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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정한 리더십인가? 조선 27명의 왕에게서 리더십을 배우다

입력 : 
2019-04-17 16: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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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조선에서 왕은 온전히 권력을 향유하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왕은 수많은 의무를 다해야 하는 존재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군주의 길을 걸어야 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했으며 천재지변도 책임져야 함과 동시에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민정을 살펴야 했다. 500년을 지속한 조선의 왕들을 들여다보는 것, 이는 단순한 고전과 역사의 해석이 아닌 ‘진정한 리더십’을 찾기 위한 시작이다.

조선 왕조는 27명의 왕이 재위했다. 조선의 왕들은 시대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달랐고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즉위했지만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신하들과 학자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국가를 합리적으로 이끌어 갈 임무를 부여받았다. 왕들은 때로는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치거나, 때로는 왕권에 맞서는 신권에 대응도 하고 조정자의 역할도 했다. 체제의 안정, 변화와 개혁의 중심에 왕의 리더십이 있었고, 왕의 리더십은 국가의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이었기에 왕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은 최고 결정권을 가진 막중한 책임을 다하는 위치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까? 왕조 시대가 끝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사회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리더십의 측면에서는 과거나 현재나 한 나라의 리더에게 요구되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처럼, 우린 역사에서 현시대의 난제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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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어진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선조 어필 (사진 공공누리), 19세기 유숙이 그린 세검정도(사진 한국중앙박물관)
▶‘술자리 정치’로 세력을 조정한 세조 성군 세종 대왕의 두 번째 왕자로 태어난 수양 대군. 그는 야심가였다. 세종의 후계자는 장남 문종. 문종은 아버지의 위대한 업적을 계승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정사에 몰두했다. 비례로 문종의 건강은 더욱 쇠약해졌다. 문종은 채 10살밖에 되지 않은 세자가 걱정이었지만 문종에게는 집현전의 충성스런 학사들과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들이 있었다.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숨졌고, 세자는 12살짜리 어린 왕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권력은 김종서에게 있었다.

수양 대군은 ‘이씨(李氏) 왕조’를 강조했다. 그는 대신들이 왕권을 대신해 신권을 행사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1453년, 수양 대군은 권람, 한명회, 홍윤성 등을 동원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수양의 최종 목표는 조선의 왕이었다. 피의 숙청은 계속되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봉해져 영월로 쫓겨났다. 사육신의 충절도 단종의 복위를 이루지 못했다.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과 동생 안평 대군을 끝내 죽이고 말았다. 그는 성군이 되겠다고 다짐한 한편, 도전받지 않는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하지만 세조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집단이 있었다. 바로 계유정란의 공신들이다. 세조는 이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조정했다.

