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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내몰린 르노삼성-로그·XM3 수출 못 하면 내수공장 전락

  • 배준희 기자
  • 입력 : 2019.04.29 07:25:01
르노삼성자동차 노사의 극한 대립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역대 최장 기간 파업으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자 최근 일본 닛산은 르노삼성에 위탁했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로그’의 생산 물량을 대폭 줄였다. 급기야 회사 측은 4월 말부터 닷새간 부산공장 가동을 일시 중단하기로 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노조 파업 참여율은 떨어지고 있지만 한쪽의 급격한 태세 전환이 없는 한 타결은 쉽지 않다는 전망이다.

프랑스 르노그룹이 르노삼성을 ‘아프리카·중동·인도·태평양’ 지역본부로 이동시키면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사진은 최근 계속된 부분파업으로 멈춰 선 르노삼성 부산공장의 한 생산라인.

프랑스 르노그룹이 르노삼성을 ‘아프리카·중동·인도·태평양’ 지역본부로 이동시키면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사진은 최근 계속된 부분파업으로 멈춰 선 르노삼성 부산공장의 한 생산라인.

▶매출 손실만 2400억원

▷로그 물량 결국 日규슈로

르노삼성에 따르면 이 회사 노조는 지난해 10월부터 현재까지 58차례 234시간의 부분파업을 벌였고, 이로 인한 매출 손실만 2400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노사 간 임금·단체협약 미타결이다. 노조는 크게 기본급 10만667원 인상, 격려금 300만원+250%, 단일호봉제도 도입, 임금피크제 개선, 중식시간 연장(45분 → 60분)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사 측은 기본급 유지 보상금 100만원, 생산성 격려금(PI) 350%, 이익배분제(PS) 선지급 300만원, 성과 격려금 300만원 등 최대 1400만원의 일시 지급금으로 보상하는 안을 제안했지만 노조는 이를 거부했다.

이 중 기본급 인상에 대해서는 사 측이 일시 보상금 형식으로 인상 요구분 이상을 지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사실상 합의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조는 또 다른 요구사항을 들고나와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계속되는 파업에 주문량을 맞추지 못하자 일본 닛산은 르노삼성에 위탁했던 SUV 로그 물량 가운데 2만4000대를 일본 규슈공장으로 돌렸다. 닛산 로그는 지난해 르노삼성 부산공장 전체 생산량(21만여대)의 절반을 차지하는 모델이다. 르노삼성이 생산 물량을 유지하려면 로그 위탁생산 계약을 연장하거나 르노그룹 본사로부터 새로운 후속 물량을 배정받아야 했지만 파업 장기화로 납품기일을 맞추지 못하자 닛산은 물량을 빼기 시작했다. 오는 9월부터는 로그 위탁생산 계약이 아예 끝난다.

2014년 르노삼성이 낮은 인건비를 앞세워 규슈공장을 제치고 닛산 로그 생산 물량을 차지했던 것에 비춰보면 작금의 상황은 르노삼성에 뼈아픈 대목이다.

더 큰 문제는 현 상황에서 르노삼성의 현실적 구원책인 XM3의 유럽 수출량마저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크로스오버 SUV 신차인 XM3는 4월 25일부터 부산공장에서 시험 생산에 들어간다. 연 4만~4만5000대가량인 내수 물량은 이르면 내년부터 생산하기로 결론 났다.

그러나 르노 본사는 파업을 매듭짓지 못할 경우 연 8만대에 이르는 XM3 유럽 수출 물량을 부산공장이 아닌 스페인 바야돌리드 공장으로 넘기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XM3 수출마저 무산되면 르노삼성은 기존 세단 SM5·6·7과 SUV QM3·6가 지금 같은 판매량을 유지해도 전체 생산량이 약 14만대에 불과하다. 이 경우 수출기업이 아니라 사실상 조그마한 ‘내수기업’으로 전락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위탁생산 체제의 핵심 경쟁력은 고정비, 특히 인건비다. 생산성에서 경쟁 공장보다 우위에 있어야 후속 물량 배정에 유리하다. 기본급이 올라가면 고정비 부담이 커져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르노삼성 실적은 곤두박질쳤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르노삼성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3541억원으로 1년 전보다 17% 떨어졌다. 이 기간 매출은 5조5989억원으로 17%(1조1105억원) 줄었다.

