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문화

안국동 安國洞-격을 갖춘 점잖은 동네

입력 : 
2019-06-26 11:13:37

글자크기 설정

종로구 안국동은 동명의 한자 음과 딱 부합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중간으로 ‘나라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동명에 깃든 셈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과 사대부들이 양 궁궐을 오가며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물론 이름의 유래는 조선 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북부 안국방에서 유래한다.

사진설명
동명처럼 안국동에는 근대 우리나라의 평안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선조들,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종 황제로부터 받은 밀서를 가슴에 품고 헤이그로 달려갔던 이준 열사, 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가옥, 그리고 종교와 교육으로 쇠약해지는 국운을 붙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박승봉, 김창제 등이 세운 안동 교회가 안국동에 있다. 안국동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3번 출구로 나오면 시작된다. 종로경찰서 맞은편으로 재동, 북촌, 삼청동과 이웃하고 있다. 3번 출구로 나와 골목으로 접어들어 좀 걷다 보면 꽤나 볼품 있는 솟을대문이 눈에 띈다. 바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의 시작은 1870년대 당대 세도가 민영익이 아들 민규식에게 지어 준 집이다. 이를 고종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돌아온 철종의 부마 박영효에게 하사했고 후에 이 집을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가 1910년에 매입했다. 윤치소는 집 주변의 가옥들을 인수해 대지 1400여 평의 99칸 대저택으로 개조했다. 조선은 왕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세도가나 부자라도 개인의 집이 100칸을 넘을 수 없었기에 99칸에 멈춘 것이다. 한때 ‘안동궁’으로 불린 이 집은 전형적인 근대기 사대부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기점으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안사랑채, 별당채 그리고 창고인 광을 만들어놓은 광채가 연결되어 있다. 남향으로 앉은 집은 각 채마다 담장을 둘러 나름의 독립된 공간과 그 공간의 쓰임새 주인의 권리를 보장한 아름다운 한옥이다. 윤보선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교회가 있다. 바로 안동교회다. 이 교회는 1909년에 첫 기도를 올렸다. 일제와 합병되기 바로 1년 전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당시 양반 선각자들이 모여 순수하게 선교사 없이 한국인이 교회를 세웠다. 외교관 출신 박승봉, 『서유견문록』을 쓴 사상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이 김창제의 집에 교회 기틀을 쌓은 것이다. 이에 못지않은 ‘작지만 큰 뜻이 담긴 푯돌’도 있다.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한국걸스카우트연맹 건물을 지나면 작은 공간에 ‘이준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될 때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190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인상점(婦人商店)을 연 곳이기도 하다’라고 적힌 푯돌이 있다. 이 푯돌은 이준 열사의 헤이그 특사 사건 110주년인 2017년에 세워졌다. 당시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 가 만국에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무효화를 주장했지만 세계 열강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울분을 못 이겨 그곳에서 순국했다. 이준 열사의 시신은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되었다. 그리고 순국 55년 만인 1963년 귀국해 수유리 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준 열사의 정신 못지않게 이 푯돌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의 부인인 이일정과 그녀가 1907년에 낸 일정상회다. 주로 살림을 하는 부인들이 필요한 용품을 팔던 이 가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상점으로 의미가 있다. 헌법재판소, 정독도서관도 자리한 안국동은 참으로 점잖은 동네다. 물론 조선 말, 일제 강점기로 접어드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이곳의 선조들은 그 태와 품격은 점잖았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한 행동만은 격정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글 장진혁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5호 (19.07.02)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