한 번, 단 한 번의 행운으로 / 원했던 모든 걸 쟁취할 수 있게 된다면 / 그 기회를 잡겠어? 아니면 그냥 날려 버리겠어? / 손에는 땀이 나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팔은 힘이 빠졌지 / 셔츠는 벌써 더러운 게 묻었어 /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모든 게 준비된 듯 버티고 서서 / 모든 걸 날려 버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 계속해서 잊어버려 / 종이에 적었던 가사들을 / 이제 관중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지 / 나는 입을 벌려 보지만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해 / 뭔가가 나를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어 / 사람들의 농담을 다 참아 내고 있는 거지 /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 이제 시간이 다 됐어, 빌어먹을! / 다시 현실을 직시해 보면 진지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아 / 그냥 도망쳐 버릴까 하지만 꾹 참아내 / 화는 머리끝까지 나지만, 절대 포기하진 않을 거야 / 그렇지? 물론이야 / 해내지 못할 걸 알고 있어 / 이 바닥이 결국 한통속이라는 걸 아니까 / 그래도 상관없어, 난 바보니까 /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가난한 걸 어떡하라고 / 바보라서 다 알고 있어 / 집이 없어, 버스로 돌아가면 결국 또 다시 / 의자에 혼자 틀어박혀서 가사나 쓸 거라는 걸 / 이 뭐 같은 랩을 말이야 / 그러니까 이 순간을 잡아서, 이 기회가 날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 음악에 빠져 네 자신을 잃어 봐 / 네가 가진 순간에, 절대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단 한 번뿐이야, 다 날려 버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 네 삶에서 이런 행운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아.”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Daum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3호 (19.06.1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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