세조 시대 독특한 점은 유난히 잦은 술자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총 974번의 ‘술자리’ 키워드 검색 중 무려 467회가 세조 시대에 집중되었다. 세조는 공신들과 자주 만나 노고를 치하하며 그들을 관리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 법. 한 번 왕을 쫓아낸 경험이 있는 이 공신들에게 두 번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과 술자리를 가졌다. 세조는 술자리에서 공신들의 속내도 살피며 그들의 ‘작은 불평불만’은 즉시 해결하는 ‘성의’를 보였다. 홍윤성과의 일화가 그렇다. 홍윤성이 비리 혐의로 탄핵을 받았다. 세조는 홍윤성을 불러 그의 말을 들어주고는 ‘벌주’를 내리며 ‘반성하라’는 말과 함께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이처럼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세조의 ‘격식파괴’는 신하들을 감동시켰다. “이렇게 같이 술잔을 주고받는 것이 어찌 군신 간의 의리에 해롭겠느냐?”며 ‘사선을 넘은 동지’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군주와 신하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 이 술자리가 생사를 가르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하루는 세조가 한명회, 신숙주와 술을 마셨다. 세조가 취기가 올라 신숙주의 팔을 세게 비틀었다. 아파하는 신숙주에게 세조는 “내 팔도 비틀어라”며 팔을 내밀었고 신숙주는 바로 팔을 비틀었다. 아팠다. 술자리가 파하고 세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숙주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세조는 내시를 불러 “신숙주가 무엇을 하는 지 보고하라”고 엄명했다. 내시가 신숙주의 집에 도착하니 불은 꺼지고 신숙주는 잠들어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세조는 안심했다. ‘신숙주가 술에 취했구나. 그러면 그렇지.’ 이는 한명회의 지혜였다. 한명회는 술자리에서 안색이 변하는 세조를 보고 하인을 불러 신숙주에게 ‘불을 끄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라’는 전갈을 한 것. 사실 신숙주는 퇴청하면 항상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공신 양정은 평안도 지역에 발령받자 불만이 많았다. 1466년 양정은 세조를 찾았다. 술자리가 벌어졌다. 신숙주, 한명회 등이 멤버였다. 세조는 양정을 위로했고 곧 새로운 벼슬을 주겠다는 약속도 넌지시 건넸다. 그러자 술기운에 ‘오버’한 양정이 그만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세조에게 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이제는 한가롭게 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세조는 곧바로 승지를 불러 옥새를 세자에게 주고 자신은 양위한다고 선언했다. 놀란 한명회, 신숙주가 눈물로 호소해 세조는 겨우 이 어명을 거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양정은 다른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아무리 공신이라도 임금의 진퇴, 즉 역린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세조에게 술자리는 격의 없는 소통, 그리고 무엇보다 군신 간의 의리를 넘어서는 동지적 관계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세조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세조는 자신과 한배를 탄 공신들을 통해 정국을 주도했고 그 공신들에게 ‘보스 리더십’을 행한 것이다.

▶내정은 낙제, 외교는 1등의 리더십 광해군

우리는 광해군에게서 현명한 군주와 폭군의 양면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무능력하면서도 질투심 많고 또한 방계에서 왕이 되었다는 열등감을 평생 안고 산 군주였다. 선조에게 광해군은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런 적통 아들이 아니었다. 선조는 자신의 후계만은 적장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조의 소생 왕자 13명은 모두 서자였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면서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했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선조는 늦둥이 적통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젖먹이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광해군은 명군이 되고 싶었고 당쟁을 탕평으로 이끌고 싶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결국 자신의 친형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폐서인으로 만들었다.

광해군의 통치, 특히 외교술은 절묘했다. 당시 명청 교체기에서 광해는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다. 명나라는 쇠약하고 여진족 누르하치는 강력했다. 누르하치는 최종 목표인 명을 공격하기 위해 배후 조선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광해군은 줄타기 외교를 감행했다. 1618년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을 제외한 모든 조정의 관리, 선비들이 이 파병을 찬성했다. 그는 강홍립을 5도 도원수로 임명했다. 강홍립은 외교적 역량, 정무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따로 강홍립을 불러 지시했다.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해 패하지 않는 전투를 하라.” 강홍립은 광해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광해는 냉철하게 힘의 현실을 인식해 후금을 자극하지 않는 전략과 능동적 실리 외교를 편 것이다.

