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악법 ‘특수범죄처벌법’ 지금도 살아있다

전현진 기자

5·16 이후 쿠데타 반대 세력 탄압 위해 1961년 입법

죄없는 죄인 만들어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12명 희생

재심 청구 89건 모두 무죄…“사문화됐지만 악용 우려”

김하종 경주유족회장(86)이 서울교도소(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건 1961년 5·16쿠데타 직후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빨갱이’로 몰려 붙잡혔다. 쌍둥이 동생 김하택씨와 다른 지역에서 유족회 활동을 하던 관계자들도 체포됐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강기철 대표, 진보정당인 사회대중당 김달호 중앙집행위원 등 4·19혁명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던 사회단체나 정당 관계자들도 수감됐다. 이들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특수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붙들려 왔다.

특수범죄처벌법은 1961년 6월22일 만들어졌다. 박정희는 이 법과 함께 부정축재처리법,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으로 쿠데타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쿠데타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공포한 날부터 3년6개월 이전까지 소급해 적용할 수 있다는 부칙을 둔 특수범죄처벌법은 쿠데타 이전 여러 일들을 실제로 처벌했다. 김 회장은 소급 적용 부칙 때문에 수감됐다. 친·인척들이 무고하게 학살당한 억울함을 풀고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벌인 유족회 활동이 죄가 된 것이다.

당시 이른바 ‘혁명재판’ 기록을 담은 <한국혁명재판사>에 따르면, 특수범죄처벌법으로 재판이 이뤄진 건 106건 328명이다. “정당·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로서 반국가단체(북한)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찬양·고무·동조”한 자를 처벌하는 ‘6조 특수반국가행위’는 4·19혁명 이후 늘어난 각종 사회단체들을 탄압하는 데 활용됐다. 특수반국가행위로 재판을 받은 건 52건 190명으로 특수범죄처벌법 조항 중 가장 많다. 이 중 무기징역(3명), 사형(5명), 징역 3~15년의 유기징역(124명) 등 132명이 처벌을 받았다. 특수범죄처벌법에 따라 목숨을 잃은 이들은 모두 12명이다.

훗날 재심을 청구한 이 법의 피해자들은 모두 무죄를 받았다. 금태섭 의원(더불어민주당)을 통해 확인한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특수범죄처벌법으로 처벌받은 이들이 재심을 청구한 89건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이 ‘박정희법’은 아직도 폐기되지 않은 채 살아남아 있다. 특수범죄처벌법은 지난해 10월 폐지 법률안이 상정됐지만 아직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김 회장은 “3년6개월 이전의 행위까지 처벌하는 말도 안되는 법이었다. 어서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아직도 특수범죄처벌법으로 체포·수감된 당시를 떠올리면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김 회장처럼 특수범죄처벌법으로 수감됐다 사형당한 이가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었다. 조 사장은 당시 33세로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18일 구속됐다. 당시 혁명검찰부의 ‘공소제기자 일람표’에도 일련번호 1번으로 가장 위에 이름을 올렸다.

김 회장은 조 사장을 또렷이 기억했다. 조 사장이 구형을 받고 오더니 “나 뭐 받았게?”라며 농담을 던졌지만 표정은 무거웠다고 김 회장은 기억했다. 김 회장은 “조 사장이 ‘33세만 넘기면 오래 살겠다고 했는데 힘들 것 같다. 쉽지 않겠다’고 한탄했다”고 말했다. 조 사장 공소장에도 특수범죄처벌법 위반 혐의가 적시됐다. 그가 민족일보 관계자들과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 사장의 동생인 조용준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85)도 지난 3일 경향신문과 만나 “특수범죄처벌법은 빨리 폐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법이 불러온 비극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황혼기가 되니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아직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꿈 한번 가져보지 못했다. 형의 죽음으로 온 가족이 멸망한 것이다. 평범한 삶은 모두 좌절됐다”고 말했다.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민족일보를 와해시킨 것은 정치적인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 이사장은 “민족일보가 당시 4·19혁명 이후 사분오열된 혁신계열을 통합하고 대변할 수 있는 매체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뒤로 진상규명 활동을 했지만, 국가가 나서서 사과를 하거나 도와준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반대 세력이 될 수 있는 민족일보의 싹을 밟아버린 것인데, 왜 민족일보가 당시에 타깃이 되었는지, 누가 민족일보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는지 밝혀져야 할 일들이 많다”고 했다.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폐지 법률안’은 지난해 10월 김종회 의원(민주평화당)이 대표발의했다. 3월 상임위에 상정된 뒤 계류 중이다. 금태섭 의원은 “수많은 사람들을 반민족적 부정행위자로 몰아 사형, 징역으로 처벌했던 특수범죄처벌법이 아직 살아 있다”며 “피해자 명예회복과 그들이 고통받던 긴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의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특수범죄처벌법이 실효성을 상실했지만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 인권침해에 활용된 이 법을 폐지해 아직도 많은 이들이 국가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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