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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태원동 梨泰院洞-다양한 문화의 용광로이자 해방구

입력 : 
2019-05-29 17: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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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 원대의 럭셔리와 XXL 사이즈 옷의 공존처럼 이태원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다름’을 인정하고 ‘색다름’을 낯설어 하지 않는 ‘포용의 문화’일 것이다. ‘용광로이자 해방구’가 바로 이태원의 존재 이유다.

예부터 남산 남쪽에 자리한 이 동네는 배나무가 많아 ‘이태원’이라 불렸다. 서울과 각 지방을 연결하는 역참과 함께 설치된 원院이 있어 이태원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이태원은 꽤 오랜 시간 ‘색다른, 이국적인 것’이 많다는 점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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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단연 미군이다. 미8군 사령부가 용산에 주둔하면서 금요일 저녁이면 미군들이 이곳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클럽들이 생기면서 지금 이태원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1962년 ‘세븐클럽’이라는 미군 전용 술집이 문을 열었고 다음 해에는 ‘UN클럽’, ‘게이트 웨이’ 등이 문을 열었다. 88올림픽 전후의 전성기에는 이태원에만 250여 개의 클럽이 있어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서울의 번화가와 다른 독특함이 이태원에 있었다고 떠올린다. 밤 11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사람보다 택시에서 내리는 이른바 2차, 3차 손님이 더 많았고, 순찰을 도는 미군 헌병들의 모습도 특이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부에 접어들며 심야 영업 금지, 미군 부대 이전, 강남, 홍대 등이 번성함에 따라 이태원의 쇠락이 시작되었다. 미군과 젊은이들의 빈자리를 대신한 것은 한국 거주 외국인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식당들이었다. 햄버거의 미국, 아프리카, 벨기에, 멕시코, 불가리아, 베트남, 이탈리아, 그리스 등은 물론이고 이슬람권의 할랄푸드 전문점까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최근 2030 밀레니얼 세대가 개성과 전문성을 갖춘 이곳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태원의 제2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태원은 그때부터 세밀하게 진화하기 시작했다. 경리단길, 우사단로, 회나무로 등으로 ‘범이태원권’을 형성하며 서울의 핫플레이스로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태원의 독특함은 이태원로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의 주거 형태에서 도드라진다. 남산으로 이어지는 북쪽은 저택들과 꼼데가르송길, 리움미술관, 하얏트호텔로 이어진다. 그저 터벅터벅 걸어서 산책하기에는 경사가 급한 언덕들이 곳곳에서 산책 의지를 막는다. 그에 비해 남쪽으로 한남동 순천향병원, 보광동, 크라운호텔 주변에는 다양한 형태의 주거지와 재래시장이 있어 나름 ‘아날로그적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또 하나 이태원의 다양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현대카드 공연장, 블루스퀘어 같은 공연장이다. 사실 이태원에서 유일하게 부족했던 ‘문화적 포만감’을 이곳들이 채워 주어 이태원을 즐겨 찾는 사람들은 굳이 ‘강남행’에 대한 미련이 없는 편이다.

이태원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방서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이다. 한국에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성지와 다름없는 곳이다. 1970년대 남북 냉전 시 중동 국가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정부가 모스크 건립을 제안해 중동 국가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만들었다. 묘한 것은 오락과 쾌락의 본격 생산지에서 불과 몇 걸음만 옮기면 가장 신성한 장소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의 일상화’가 이태원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태원 번성의 1등 공신으로 미국 유학을 경험한 세대들에게 ‘브런치 문화’를 제공한 것을 꼽기도 한다. 바로 브런치 카페의 효시인 ‘수지스’의 존재감이다. 새로운 것이 매일 탄생하는 이태원에서 수지스와 함께 거론되는 집은 이름부터 궁금한 ‘존슨탕’, 50년 내공의 ‘바다식당’, ‘냉삼(냉동삼겹살)’으로 30여 년을 훌쩍 넘긴 ‘나리의 집’ 등이 이태원의 터줏대감들이다.

[글 장진혁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1호 (19.06.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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