광해군은 내치에는 실패하고 외교에는 성공한 군주였다. 그는 전후 조선의 복구라는 중차대한 책임을 떠안은 군주였지만 통치 동안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치중했다. 물론 민생 경제를 살리는 여러 가지 실효성 있는 정책도 폈고 백성의 안위를 편안케 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광해군에게는 패륜 군주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형과 아우를 죽이고 서모를 폐모한 것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광해군은 태생적으로 불행한 인간이었다. 서자 출신, 3세 때 어머니 사망, 아버지 선조의 냉대와 변덕 그리고 영창 대군의 출생 등은 그가 현명하고 대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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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정통성과 환국으로 정국을 주도한 숙종 숙종은 조선 왕조에서 7명밖에 되지 않은 적장자 상속인이다. 당당한 정통성으로 14세에 군주가 되어 신하들을 제압했다.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 왕후, 그리고 당대 최고 권문세가인 청풍 김 씨를 외가로 둔 숙종. 숙종은 사극 드라마의 단골 주연이다. 숙종과 인현 왕후, 후궁으로 경종을 낳고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은 희빈 장 씨, 영조의 생모 숙의 최 씨 등이 얽힌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래서 숙종의 이미지는 유약하고, 여색을 밝히고, 모후와 중전 그리고 후궁 사이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남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그의 왕권의 밑바닥에는 ‘환국(換局)’ 때마다 흘린 신하들의 피가 흥건했다. 숙종은 태종이나 세조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왕이었다. 그는 다혈질이었지만 냉철한 리더십의 군왕이었다고 역사는 기억한다.

어린 왕의 조정은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송시열, 윤휴, 허적 등 노련한 대신들이 각 당파를 대표했다. 숙종은 어리지만 유치하지 않았고, 다혈질이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숙종은 조선 주자학의 거두 송시열을 상대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사약을 내린 이가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확고한 왕권을 통해 백성의 삶과 조선의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조선에 뿌리 내린 사림 유학파의 세력은 강대했고 두 번의 큰 전쟁으로 민생은 나아지지 않았다. 숙종은 “조선은 국왕이 통치하지만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관리들이 한몸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또한 숙종은 제왕학을 통해 ‘권력은 오래되면 썩기 마련이라 새로운 물로 갈아주어야 한다’는 리더십과 용인술을 익혔다. 숙종은 세 번에 걸친 피의 숙청을 통해 신권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통치술을 썼다. 그의 이러한 통치에는 선대의 권력 투쟁과 정권 교체와는 다른 수단이 동원되었다.

사림파는 훈구파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그들의 권력 투쟁은 그야말로 ‘주고받는 게임의 룰’이 존재했다.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면 남인은 물러났지만 그래도 명맥을 유지했다. 숙종은 달랐다. 그는 권력 교체에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았다. 권력 투쟁에서 밀리면 관직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숙종은 왕권과 신권의 대립 구도를 단숨에 타파했다. 즉 붕당 간의 싸움을 내각 교체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그 싸움의 유일한 해결자로서 군왕의 위치를 격상시킨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구도를 완성하기까지 희생은 따랐다. 숙종은 한 당파의 손을 들어 내각을 구성하면 패자에게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각 당파는 생사 여탈권을 독점한 숙종 앞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신하들에게 권력 싸움의 대상이 아닌 심판자였던 것이다.

역사는 숙종을 폭군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숙종이 일하는 군주, 공부하는 군주였기 때문이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했고, 상평통보를 주조해 화폐 경제를 안착시켰으며, 미행과 어사 파견으로 백성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애민 정책을 폈다. 물론 폐해도 있다. 후대에 문제의 소지를 잉태한 경종의 승계, 노론에 독점적 권력을 줌으로써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폐해를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숙종의 이러한 왕권 구축과 정치 경제의 안정적 제도 개선으로 조선은 두 번의 전란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영·정조 시대의 찬란한 문화 융성과 경제적 부흥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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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규장각도(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집념의 탕평 군주 정조 1777년, 83세 영조가 죽었다. 영조는 명군이었다. 많은 업적과 안정된 치세 중에서 그의 최대 치적은 끝까지 세손을 지켜 왕위에 올린 것이다. 세손은 25세에 왕이 되었다. 노론은 숨죽이고 정국을 주시했다.

정조는 숙청 작업에 착수했다.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나뉘어 있었다. 벽파는 사도 세자는 물론 정조 즉위도 반대한 강경파. 시파는 벽파에 비해 온순한 세력이었다. 정조는 벽파의 중심이자 외가인 홍 씨 가문을 공격했다.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아들 정후겸을 귀양 보냈다.

