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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ska in ‘인썸니아’ 얼음과 눈 그리고 6개월의 낮, 지구의 우주 같은 곳

입력 : 
2019-04-17 1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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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알 파치노,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인썸니아’는 알래스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범죄 추리극이다. 평범한 인간의 가면을 쓴 살인마 추리 소설가, 찌들고 타락한 형사, 타락한 형사를 경찰의 전설로 존경하는 경찰 초년병. 이들은 춥고, 음습하고 게다가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알래스카에서 서로의 심장에 총을 정조준한다. 흥미로운 등장인물 외에 이 영화의 주연감은 따로 있다. 바로 ‘백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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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나라 미국의 든든한 ‘지갑’ 세계 지도를 들여다보면,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대륙은 거의 붙어 있다. 수만 년 전 빙하기에 두 대륙은 얼음이든, 땅이든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인 인디언의 이주를 설명하는 중요한 ‘설’이다. 유라시아와 붙어 있는 북아메리카의 꼭대기가 바로 알래스카다. 알래스카는 캐나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시베리아와는 좁은 베링 해협이 경계다. 지금, 알래스카는 미국의 영토다. 면적은 약 172만㎢. 남한의 17배 크기로 미국의 50개 주 중 가장 크다. 반면 인구는 약 76만 명이다. 연평균 기온은 섭씨 1℃로 ‘살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지만 겨울이면 평균 영하 25℃의 강추위가 몰려오는 동토다. 대부분 지역이 1년 동안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데 알래스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알래스카산맥에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6184m의 매킨리산이 데날리국립공원에 그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알래스카 역시 원주인(원주민)이 따로 있다. 원주민인 알류트족이 불렀던 ‘Alyeshka, 섬이 아닌 땅’에서 알래스카라는 이름도 유래한 것이다. 알류트족 외에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고 소수의 러시아계 후손들이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인구 대부분이 백인이지만 에스키모 3만4000명, 알류트족 8000명과 약 2만 명 정도의 아메리카 인디언도 ‘선조의 땅’을 지키고 있다.

부자 나라 미국의 든든한 ‘지갑’이 된 알래스카는 20세기에 본격 개발되었다. 개발의 시발점은 땅에 매장되어 있는 자원이다. 석유, 석탄, 철광석, 금, 은, 구리, 아연 등은 물론이고 해양의 풍부한 어족 자원과 척박한 환경 덕분에 그대로 보존된 생태계는 그야말로 천혜의 보고다. 지구상에서 지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 바로 알래스카다.

이 황량한 얼음 덩어리를 최초로 발견한 이는 덴마크의 탐험가 비투스 요나센 베링이다. 그는 1741년 러시아 표트르 1세의 후원으로 북태평양을 항해하다가 알래스카를 찾아냈다. ‘물주 우선’이듯 알래스카는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물론 당시 어떤 나라도 얼음과 눈밖에 없는 이 땅을 욕심내지 않았다. 1784년 러시아가 모피를 얻으려 이곳에 사냥꾼을 위한 정착지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원주민 외에 유럽계 백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알래스카가 미국 땅이 된 것은 1867년이다.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가 러시아 제국과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미국에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국 언론과 정계는 수어드를 비웃었다. 이 계약 자체를 ‘바보 같은 짓’이라며 ‘수어드가 무려 720만 달러짜리, 아주 비싼 냉장고를 구입했다’는 기사까지 등장했다. 이 조롱은 딱 10년 만에 ‘수어드의 혜안, 과감한 선택’의 찬양가로 바뀌었다. 얼음뿐인 쓸모 없는 땅 알래스카에 무진장의 금과 철광석이 묻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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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이 ‘노다지’를 캐기 위해 알래스카로 몰려들었다. 당시 철광 회사가 알래스카에서 캐낸 철광석의 가치가 4000만 달러를 상회했다니 ‘투자 원금’ 회수는 물론 몇 배의 이익을 본 것이다. 이 ‘비싼 냉장고’의 값어치를 알아챈 미국은 1912년 알래스카를 ‘준주’로 정했다. 이후 과학과 채굴 기술이 발전하면서 알래스카의 몸값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금, 러시아가 얼마를 미국에게 주면 알래스카를 다시 살 수 있을까? 물론 미국이 팔지도 않겠지만 아마도 수조 억 달러를 주어도 거래는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에 ‘바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러시아의 국력과 시선은 온전히 크림 전쟁에 쏠려 있었다. 러시아도 이 알래스카의 얼음 속에 ‘뭔가’가 많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에서 영국과 전투를 벌이면서 알래스카에 인접한 영국 식민지 캐나다에서 협공해 온다면 막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영국과 대치 관계인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넘기면 ‘최소한 캐나다에서의 공격은 방어할 수 있다‘는 전략으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 것이다. 지금 알래스카는 미국에서도 ‘잘사는 주’에 속한다. 일인당 소득이 6만 달러를 상회한다. 이는 관광과 자원 개발 덕이다. 이 때문일까? 알래스카는 인구가 늘어나는 주인데, 그중에서도 청년층 유입이 가장 많은 ‘전도유망한’ 장소이다.

