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선사한 화가의 길
‘운보의 집’은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 ‘조각공원’, ‘수석공원’ 등 네 곳의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운보의 집은 운보의 화실이자 살림집이자 그의 역작인 ‘예수의 생애’ 전시장으로 개방된 곳이다. ‘운보미술관’은 운보의 작품들과 그가 사랑했던 아내 우향 ‘박래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공원과 수석공원은 운보와 우향이 합장되어 있는 묘소와 이어져 있는데, 무료한 멍 때리기에 그만인 공간이다. 운보의 집을 찾은 그날, 날씨는 청명했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울긋불긋 꽃대궐이 된 운보의 집 곳곳에서는 새로운 생명들이 움트고 있었다. 새소리가 끊이지 않은 정원에서는 노련한 솜씨의 관리인이 나무와 꽃을 다듬고 있었다.
‘운보의 집’은 다른 화가의 미술관과는 다른 개인사를 지니고 있다. 화가의 이름을 붙인 대개의 미술관들이 건축 출발부터 지방정부 또는 특정 문화재단의 계획과 비용 하에 시작되는 것과 달리, 운보의 집은 이름 그대로 운보 김기창이 어느날 ‘집’으로 돌아와 터를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지어나간 곳이다. 운보의 집은 청주시 청원군의 나즈막한 산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김기창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79년.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었고, 아내이자 함께 화가의 길을 걸어온 부인 박래현 씨가 세상을 뜬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이곳은 본인의 고향이 아닌, 어머니의 집이 있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22년을 더 살고 2001년 88세의 나이로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
김기창은 1913년 생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창덕궁 근처 종로구 운니동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게 시작되었다. 인사동에 있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장티푸스에 걸린 그는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청각을 잃게 되었다.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된 그는 듣지 못하니 말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며 자식이 무엇을 해서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했다(듣지 못하게 된 직후 말도 하지 못했던 김기창은 훗날 말하기 공부를 통해 어눌하나마 구화를 통해 소통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상적인 배움의 길을 걷지 못했다. 들리질 않으니 학교 교육이 무슨 소용 있었을까. 교실에 들어가도 할 일이 없었던 김기창은 도화지에 낙서나 하며 지냈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행동을 ‘대안없는 행동’으로 보지 않고 ‘미술의 싹’으로 인식했다. 그의 아버지는 ‘듣지도, 말도 못하는 아들이 그래도 덩치는 크니 목수를 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화가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와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기창은 1930년, 18세 나이에 이당 김은호의 화숙 ‘낙청현’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김은호는 일본 유학파 화가로 어린 시절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뒤 일본으로 가 도쿄미술학교 교수인 ‘유키 소메이’로부터 섬세한 묘사에 기초한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익혔고,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인물이었다. 당시 미술을 꿈꾸는 젊은(어린) 화가 지망생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김은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김기창이 김은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덕이었다고 한다. 김기창의 낙청현 동문으로는 김인승,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이석호, 한유동, 장운봉 등이다.
김기창은 그림에 빠른 속도로 빨려들었다. 미술 수업을 시작한지 불과 1년 만인 1931년, 제10회 선전에 널뛰기를 뜻하는 ‘판상도무’를 출품, 입선을 따내는 영예를 이뤘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물론 어머니였다. 아무 문제 없던 아들이 전염병에 걸리고, 치료 과정에서 열을 더해주는 인삼을 먹고 오히려 병세가 악화돼 결국 청각장애인이 되어버린 어린 아들의 모습을 지켜봐야했던 ‘애잔한 모성’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김기창의 입선에 크게 기뻐한 어머니 한윤명 씨는 아들에게 ‘운포雲圃’라는 화명을 선물한다. 구름 운에 채마밭 포, ‘높은 곳, 신선, 그림, 몰두, 자연’ 즉, ‘그림에 푹 빠져 사는 순수한 삶’이라는 뜻으로 읽히는 이름이다. 아들이 제 삶을 찾아가는 모습과 가능성을 확인한 어머니의 마음은 기쁜 안심, 격려 그런 것들로 가득했을 것이다(김기창은 해방 후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호를 口를 뗀 ‘운보雲甫’로 바꿨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2년 제11회 선전에 ‘수조’라는 작품으로 다시 입선의 영예를 안은 김기창에게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 어머니, 한윤명 씨가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산후 부황과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자신에게 온 정성을 쏟아주었던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상실감 이상의 아픔을 주었다. 그러나 김기창은 젊었고, 어머니가 선사한 ‘그림’이 있었다. 김기창은 더욱 그림에 몰두했고 선전에서 특선에 입상하는 등 화가로서의 삶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뒤, 김기창 앞에 박래현이라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화가였다. 당시 박래현은 선전에 출품한 작품이 특선을 수상하자 시상식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한 상태였고, 귀국한 김에 김기창과 인사도 나눈 것이다. 박래현과 김기창은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고 그 마음을 애써 감추려하지 않았다. 김기창의 청각장애도 그들의 소통에 방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화를 필담으로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결혼한다. 같은 화가로 만나 사랑하고 결혼까지 한 이 커플은 평생 그림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고, 그것은 서로의 작품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김기창은 실제로 박래현과의 결혼 후 화풍에 변화가 왔다. 이전까지의 그림이 김은호의 낙청현에서 그림을 사사할 때 배운 ‘채색 위주의 사실 묘사’ 기법으로 일관되었다면, 박래현을 만나 더 넓은 미술 세계를 공유한 뒤에는 수묵담채화를 중심으로 한 반추상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동지로서의 삶은 서로의 그림에 영향을 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1947년, 부부는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연 것으로 시작으로 1971년까지 모두 17회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 국내 최고의 화가 부부로서의 작품과 성과를 관객들과 나눴다. 1976년 부인이 세상을 뜨면서 ‘우향-운보 부부전’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에는 김기창뿐 아니라 부인 박래현 화백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어서 생전 부부의 뜻과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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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1호 (19.06.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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