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고난과 자기극복의 길 위에서 천천히 함께 즐기는 밥상에 눈떴다

이민영 | 인류학자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찾은 스페인 코스요리의 즐거움

스페인 북서부의 소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엔 배낭에 조개껍데기를 매달고 한 달씩 걷고 또 걷는 순례자들이 흔하다. 유럽의 역사와 기독교 문화가 응축된 이 길에서 스페인의 다채로운 음식문화까지 만나보면 어떨까.

스페인 북서부의 소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엔 배낭에 조개껍데기를 매달고 한 달씩 걷고 또 걷는 순례자들이 흔하다. 유럽의 역사와 기독교 문화가 응축된 이 길에서 스페인의 다채로운 음식문화까지 만나보면 어떨까.

전 세계서 온 순례자들과 수다 떨며
와인과 코스 요리를 즐기다보니
빨리 먹어치우는 식사 낯설어져
더 다양하고 풍성한 체험하도록
우리 관광문화도 바뀌면 어떨까

tvN에서 방영 중인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 덕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더욱 유명해졌다. 대략 10년 전부터 많은 개별 여행자들이 찾고 그만큼 많은 여행기와 에세이가 나온 곳이지만, 사실 수십 권의 책들이 이야기했던 내용은 비슷했다. 힘들었던 과거와 작별하고,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800㎞ 완주에 성공했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스페인 하숙>은 자기극복과 성취의 이야기보다는 요리와 숙박에 초점을 맞춰 공감을 얻고 있다. 꼭 힘들게 자신을 이겨내지 않아도 꼭 인생을 바꾸지 않아도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순례길을 걸을 수 있다는 시각이 최근의 여행문화와 결이 맞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나도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꺼내지 않았던 나만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2008년 9월에서 11월, 한국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막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에 그곳을 걸었다. 당시에는 관련 책이 많이 나와 있지 않았던 터라, 아는 출판사 편집장님이 책을 쓰자고 했다. 하지만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너무 맛있었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였다. 왜 내 발은 남들 발에 다 잡힌다는 물집 한 번 생기지 않는 곰발이었던 걸까. 왜 내 위장은 남들처럼 느끼한 유럽 음식에 저항하지 않고 하몬이며 초리소며 올리브를 넙죽넙죽 잘도 소화해댔던 걸까. 음식이 너무 맛있어 매일 점심과 저녁을 모두 코스 요리로 먹고, 매일 와인을 한두 병씩 마시며 와인 맛을 알게 되었으며, 화살표만 따라가다 보니 아무 사건사고 없이 즐거웠다고 하니까 편집장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쯧, 책이 안 되겠네.”

묵직한 무용담도 없고, 책도 내지 못했고, 걷다 보면 살이 좀 빠질까 기대하고 갔던 여행에서 살만 쪄서 돌아왔으니 실패한 여행일까? 그러나 10여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 여정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행이었다. 두 달간 온몸으로 체득한 스페인식 음식문화 때문이다.

스페인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질 좋은 하몬과 올리브.

스페인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질 좋은 하몬과 올리브.

사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야겠다고 갑자기 마음먹은 것도 음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우연히 미용실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 파마를 하러 왔다는 분을 만났을 때였다.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함께 걸었던 남편과 사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길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등 많은 이야기에 감동도 많이 받았지만, 가장 흥미롭고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하몬 콘 멜론(jamon con melon)이라는 음식이었다. 세상에, 소금에 절이고 천장에 매달아 건조시켜 만든 돼지 뒷다리 생햄에 멜론을 싸먹는다니, 어떤 맛이 날까?

얼마 후 비행기 표를 사서 순례길에 오른 나는 하몬에 집착했다. 매일매일 하몬을 샀고, 빵과 함께 주머니에 넣고 순례길을 걷다가 간식으로 씹어먹곤 했다. 물론 와인도 곁들였다. 그러면서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장면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주인공이 와인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 며칠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사막을 걷다가, ‘타는 목마름’이 느껴질 무렵 비로소 와인을 마시며 그 깊은 맛을 음미하는 장면이다. 하루 종일 순례길을 걷다가 목마름과 배고픔이 느껴질 무렵 하몬을 먹고 와인을 마시다 보면,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처럼 “오오~” 감탄을 연발하게 됐다. 그 맛이 영혼까지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스페인식 코스 요리를 상당히 즐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순례길 초반에서 중반까지 함께 걸은 미겔이라는 아저씨의 공이 크다. 한 한국인 청년이 기막히게 요리를 잘하는 스페인 아저씨가 있다며 꼭 한 번 그의 요리를 먹어보라고 소개해줬는데, 맙소사! 그 전날 아무 말도 없이 내 등을 밟고 이층침대로 올라가 코를 골면서 자던, 너무나 무례하고 제멋대로였던 그 아저씨 아닌가! 너무 재수 없어서 아는 척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도 되지 않아 결국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네고야 말았다. 그의 요리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매일 밤낮으로 다국적 친구들과 벌이는 만찬과 오찬의 연속이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매일 밤낮으로 다국적 친구들과 벌이는 만찬과 오찬의 연속이기도 했다.