알래스카에서 유명한 도시는 앵커리지, 페어뱅크스, 배로 등이다. 특히 앵커리지는 알래스카 주민의 절반이 살고 있는 중심이다. 이곳 역시 사람이 사는 동네. 즉 희로애락과 범죄가 존재한다. 할리우드 역시 알래스카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알래스카가 갖고 있는 기후, 환경 때문에 영화 속 알래스카는 힐링과 자기 성찰 또는 숨 막히는 스릴러의 무대로 곧잘 등장한다.

1년 내내 얼음과 눈이 녹지 않는 곳에서의 살인은 여타 지역에서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한다. 즉 죽는 순간의 모습을, 증거를, 정황을 ‘죽은 이’가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추리극, 스릴러물에서 보물과 같은 설정이다. 죽은 이는 말한다. 그리고 죽은 이를 보는 남겨진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는 충격과 그에 따른 복수의 강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알 파치노,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인썸니아’ 역시 알래스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범죄 추리극이다. 살인마 추리 소설가, 찌들고 타락한 형사, 타락한 형사를 존경하는 경찰 초년병, 이들은 춥고, 음습하고 게다가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알래스카에서 서로의 심장에 총을 겨눈다.

흥미로운 등장인물 외에 이 영화의 주연감은 따로 있다. 바로 ‘백야(白夜, White night)’다.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무는 백야는 인간의 몸과 정신을 파괴한다. ‘자야 한다’는 의식 속에서도 ‘환한 밤’에 노출된 인간의 생체 리듬과 정신의 시곗바늘은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잠시라면 백야는 축복이자 축제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라면 고통이자 재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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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의 백야(픽사베이), 남극의 백야(픽사베이), 노르웨이 피오르의 백야(픽사베이), 노르웨이 바다에 뜬 한밤중의 태양(픽사베이), 자정을 가리키는 시각, 백야의 노르웨이(픽사베이)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맡은 ‘비리 형사’ 알래스카.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17세 여고생 케이 코넬이 외딴곳의 쓰레기장에서 전라로 죽은 채 발견된다. 범죄라고는 밤에도 해가 뜨는 백야에 지치고 우울증에 빠진 마을 사람들이 술 먹고 벌이는 다툼이 전부인 이 마을. 경찰은 수사를 시작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른다.

LA. 날마다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다. 살인, 강도, 인질, 매춘, 마약 등등. 강력반 윌 도머(알 파치노)는 노련한 형사로, 굵직한 사건을 해결한 경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비리, 조작 등의 의심 가는 상황으로 내사과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있다. 경찰은 알래스카에 도머를 파견한다. 알래스카 경찰서장이 도머의 동료다. 도머는 알래스카 행 비행기에 오르고, 그의 옆에는 후배 헵(마틴 도노반)이 동행한다. 그는 사실 도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헵 역시 내사과 조사를 받고 있는데 도머와의 의리로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다. 도머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헵을 한시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머는 헵에게 “내사과 애들의 진짜 속셈은 자넬 볶아서 날 밟으려는 거라고. 알아?”라며 슬쩍 그를 떠본다.

