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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논-픽션’ 책과 e-book 사이, 인생의 논픽션

입력 : 
2019-05-29 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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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해 보이는 파리지앵도 똑같았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먼저 떠나고, 자신을 위로해 주는 이와 바람을 피운다. 현대 문물에 매혹되지만 결국 종이책과 본처는 쉽게 버리지 못한다. 끊임없이 작품 세계와 책의 미래, 멀티미디어의 발전에 관해 서로 토론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사 말대로 ‘지적 취향 토크 버스터’가 맞다.

‘퍼스널 쇼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신작 ‘논-픽션’은 디지털로 인한 출판계의 지각 변동을 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알랭(기욤 까네)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작가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의 글을 거절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알랭의 부인이자 스타 배우인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최근 들어 자신이 발전이 없는 것 같은 회의를 느끼던 중 레오나르와 바람을 피우게 된다. 한편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젊은 디지털 마케터 로르(크리스타 테렛)와 알랭은 종이책과 전자책에 대해 팽팽한 대립을 하다가 특별한 사이로 발전한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영화 전체에 갈등이 폭발하는 긴 대사들을 넣는 형식을 택했다. 겉보기엔 큰 사건이 없는 가운데 책 출간, 이별, 북토크, 재회 등이 이어지며 폭발하는 대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곧 부딪힐 것 같은 갈등 분위기로 계속 나아간다. 논픽션으로 자기 과거 연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내는 작가, 종이책과 e-book 사이에서 고민하는 성공한 편집장, 남편의 외도를 방임하면서 자신도 바람을 피우는 스타 배우…. 영화는 일에 있어서는 프로지만 관계에서는 신경 쇠약 직전의 주인공들이 지닌 인간미, 올리비에 감독의 작품에서 잘 찾아보지 못했던 코미디 요소들, 고전 영화 같은 분위기로 디지털 혁명을 이야기한다는 점 등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작품 중 가장 재미있고 위트가 넘친다”는 외신의 말처럼 ‘논-픽션’에는 연애의 코미디와 미디어에 대한 예리한 시선이 흘러넘친다. 영화는 내내 출판계의 변화와 디지털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레오나르의 아내이자 비서인 발레리(노라 함자위)가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을 충전하는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그 어떤 멀티미디어도, 심지어 넷플릭스나 스마트폰 화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e-book이 나타나도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넷플릭스나 아마존의 습격에도 결코 영화는 자기 자리를 내주지 않을 거라는 감독의 믿음을 보여 주는 듯도 하다.

특히 올리비에 감독은 여주인공 각각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었다. ‘사랑해 파리’,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이어 ‘논-픽션’까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 6편의 작품을 함께한 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의 실제 직업과 같은 ‘배우’ 역을 맡아 고혹적이고 지적인 매력을 폭발시킨다. 매력적인 외모로 알랭을 유혹하고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 끌려가지 말고 선택하라”고 말하는 로르 역의 크리스타 테렛의 에너지, 레오나르의 아내 역을 맡은 프랑스 코미디언이자 칼럼니스트 노라 함자위의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극 연기도 눈부시다. 줄리엣 비노쉬와 기욤 까네는 ‘논-픽션’에서 처음 호흡을 맞춰 이들을 한 스크린에서 보기 바랐던 시네필들의 환호를 사고 있다. 어쩌면 가장 현실감 있는 인물인 알랭을 연기한 기욤 까네는 전자책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산업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에 따른 고민과 갈등을 리얼하게 보여 준다. 책 출간, 작가와의 만남, 북토크 등 출판계를 배경으로 한 이유는 최근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변화랄 수 있는 디지털 혁명이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치는 분야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디어의 변화는 라이프스타일과 소비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인간관계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물살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지만 주인공들은 쉽게 옛것을 버리지 못한다. 알랭이 당차고 패기 넘치는 로르에게 빠졌지만 자신의 아내 셀레나를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글 최재민 사진 (주)트리플픽쳐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1호 (19.06.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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