그날 밤 그는 알베르게의 식당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대구 요리를 포함한 몇 가지 요리를 해주었고 이후 거의 2주간 나의 전속 저녁 요리사가 되어주었다. 미겔은 남자들끼리 요리를 하며 어울리는 바스크 지방의 전통 속에서 자랐고, 자신의 요리가 최고라고 주장했다.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그는 매일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중 몇 명을 모았다. 즐겁게 요리를 해서 풀코스로 먹인 뒤에는 n분의 1로 ‘칼같이’ 정산했다. 그는 저녁을 거하게 먹는 대신 점심은 샌드위치와 맥주로 가볍게 먹었다. 나는 함께 점심을 먹자는 그의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항상 ‘menu del dia(오늘의 메뉴)’를 먹었다. 미겔은 내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놀리곤 했다. “샌드위치나 오믈렛 따위는 먹지 않고, 정찬 코스만 좋아하는 메뉴 인간 같으니라고!”

그의 놀림을 받던 어느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이 몰려왔다. 경상도에서 평생 살아온 엄마가 식탁 앞에서 항상 했던 말이 “빨리 먹어치워라”였다는 것을. 어느새 나는 그 ‘먹어치우는’ 문화에서 멀어져, 천천히 식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몸이라는 것을. 인간은 낯선 문화를 겪어보아야 자신에게 당연하게 배어 있는 문화를 낯설게 보게 되는 법이다.

스페인에서 매일 전채와 메인과 후식의 최소 3코스 요리를 와인과 곁들여 먹고,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수다를 떨며 점심, 저녁 각각 한두 시간씩 먹다 보니, ‘먹어치우는’ 우리의 식사문화를 낯설게 보게 된 것이었다. 우리의 여행문화는 ‘먹어치우는’ 음식문화, ‘빨리 걸어치우는’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당시 나는 대형여행사의 해외여행전문인솔자로 일하고 있었다. 스페인 상품 인솔 중 현지 가이드가 천천히 식사하시라고 몇 번이나 강조해도 10~2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런 식사문화는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한국인이 갖게 된 빨리빨리 문화의 산물이 아닐까.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더 빨리 더 많은 곳들을 둘러보는 한국의 여행문화도 그래서가 아닐까.

3코스 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스페인 식당의 흔한 메뉴판. 1만원 남짓이면 3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다.

3코스 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스페인 식당의 흔한 메뉴판. 1만원 남짓이면 3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음식과 여행, 우리의 문화에 대해 생각하던 중 나는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방학이면 1~2회씩 유럽 단체배낭여행팀을 인솔하면서 특히 음식여행을 파고들었다. 유행을 좇아 음식여행을 했고, 음식여행을 인솔했으며, 소비자, 미디어, 여행사들이 음식여행을 어떻게 의식하는지를 관찰했다. 영국과 체코에서는 오래된 펍과 양조장들을 찾아다녔고, 프랑스 최고 장인이 만든 빵과 과자와 초콜릿을 찾아 사먹었다.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카페들을 훑었고, 미쉐린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1~3스타 레스토랑과 월드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평생 레스토랑에서 일해온 듯 연륜이 묻어나는, 정장 차림 신사의 서비스를 받았다. 혼자서 무려 3~4시간 동안 코스마다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맞춰 마시며 고급 서비스가 무엇인지도 체험했다. “또 미쉐린 갔니? 무슨 미쉐린을 동네 분식집 가듯 그렇게 막 가?”라는 선배들의 핀잔을 듣다가 ‘미슐랭’이라는 닉네임도 얻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형여행사에서는 좌절했던 인솔자로서의 욕망,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를 연구하는 여행인류학자로서의 의문이 솟아올랐다. 평생 아시아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평소에 ‘먹어치우는’ 투쟁적인 식사에만 익숙해졌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유럽적인 문화의 정수가 담겨 있는 미식 체험을 여행 중에 한 번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제 귀족이 아니어도 이런 최고의 식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 시대의 사람이라면 이런 호사를 한 번쯤 누려봐도 되지 않을까? 음식과 식사를 최상급으로 끌어올린 글로벌 예술과 최고의 서비스를 체험해본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국의 음식문화, 예술문화가 더 풍성해지고, 서비스산업이 더 글로벌하게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먹어치우고’ ‘보아치우는’ 여행이 아니라, 음식을 포함해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체험을 하는 여행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가 더욱 열린 사회, 더욱 재미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쓴다.

▶필자 이민영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①고난과 자기극복의 길 위에서 천천히 함께 즐기는 밥상에 눈떴다

덕업일치를 꿈꾸는 관광인류학자. KBS 여행 전문 팟캐스트 <여행상상> 진행자. 여행작가·해외여행인솔자로 70여개국을 다니며 미식,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요가, 순례 등 다양한 테마여행을 탐구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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