도머를 이곳 경찰 엘리 버(힐러리 스웽크)가 반갑게 맞는다. 그녀는 도머의 명성을 알고 있기에 그를 만난다는 사실에 들떠 있다. 엘리는 도머에게 “학교에서 당신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션 파크 저격 사건, 특히 릴랜드 사건은 대단했죠. 함께 수사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라고 인사한다. 도머는 도착하자 바로 안치실을 찾는다. 케이의 시신을 살피는 도머. 케이의 사인은 뇌일혈, 즉 맞아 죽은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범인이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인물임을 파악한다. 범인은 케이를 살해한 후 시신을 깨끗이 닦고 심지어 머리도 빗겨 주었다. 게다가 손톱, 발톱도 정리했다. 범행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려는 의도다. 도머는 엘리에게 사건을 보고받지만 현재로서는 목격자도, 용의자도 없다. 도머는 헵에게 말한다. “일단 학교 애들 탐문하지.” “도머, 지금요? 지금은 밤 11예요.”

도머는 케이의 남자 친구를 조사한다. 케이의 남자 친구는 알리바이가 없다. 경찰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도머는 케이의 남자 친구에게 “케이 코넬은 어떤 애였지? 친구나 많았나? 혼자였나?” 등의 질문을 해 보고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더구나 그에게서 “케이에게 다른 남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도머는 케이의 방을 조사한다. 그리고 케이의 소지품 중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녀의 친구에게서 결정적인 단서를 듣는다. 케이의 남자 친구를 누군가가 빼앗아 갔다는 것을. 도머는 케이의 여자 친구에게서 그 남자의 이름을 듣는다. 소설가 ‘브로도’. 케이의 방에서 발견한 책의 작가다. 브로도는 추리 소설 작가로 본명은 월터 핀치(로빈 윌리엄스)다. 도머는 핀치의 주변을 조사하며 현지 경찰이 놓친 몇 가지 단서로 용의자를 좁혀 나간다. 그리고 케이의 가방을 미끼로 용의자를 사건이 벌어진 현장으로 유인하지만 용의자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다. 도머의 의도를 알아채고 도주한다. 도머는 수사를 통해 핀치를 범인으로 단정한다. 도머와 헵은 핀치의 별장을 급습 한다.

짙은 안개가 낀 핀치의 별장. 도머와 헵은 총을 들고 핀치에게 다가가는데 핀치는 배수구에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 계곡으로 도망친다. 핀치를 쫓는 도머와 헵.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핀치를 추격한다. 도머는 가빠 오는 숨을 들이키며 핀치를 쫓는다. 핀치는 일부러 자신의 몸을 잠깐씩 드러내며 도머를 유인한다. 안개 속에서 핀치를 발견한 도머는 방아쇠를 당긴다. 쓰러지는 핀치. 하지만 핀치가 아니다. 도머의 파트너 헵이다. 헵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도머를 바라본다. 그 눈은 ‘도머, 당신 일부러 나를 쏘았지! 내가 당신의 부정을 알고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헵은 죽었다.

도머는 스스로에게 침착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목격자, 당연히 없다. 도머는 판단한다. ‘그래 어차피 잘됐어. 헵은 내사과에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릴 생각이었어. 그럼 내가 조작했던 모든 범죄들이 다 드러나겠지. 안 돼! 이건 사고야 도머, 정신 차려!’ 그리고 본능적으로 핀치가 버린 권총을 주머니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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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보다 양심의 가책이 주는 불면 도머는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는 헵을 쏜 권총의 탄환을 숙소의 마루를 뜯어 그곳에 숨긴다. 도머는 케이를 죽인 범인이 헵을 죽였다고 사건을 조작한다. 심지어 헵의 가족과 통화까지 한다. “헵이 살인범을 추적하다가 그만… 총에 맞았어”라고. 자신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본 헵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지울 수가 없다. 알래스카의 백야. 자정이 되어도 어둠은 찾아오지 않는다. 백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도머는 이제 헵을 생각하느라 더 잠들지 못한다. 벌써 며칠째다. 헝클어진 머리, 정신이 반쯤 나간 표정, 초점이 흐려진 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도머는 괴롭다.