상황이 이렇자 르노삼성 경영진은 4월 29~30일, 5월 2~3일 공장 단체 휴가 방침을 결정했다. 회사가 법정 연차 외에 복지 차원에서 제공했던 ‘프리미엄 휴가’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공장 문을 일시적으로 닫는 것이다. 여기에 ‘근로자의 날(5월 1일)’을 자연스럽게 비가동 일정에 포함해 가동 중단 기간은 총 5일이다.

▶인력 구조조정 불가피

▷파업동력 약화 조짐

문제는 꼬일 대로 꼬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외주화와 전환배치, 노동 강도를 놓고 사 측은 이를 ‘협의’ 사안으로 보고 있지만 노조는 ‘노사 합의’로 해야 한다고 여전히 벼랑 끝 대치 전략을 펴고 있다.

전환배치란 근로자의 작업을 덜 팔리는 A차량에서 더 잘 팔리는 B차량으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이를 노조에 양해를 구하는 수준의 ‘협의’가 아니라 반드시 동의를 거쳐야 하는 ‘합의’로 바꾸자는 것이 노조 요구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 중 이런 협약이 있는 곳은 한국의 현대·기아차와 쌍용차가 유일하다. 도미닉 시뇨라 르노삼성차 사장은 최근 부산시청에서 오거돈 부산시장과 비공개로 만나 “르노삼성차는 한국 시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기업으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한국 시장에서 투자를 이어갈 것”이라면서도 단체협약의 외주 분사와 전환배치 규정을 노사 간 협의에서 합의로 바꾸자는 노조 요구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거듭 확인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부산공장이 수출용 XM3 유치에 실패하고 예정대로 오는 9월 말 로그 위탁생산이 종료될 경우다.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생산절벽’이 본격화한다. 르노 본사는 늦어도 올 상반기 중 XM3 생산기지를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완성차 업계는 결국 르노삼성에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사 측은 이미 생산절벽을 가정한 인력운용 방안을 세워뒀다. 르노삼성에 따르면 생산절벽이 현실화할 경우 현재 2교대제로 운용하는 부산공장 근로체계를 1교대로 전환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1교대로 바뀌면 남는 인력을 재배치하거나 희망퇴직 등을 통해 줄여야 한다.

단, 최근 들어 노조의 파업 동력이 약화하는 징후는 뚜렷하다. 르노삼성에 따르면 지난 4월 15일 노조가 단행한 집회 파업의 노조원 참석률은 54%가량으로 집계됐다. 노조 집행부가 이날 주야 4시간씩 부분파업 결정과 함께 투쟁 파업 지침을 내렸지만 노조원 40% 이상이 공장에 남아 일부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다수 노조원이 파업에 참가했지만 파업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용 불안을 느낀 일부 노조원의 이탈 현상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노사가 임단협 교섭을 극적으로 타결하더라도 향후 전망은 밝지 않다. 길어지는 노사 간 줄다리기에 지친 프랑스 르노그룹 본사가 중장기적으로 GM처럼 한국 시장에서 발을 빼는 수순을 밟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미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전환기의 한복판에 들어섰다는 진단이다. 친환경, 자율주행, 차량 공유 등 새로운 조류 앞에서 GM 등 굴지의 글로벌 업체들은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 한국 자동차 생산은 10대 생산국 중 유일하게 3년 연속 감소를 기록하며 멕시코에마저 뒤져 7위로 떨어졌다. 세계 자동차 생산량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1%로 역시 전년 대비 0.1%포인트 줄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경우 공장이 철수되거나 2교대에서 1교대로 축소되는 상황까지 올 수 있다”며 “과거 GM의 호주 철수 상황 등을 생각해볼 때, 노사 대치가 결국은 치킨게임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냉철하게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5호 (2019.04.24~2019.04.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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