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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침묵의 세계, 고요한 봄날 화가의 집-운보의 집

입력 : 
2019-05-29 17: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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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화가의 집에 가고 싶어졌다. 화가의 실명을 붙이고 운영 중인 미술관은 꽤 많지만 화가의 집과 미술관이 함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운보 김기창의 집’은 그의 생가이자, 미술관이자, 화실이자, 뜨락이다. 넓은 한옥, 아담한 전시관, 취향에 따라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정원과 수석, 그리고 부부의 묘까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삶과 죽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곳은 햇살마저 천천히 내려앉는 차분하고 무료한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입을 닫고 귀를 닫기를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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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할 길은 막막하다. 오감 중 어느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 때, 장애를 겪게되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 아니다. 김기창은 변화무쌍한 인물이었다. 시대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나가는 인물이 아닌, 시류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화풍을 실험했고, 삶의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트렌디한 인물로 규정하기에, 그는 너무 높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거장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규정은 필요하다. ‘화가’라니. 그 얼마나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설정이란 말인가. 먼저, 그는 여러 가지 화풍의 그림을 실험하고 그렸지만, 대개는 ‘한국화가’로 부른다. 그는 대단한 의지를 지녔으되 급하게 살진 않았다. 또한 탁월한 그림을 그렸으되 일상에서는 평범했으며, 때론 나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없는 ‘운보의 집’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그의 집, 미술관, 그림에 운보의 우직한 삶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선사한 화가의 길

‘운보의 집’은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 ‘조각공원’, ‘수석공원’ 등 네 곳의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운보의 집은 운보의 화실이자 살림집이자 그의 역작인 ‘예수의 생애’ 전시장으로 개방된 곳이다. ‘운보미술관’은 운보의 작품들과 그가 사랑했던 아내 우향 ‘박래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공원과 수석공원은 운보와 우향이 합장되어 있는 묘소와 이어져 있는데, 무료한 멍 때리기에 그만인 공간이다. 운보의 집을 찾은 그날, 날씨는 청명했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울긋불긋 꽃대궐이 된 운보의 집 곳곳에서는 새로운 생명들이 움트고 있었다. 새소리가 끊이지 않은 정원에서는 노련한 솜씨의 관리인이 나무와 꽃을 다듬고 있었다.

‘운보의 집’은 다른 화가의 미술관과는 다른 개인사를 지니고 있다. 화가의 이름을 붙인 대개의 미술관들이 건축 출발부터 지방정부 또는 특정 문화재단의 계획과 비용 하에 시작되는 것과 달리, 운보의 집은 이름 그대로 운보 김기창이 어느날 ‘집’으로 돌아와 터를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지어나간 곳이다. 운보의 집은 청주시 청원군의 나즈막한 산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김기창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79년.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었고, 아내이자 함께 화가의 길을 걸어온 부인 박래현 씨가 세상을 뜬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이곳은 본인의 고향이 아닌, 어머니의 집이 있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22년을 더 살고 2001년 88세의 나이로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

김기창은 1913년 생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창덕궁 근처 종로구 운니동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게 시작되었다. 인사동에 있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장티푸스에 걸린 그는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청각을 잃게 되었다.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된 그는 듣지 못하니 말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며 자식이 무엇을 해서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했다(듣지 못하게 된 직후 말도 하지 못했던 김기창은 훗날 말하기 공부를 통해 어눌하나마 구화를 통해 소통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상적인 배움의 길을 걷지 못했다. 들리질 않으니 학교 교육이 무슨 소용 있었을까. 교실에 들어가도 할 일이 없었던 김기창은 도화지에 낙서나 하며 지냈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행동을 ‘대안없는 행동’으로 보지 않고 ‘미술의 싹’으로 인식했다. 그의 아버지는 ‘듣지도, 말도 못하는 아들이 그래도 덩치는 크니 목수를 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화가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와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기창은 1930년, 18세 나이에 이당 김은호의 화숙 ‘낙청현’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김은호는 일본 유학파 화가로 어린 시절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뒤 일본으로 가 도쿄미술학교 교수인 ‘유키 소메이’로부터 섬세한 묘사에 기초한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익혔고,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인물이었다. 당시 미술을 꿈꾸는 젊은(어린) 화가 지망생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김은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김기창이 김은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덕이었다고 한다. 김기창의 낙청현 동문으로는 김인승,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이석호, 한유동, 장운봉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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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에 그림도 삶도 달라졌다