그는 잠을 자려고 안간힘을 쓴다. 틈만 있으며 새어 들어오는 빛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고 온갖 물건을 쌓아 올린다. 시계도 감춘다. 얼굴을 감싸고 자야 한다고 말하지만 의식은 현실과 잠 사이를 교차한다. 몽롱해진다. 이제 ‘내가 일부러 헵을 쏘았는지, 정말 실수였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도머는 백야와 양심의 가책으로 점점 불면의 밤을 보낸다.

전화벨이 울린다. 핀치다. 핀치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 잠을 못 잔 목소리군. 나도 그랬어. 한 5일을 못 잔 적도 있지. 이 백야 때문에.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야 낮잠은 자지만 당신은 일하느라 못 자겠지. 그날, 안개 속에서 당신이 헵을 쏘는 것을 보았지.”

혼란에 빠진 도머에게 이윽고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린다. “도머, 당신이 헵을 쏜 것은 사고야, 내가 그 여고생을 죽인 것도 사고일 뿐이고.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진범으로 만들어야 해. 여고생을 죽이고 헵까지 죽인 범인 말이야. 도머, 이런 것은 당신 특기 아닌가? 그렇게 한다면 나도 당신이 헵을 죽인 사실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은 공범이 되었다. 그리고 도머의 불면의 밤은 계속된다. 도머는 양심과 싸우는 중이다. 핀치는 집요하게 도머에게 케이의 남자 친구가 두 사건의 진범처럼 사건을 조작하라고 재촉한다. 도머는 핀치와 만난다. 부드럽고 착하게 생긴 핀치의 내면에는 악마가 숨어 있다. 두 사람은 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핀치는 속삭인다. “우리가 지은 죄는 고의가 아니야! 그렇지 도머?” 핀치는 배를 타고 멀어지는 도머에게 녹음기를 내보인다. 핀치는 도머의 모든 이야기를 녹음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와일드 카드야! 도머.”

도머는 권총을 핀치의 별장에 숨긴다. 하지만 핀치는 추리 소설 작가. 그는 이미 도머의 행동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총을 케이의 남자 친구 집에 숨긴다. 케이의 남자 친구는 꼼짝없이 케이와 헵을 죽인 범인이 되고 말았다. 경찰서로 연행되는 케이의 남자 친구. 이를 보고 있던 도머는 거의 신경 쇠약 직전에 빠진다. 엘리는 이 사건이 뭔가 의심스럽다. 그녀는 점차 도머가 헵을 죽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머, 좋은 형사는 사건 해결을 위해 잠 못 이루고, 나쁜 형사는 죄의 무게에 잠 못 이룬다. 당신의 한 말이에요.”

LA로 떠나기로 결정한 도머는 숙소 주인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 한 소년이 죽었지. 범인을 잡았는데 물증이 없었어. 나는 딱 범인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배심원들은 물증이 없으면 믿지를 않아. 그래서 물증을 만들었지. 그 놈을 범인으로 만들었어. 모든 범죄는 사소해. 사소한 거짓말, 사소한 실수, 살인자도 사소한 단서를 남기지. 인간의 속성이랄까.”

“나는 잘 모르지만, 그때 당신은 자신이 옳다고 믿었어요. 물론 그게 평생 짐이 되겠지만.”

