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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동 汝矣島洞-정치, 금융, 방송의 상징과 ‘행복한 고립감’

입력 : 
2019-06-05 11: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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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월이면 국회 의원을 뽑는 총선이 열린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이들은 ‘금배지를 달고 여의도에 입성’한다. 대한민국 국민 5000만 명 중에서 단 300명만이 누릴 수 있는, 막강한 권력과 막중한 책임이 함께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금배지의 주인공이 될 확률은 0.000006%다. 그런 이들이 여의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매체, 방송. 그 방송의 대표 격인 지상파 3사 KBS, MBC, SBS가 여의도에 있었다. 연예계 신인들에게 ‘여의도 입성’은 국회 의원의 금배지 못지않은 기회였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 무렵 한국증권거래소가 여의도에 자리 잡으면서 여의도에는 은행, 증권사, 투자사, 종금사 등 많은 금융 회사들이 따라서 생겨났다. 그 당시, 점심시간이면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맨 금융맨들의 대이동이 일상이었고, 저녁이면 서여의도 빌딩의 2층에 문을 연 ‘낮카밤술’, 즉 낮에는 카페였다가 밤에는 술집으로 변신하는 작은 공간들이 금융맨들에게 점령당했다.

이처럼 여의도는 정치, 방송, 금융 분야에서 상징으로 군림했다. 지금 여의도는? 물론 예전 같지 않다. 금융사들도 일부 떠나고 방송국은 KBS만 남아 있지만, 여전히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여야 당사가 위치에 한국 정치의 중심이기는 하다.

여의도는 섬이다. 역사에서 여의도에 대한 언급은 조선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잉화도는 서강 남쪽에 있으며 목축장이 있는데, 관원을 보내어 목축을 감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여의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잉화’, ‘나의’, ‘여의’ 등등. 그 유래 역시 각각이다. 한강에 홍수가 나면 지대가 낮은 여의도는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만 남기고 다 물에 잠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의 섬’ ‘너의 섬’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고, 또 ‘쓸모없는 땅’이라는 인식에 ‘너나 가질 섬’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조선 왕실에서 가축 방목에 유리한 섬이라는 지형을 택해 이곳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면 ‘쓸모없는 땅’이라는 설은 신빙성이 낮다.

여의도가 지금 모습의 원형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다. 일제는 1915년 이곳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1920년 이탈리아인 조종사 페라린과 마지에로가 공군기를 몰고 처음 착륙했다. 당시 서울 시민 수만 명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운집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거의 방치되었던 여의도는 1970년대 서울 개발과 함께 시범 아파트 건설, 1975년 국회 의사당, 1976년 KBS, 1982년 MBC, 1990년 SBS가 입주하면서 ‘여의도=방송계’라는 등식을 완성했다. 그리고 1979년 명동에서 한국증권거래서가 이전해 오면서 증권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1980, 1990년대에 이르러 여의도의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여의도는 중앙의 여의대로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된다. 동쪽은 국회, 방송국 등 각종 공공 기관이 자리한다. 이에 비해 서쪽은 방송국, 아파트, 상가, 회사, 주상복합, 학교 등 주거지와 상가가 공존한다. 그래서 저녁 퇴근 무렵이면 여의도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더 많은 도심의 전형을 보인다. 이런 현상은 주말이면 더욱 두드러져, 이 넓은 여의도는 여의도동 주민들의 것이 된다. 지금은 IFC몰, 한때 서울 관광 필수 코스였던 63스퀘어 등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여의도는 ‘섬의 고립감’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고립감이 여의도만의 독특한 색깔이다. 또한 여의도동 주민들은 그들의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튼튼한 아파트처럼 단단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고 있다.

[글 장진혁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82호 (19.06.1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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