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노동현실 고발, 지금도 유효하다”

홍진수 기자

1일 극장서 29년 만에 정식 개봉, 노동영화 ‘파업전야’

1988년 노조결성 갈등 다뤄…‘게릴라 상영’에도 관객 30만명

투박한 16㎜ 화질이지만 당시 제작진이 담았던 진심 ‘그대로’

영화 <파업전야>의 마지막 장면. 각성한 주인공 한수(오른쪽)는 동료들과 함께 기계를 멈추고 뛰어나간다. 명필름 제공

영화 <파업전야>의 마지막 장면. 각성한 주인공 한수(오른쪽)는 동료들과 함께 기계를 멈추고 뛰어나간다. 명필름 제공

정확하게 29년 전에 나온 영화다. 내용도 화질도 투박하고 거칠다. 현재의 ‘젠더 감수성’으로 보면 실소가 나오는 대사도 있다. 그러나 제작진이 영화에 담았던 진심은 그대로다.

정부의 탄압을 피한 ‘게릴라 상영’만으로도 전국 관객 30만명을 모은 노동영화 <파업전야>가 5월1일(노동절) 극장에 걸린다. 1990년 영화가 선보인 지 29년 만에 처음으로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

<파업전야>는 1988년 결성된 영화운동단체 ‘장산곶매’가 만든 작품이다. 이용배 계원예술대 교수와 이은 명필름 대표가 제작을 맡았고 이은기·이재구·장동홍·장윤현 감독이 공동 연출했다. 시나리오 역시 공수창·김은채·민경철씨가 함께 썼다. 장산곶매는 <파업전야> 전에도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첫 장편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1988)를 내놓아 노태우 정권을 당황케 한 전력이 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1988년을 배경으로 노조 결성을 시도하는 금속공장 노동자들이 나오고, 이를 회유와 폭력으로 막으려는 회사 측 간부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노동자 한수는 ‘열심히 일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노조 결성에 회의적이다. 같은 공장 후배가 ‘위장취업자’임을 회사에 고자질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새 ‘구사대’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워지고, 해고된 동료들이 용역 깡패들에게 잔인하게 끌려나가자 마음을 바꿔 먹는다. 영화는 한수가 다른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기계의 스위치를 끈 뒤 몽키스패너를 들고 뛰어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1990년 3월 <파업전야>가 공개되자마자 정부는 상영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서울 혜화동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상영한 지 이틀 만에 필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집행됐다. 다른 상영장에도 공권력이 투입됐고, 관람객들은 연행됐다. 당시 장산곶매 대표였던 이용배 교수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잠수’를 탔다.

정부는 <파업전야> 상영에 ‘국가보안법’까지 적용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파업전야> 제작진은 ‘영화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영화 제작 신고 조항과 심의(사전검열) 조항 위반이 전부였다. 장산곶매는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6년 만인 1996년 10월4일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 사전심의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지난 15일 서울 용산CGV에서 <파업전야> 언론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작진이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동홍 감독(책임연출), 이용배 계원예술대 교수(제작), 공수창 감독(시나리오), 김동범씨(주연). 명필름 제공

지난 15일 서울 용산CGV에서 <파업전야> 언론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작진이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동홍 감독(책임연출), 이용배 계원예술대 교수(제작), 공수창 감독(시나리오), 김동범씨(주연). 명필름 제공

지난 15일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언론시사회 겸 기자간담회 자리에는 30년 전 위험을 무릅쓰고 영화를 만들었던 주역들이 모였다.

이은 명필름 대표가 사회를 맡은 가운데 이용배 교수와 장동홍 감독,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 감독, 한수 역을 맡은 주연배우 김동범씨가 무대에 자리했다. 한수의 친구 재만 역을 맡은 신종태씨, 한수의 여자친구 미자를 연기한 최경희씨도 객석에서 이들을 지켜봤다.

이용배 교수는 “극장에서 제대로 된 크기로 보니까 엔딩(마지막 장면)의 감동 등이 확실하게 와닿는다”며 “젊은 세대들도 극장에서 이런 감흥을 함께하는 의미있는 시간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장동홍 감독은 “이 영화는 한 명의 미각성 노동자가 각성을 하는 데까지만 그린 간단한 영화”라며 “왜 이런 영화를 (당시 정권이) 헬기까지 띄워가며 못 보게 했을까.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참 야만의 시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핍박받고 했던 것의 본질이 지금 달라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동범씨는 이날 시사회에 딸들과 함께 참석했다. 교육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최근 다시 배우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정식으로 봤는데 너무 재밌었다”며 “제가 나와서가 아니라, 볼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고 선배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파업전야>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이야기와 대사는 직선적이고, 배우들의 연기도 어색하다. 여성 동료를 놓고 오가는 남성 노동자들의 대화는 듣기 민망할 정도다. 그러나 ‘시대 보정’을 하면 훌륭한 영화다. 여성 노동자를 그리는 방식도 안이하지 않다. 한수를 비롯한 남성 노동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여성 노동자들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움직인다. 노조를 결성하려는 금속공장 노동자들이 자문을 구하는 대상 역시 인근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과 2014년 한국영화 100선에 이 작품을 선정했다. 당시 16㎜ 필름으로 찍은 이 작품은 4K 디지털 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극장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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