도머는 정신을 차린다. 그는 경찰 배지와 권총을 챙겨 핀치의 집으로 향한다. 운전대를 잡은 도머. 차는 갈팡질팡한다. 그 순간, 도머는 엘리가 핀치의 집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엘리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도머는 차의 속도를 올린다. 핀치와 마주한 도머. 도머는 핀치에게 총을 쏘고, 핀치 역시 도머에게 총을 쏜다. 쓰러지는 두 사람. 핀치는 도머가 쏜 총에 죽었다. 도머는 엘리를 쳐다본다. 그는 엘리가 자신을 범인으로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는 고민한다. 존경하던 도머를 헬을 죽인 범인이라고 밝혀야 하는지, 아니면 두 사건의 범인이 핀치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는 엘리는 바라보던 도머는 천천히 말을 꺼낸다.

“엘리, 느낌을 믿고 그 느낌대로 해. 그리고 신념을 지켜. 이제야 잠이 좀 올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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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우주 같은 곳 알 파치노가 분한 도머 형사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수로 파트너를 죽인 것에 대한 자책과 불안 그리고 알래스카의 ‘백야’ 때문이다. 백야는 위도 65° 이상의 북반구에서 한여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 즉 자정에도 낮이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백야는 북극권과 남극권에서 각기 하지와 동지 무렵에 시작되어 약 6개월간 지속된다. 북반구에서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시베리아, 알래스카 등에서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물론 반대 현상도 있다. 즉 ‘극야’는 겨울에 태양이 지평선 위로 올라오지 않아 한낮에도 마치 밤처럼 어둡다. 사실 그 어떤 것이든 인간에게는 최악의 조건이다. 인간은 무조건 자야 한다. 개인에 따라 4시간을 자도 거뜬한 사람이 있고, 8시간 넘게 자도 낮에 졸음이 몰려오는 사람이 있지만 정상적인 신체 리듬의 인간은 하루 24시간 중 일정 시간 잠을 자야 한다. 잠을 자는 것은 ‘꿈을 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는 동안 인간의 뇌, 장기, 세포는 하루 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내일을 위한 정비를 한다. 성장 세포는 물론이고 인간에게 필요한 각종 호르몬이 이때 분비되는 것이다.

해병대 훈련 캠프에는 잠을 자지 않는 훈련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건장하다고 자부하는 젊은이들이 자원해 몰린 훈련소에서도 이 훈련은 ‘극한’에 속한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의 눈꺼풀’이라는 말처럼 잠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항이다. 잠을 자기 위한 조건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험한 환경을 거치면서 DNA 속에 이 조건을 최적화 시켰다. 어두워야 한다. 잠깐의 달콤한 낮잠과는 다르다. 그리고 조용해야 하고, 따뜻해야 한다. 어두워야 하는 것은 필수 조건이다.

주변에 백야를 경험하기 위해 알래스카나 북유럽을 여행한 이들에게 들어보면 첫날은 신기함, 둘째 날은 다채로움의 경험을 느낀다. 그러나 사흘 째면 ‘밤이 그리워진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 몽롱한 상태를 넘어 자신의 판단과 생각 그리고 의식마저도 확신하지 못한다. 며칠을 자지 못하자 ‘내가 헵을 실수로 죽인 것인지, 아니면 실수를 가장한 의식적 행동’인지를 의심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알 파치노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익숙해지고, 적응해 나가는 것이 인간이 수만 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이다. 일테면 백야의 도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데나강변을 거닐며 사색과 창작에 몰두했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낮 같은 밤 속에서도 위대한 작품들을 후대에 남겼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밤이 낮이 되고, 밤이 없는 세상 속에서 인간의 인지 능력은 퇴화된다는 것이다. 분명 밤에 눈을 뜨고 있지만 그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자연이 만든 밝음’에서 어쩌면 인간의 의식은 멀어지는 것이다.

알래스카는 한 계절 그리고 6개월의 낮이 지속되는 지구의 우주 같은 곳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이성이 감성과 본능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영화는 그 질문을 한다. 돌아올 티켓이 있다면 몰라도 ‘알래스카 행 원 웨이 티켓’, 막상 손에 들어와도 망설여질 것 같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포토파크, Daum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75호 (19.04.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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