김기창은 그림에 빠른 속도로 빨려들었다. 미술 수업을 시작한지 불과 1년 만인 1931년, 제10회 선전에 널뛰기를 뜻하는 ‘판상도무’를 출품, 입선을 따내는 영예를 이뤘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물론 어머니였다. 아무 문제 없던 아들이 전염병에 걸리고, 치료 과정에서 열을 더해주는 인삼을 먹고 오히려 병세가 악화돼 결국 청각장애인이 되어버린 어린 아들의 모습을 지켜봐야했던 ‘애잔한 모성’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김기창의 입선에 크게 기뻐한 어머니 한윤명 씨는 아들에게 ‘운포雲圃’라는 화명을 선물한다. 구름 운에 채마밭 포, ‘높은 곳, 신선, 그림, 몰두, 자연’ 즉, ‘그림에 푹 빠져 사는 순수한 삶’이라는 뜻으로 읽히는 이름이다. 아들이 제 삶을 찾아가는 모습과 가능성을 확인한 어머니의 마음은 기쁜 안심, 격려 그런 것들로 가득했을 것이다(김기창은 해방 후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호를 口를 뗀 ‘운보雲甫’로 바꿨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2년 제11회 선전에 ‘수조’라는 작품으로 다시 입선의 영예를 안은 김기창에게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 어머니, 한윤명 씨가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산후 부황과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자신에게 온 정성을 쏟아주었던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상실감 이상의 아픔을 주었다. 그러나 김기창은 젊었고, 어머니가 선사한 ‘그림’이 있었다. 김기창은 더욱 그림에 몰두했고 선전에서 특선에 입상하는 등 화가로서의 삶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뒤, 김기창 앞에 박래현이라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화가였다. 당시 박래현은 선전에 출품한 작품이 특선을 수상하자 시상식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한 상태였고, 귀국한 김에 김기창과 인사도 나눈 것이다. 박래현과 김기창은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고 그 마음을 애써 감추려하지 않았다. 김기창의 청각장애도 그들의 소통에 방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화를 필담으로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결혼한다. 같은 화가로 만나 사랑하고 결혼까지 한 이 커플은 평생 그림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고, 그것은 서로의 작품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김기창은 실제로 박래현과의 결혼 후 화풍에 변화가 왔다. 이전까지의 그림이 김은호의 낙청현에서 그림을 사사할 때 배운 ‘채색 위주의 사실 묘사’ 기법으로 일관되었다면, 박래현을 만나 더 넓은 미술 세계를 공유한 뒤에는 수묵담채화를 중심으로 한 반추상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동지로서의 삶은 서로의 그림에 영향을 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1947년, 부부는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연 것으로 시작으로 1971년까지 모두 17회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 국내 최고의 화가 부부로서의 작품과 성과를 관객들과 나눴다. 1976년 부인이 세상을 뜨면서 ‘우향-운보 부부전’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에는 김기창뿐 아니라 부인 박래현 화백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어서 생전 부부의 뜻과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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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의 굴레와 변화 김기창은 해방이 되자 어머니가 선물한 아호이자 화명인 ‘운포雲圃’의 포 자에서 네모를 뺀 ‘운보’ 雲甫로 개명한다. 의미는 변한 게 없지만, 시각적으로 ‘굴레를 걷어버린 글자’ 형태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운포에서 운보로 바뀐 화명에서는 ‘스승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화풍의 다양성’ 등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해방 후 김기창은 식민지 시절 일제에 적극 협조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모든 것이 변화하던 시대의 한복판에 김기창도 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때 박래현의 친정이 있는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한 김기창은 굵직한 연작화 ‘예수의 생애’를 그려낸다. 전쟁의 포화와 불안 속에서 화가는 왜 ‘예수의 생애’를 구상했을까? 모태신앙자로 태어난 그는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는데, 한 신부로부터 ‘성화를 그리시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났고, ‘평화와 생명에 대한 소망’을 ‘예수의 생애’라는 연작을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는 운보의 집 한옥 지하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그림을 그릴 당시 김기창의 심정을 밝힌 발문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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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음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는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통곡을 끝내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동굴이 아닌 햇빛이 눈부신 방에 앉아 화필을 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박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예수의 행적을 더듬는 성화를 그리고 있었다. 때는 6.25전쟁의 가열로 온 민족이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냈던 1952년 전북 군산의 피난처였다. 나는 전북 군산의 처가에서 나의 고통스런 생활을 화필로 달래며 어서 이 땅에서 전쟁이 끝나고 통일된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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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은 예수의 생애 30작품 가운데 29작품을 불과 1년 6개월 만에 완성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29점의 작품에 ‘예수의 부활’을 주제로 한 그림은 없었다. 그리고 완성 3년 뒤 이 작품을 본 독일인 신부의 조언에 따라 ‘부활’을 추가, 모두 30점으로 완성했다.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가 주목받는 이유는 서양에서 유래한 종교인 기독교의 이야기를 한국화로 재해석 했다는 점이다. 예수와 열두 제자는 물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찾아온 동방박사는 ‘조정 신료’의 복장을 하고 있고 민중을 핍박하는 군사들은 조선의 포졸들의 모습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난 천사들은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천사가 아닌, 선녀들이다. 김기창이 도시 생활을 접고 이곳,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청원군 내수읍 산자락으로 귀향한 것은 1984년의 일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용한 곳을 찾게 되었고, 늙어서도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다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이곳에 지은 ‘운보의 집’은 어머니에 대한 향수는 물론, 1976년 1월 세상을 뜬 아내이자 그림 동지인 ‘박래현’과의 영면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박래현이 죽을 무렵을 전후한 20여 년 동안, 그는 ‘바보산수’, ‘바보화조’, ‘청록산수’ 등 순진무구한 인간의 본성과 자유 의지를 표현한 그림으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화명 ‘운포’의 뜻과 일치하는 작업이었다. 김기창은 1995년, 나이 81세 때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2001년 1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아내의 봉분 속으로 들어가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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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삶은 두 가지 일관된 사실 속에서 이어졌고 마무리되었다. 첫째, 그는 화가로서의 일을 놓은 적이 없었다. 둘째, 그는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으며 각고 끝에 어눌하게 나마 말을 하게 되었지만 30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의 육성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절망할 수도 있었을 청각 장애 속에서도, 그는 오히려 그 고요의 세계를 자신만의 삶과 예술의 바탕으로 삼았다. 누가 감히 알 수 있으랴, 소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다름’을. 그는 자신의 청각 장애에 대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예술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뒤에는 청각 장애로 절망하는 이웃을 위한 나눔 활동을 전개했고, 1979년에는 ‘한국농아복지회’를 만들어 복지 기틀을 마련했고 1984년에는 청각장애인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김기창 사후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근거가 이것이다. 사적인 상상이지만, 운보의 집 관람 규칙에 ‘귀마개를 하고’, ‘침묵하는’ 항목이 추가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그가 바라보던 세상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았을까.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1호 (19.06.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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