물론 몸통은 살아 있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외할아버지 홍봉한. 정조는 고민했다. 정조는 스스로 유학자임을 내세웠고 효심도 깊었다. 정조는 정순왕후는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손자가 할머니를 벌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일가인 김귀주를 귀양 보냈다. 문제는 홍봉한이었다. 홍봉한을 죽인다는 것은 지아비를 잃고 아들마저 잃을까 전전긍긍 살아온 어머니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결국 정조는 홍봉한의 관직을 파하는 것으로 1차 숙청을 마무리했다.

정조가 노론 온건파를 받아들인 것은 효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비록 적이지만 인재는 내치지 않고 인력 풀을 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포부와 동시에 정적을 조정에 남겨 자신의 친위 세력에 경계심을 일깨우는 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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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 중 일부(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는 규장각에 인재를 대거 배치했다. 이곳 인재들은 정조의 정치적, 학문적 파트너가 되었다. 규장각 관리들은 녹봉도 많이 받았고 사헌부의 감찰 대상에서도 제외됐으며 항시 궁궐을 출입할 수 있는 특권도 부여 받았다. 또 정조는 ‘초계문신’ 제도를 활용했다.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공부를 한 뒤 시험을 보게 해 요직에 배치하는 특채 제도였다. 이처럼 정조의 학문 우대 정책과 규장각 확대로 이가환,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익, 유성원, 이덕무, 박지원 등의 신진 엘리트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 정조는 통치의 기본 원칙을 탕평으로 했다. 자신의 침전에 ‘탕탕평평실 蕩蕩平平室’ 그리고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즉 ‘모든 냇물에 골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이란 글을 걸어놓고 온 백성을 골고루 보살펴 주겠다는 군왕으로서의 의지를 표현했다. 인사에서도 당파에 치우침이 없었다. 그중 백미는 심환지를 복귀시킨 일이었다. 그는 노론의 ‘그림자 실세’였다. 그는 정조의 의견에 주저 없이 반대론을 펼쳤다. 또한 정조가 굽히지 않으면 관복을 벗고 침묵 시위를 할 정도로 왕과의 대립을 서슴지 않았다. 훗날 정조가 49세의 나이에 급서하자 시중에서는 “한 정승이 심연이라는 어의를 시켜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평소 정조에 대한 그의 비판은 가차 없었다.

지난 2009년, 정조의 비밀 편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299통으로 발신인은 정조, 수신인은 모두 심환지였다. 이 편지들은 1796~1880년 정조 재위 마지막 4년 동안 집중되었다. 내용은 정조의 인간적인 소회부터 정치적 현안까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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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生 왕으로 산다는 것』 (신병주 지음, 매경출판 펴냄)
“내가 언제 너를 예조판서 혹은 우의정에 임명할 것이니 너는 이렇게 준비하라”는 내용과 “내일 어전회의에서 이런 안건을 논의할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의견을 내라. 그러면 내가 승인할 것이다”, “어떤 안건에 대해 짐이 반대를 하더라도 적당한 시기가 되면 승인할 것이다” 등 왕이 신하에게 보낸 편지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편지들은 정조가 심환지를 정치적 파트너 즉 야당 대표로 인정하고 비밀리에 정치현안을 조율해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조의 탕평은 집념과도 같았다. 그는 무자비한 숙청 대신, 적도 끌어안고 간 배포 있는 군주였다. 정조는 술자리, 경연 자리 그리고 심환지와의 비밀 소통 등을 통해 끊임없이 탕평을 위해 노력했다. 정조는 특히 ‘적이 강해야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로 이분되는 갈등 해결이 아닌, 적도 나도 승리하는 상생의 정치를 이끈 것이다.

[글 정지윤(프리랜서) 인용 및 참조 『王生 왕으로 산다는 것』(신병주 지음, 매경출판 펴냄) 사진 매경출판 제공 일러스트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75호 (19.04.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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