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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맞서 역적 오명… ‘충신’ 이징옥 재평가

입력 : 2019-05-11 03:04:00 수정 : 2019-05-10 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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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들녘/1만4800원

물망/강호원/들녘/1만4800원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걸쳐 조선의 북방을 지켰던 무장 이징옥을 소설로 만난다.

조선조 북방 개척사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동시대 인물로 이징옥과 김종서가 있지만, 이징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징옥의 난’이라는 말로 단순하게 전해진다. 이징옥의 난이란 단종조 계유정난 당시 혼란한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 세력을 등에 업고 대금황제를 칭하며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도모했다는 것.

세계일보 논설위원인 작가 강호원은 이징옥의 거병을 역모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징옥은 역심으로 군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신들을 피살하고 단종을 사실상 구금 상태에 두며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반기를 들고 종사를 정상화하기 위해 분연히 의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는 것이다.

이징옥을 애민정치를 펼쳤던 참 수령이자 왕의 두터운 신임을 입었던 충신이라 평가하고 있는 세종실록이 그 증거라는 것.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패자인 이징옥은 역신이 되어 역사에서 언급되어서는 아니 될 인물로 남았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잊힌 충신들을 재평가하고, 은폐된 역사를 드러내고자 문학적으로 이징옥을 그린다.

조선 전기 무신 이징옥은 세종 때 북방 6진 개척에 공을 세운 용장으로 김종서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를 지냈다.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에 따르면 단종 때인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사실상 왕권을 잡고 이징옥을 불러올리자, 서울로 오던 그는 정변을 눈치채고 돌아가 자신의 자리에 임명된 박호문을 죽였다. 이징옥은 군사를 일으켜 수양대군에 맞서려 했지만 결국 수하 장수들의 계책에 넘어가 살해됐다. 결국 거병은 난으로, 이징옥은 역적으로 기록됐다.

작가는 조선 전기 북방 역사의 한 축이었던 여진족에 대한 평가도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수양대군은 보복 차원에서 친이징옥 성향 ‘올량합 여진족’을 숙청했는데, 이 때문에 조선 건국부터 우호적이었던 여진족과 관계가 악화한다. 올량합 독음을 변형한 ‘오랑캐’는 여전히 북방 민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작가는 후기를 통해 “이징옥과 그와 관련된 역사를 되새기는 일은 결국 잊힌 우리 북방 역사를 회복하는 일”이라면서 “북방 역사를 회복하는 길만이 식민사관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저서로 ‘중국에서 대박난 한국 상인들’, ‘베이징 특파원 중국경제를 말하다’(공저)가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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