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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놀고 즐기고 다 집에서~”

  • 노승욱, 나건웅 기자
  • 입력 : 2019.04.12 08:47:35
  • 최종수정 : 2019.04.12 09:15:35
30대 직장인 김재욱 씨(가명)는 최근 주말에 연차를 더해 얻은 4일 연휴를 한 번도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만 보냈다. 식사는 HMR(가정간편식)과 배달음식으로 간단히 때웠고, 레토르트 음식이 지겨워지면 식재료를 주문해 직접 ‘홈쿡(home-cook)’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56인치 대형 TV로 ‘킹덤’ 등 넷플릭스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데 썼다. 드라마가 지루해지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켜고 짤막한 동영상들을 봤다. 몸이 찌뿌둥하다 싶으면 벤치 프레스를 하고 요가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홈트레이닝’을 했다.

김 씨는 “요즘은 친구들도 결혼하고 각자 바쁘다 보니 시간이 나도 예전처럼 자주 보기 힘들다. 해외여행도 몇 번 나가 보니 식상하고 돈도 많이 드는 데다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지치더라. 이제는 집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혼자 즐기는 것이 최고의 힐링이다. 올여름 휴가 때도 아무 계획을 세우지 않고 집에서만 조용히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홈퍼니싱·홈카페·홈요가·홈쿡·홈캉스·홈트레이닝….

바야흐로 ‘홈족(잠깐용어 참조)’ 전성시대다. 1인 가구 증가, 온라인 쇼핑, 유튜브 등 1인 홈미디어 시장 성장 등에 힘입어 모든 것을 집 안에서 해결하는 홈족이 대중화됐다. 스마트폰과 인터넷만 있으면 뭐든지 집까지 배달해주는 데다 타인과의 관계에 불필요한 투자를 최소화하려는 밀레니얼 세대의 가치관이 반영된 새로운 생활상이란 분석이다. 집 안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홈코노미(home+economy)’가 일반화되고 있다.



2030세대 60~70% “나는 홈족”

▶밀레니얼 세대 특징…40 이상은 소수

홈족 증가는 각종 수치로 확인된다.

통계청의 2017년 인구 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1인 가구는 561만8677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28.6%에 달해 ‘가장 일반적인’ 가구 형태가 됐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성인 남녀 1625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스스로를 홈족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전체의 58.6%가 ‘그렇다’고 답했다. 홈족 비율은 특히 20~30대 그룹에서 높이 나타났다. 20대(68.5%)와 30대(62%)는 각각 60% 이상이 홈족이라 밝힌 반면, 40대 이상 그룹에서는 29.6%만이 같은 답을 해 큰 차이를 보였다. 집에서 주로 하는 활동으로는 영화·드라마 정주행, TV 시청, 휴식, 커피 만들기·마시기, 인터넷 쇼핑, 독서순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75%가 “향후 홈족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홈족의 동반자’인 배달앱과 넷플릭스의 성장도 괄목할 만하다.

2016년 1월 한국에 상륙한 넷플릭스는 초기에는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지난해 들어 급성장하는 추세다.

닐슨코리안클릭에 따르면 올해 2월 말 기준 넷플릭스 웹·안드로이드 앱의 순방문자 수는 240만2000명으로 전년 동기(48만5000명) 대비 5배 가까이 높아졌다. 같은 기간 평균 체류 시간도 125분에서 306분으로 약 2.5배 늘었다. 배달앱 시장도 2013년 이용자 수 87만명에서 지난해 2500만명으로 5년 만에 30배 가까이 급증, 3조원 규모로 커졌다(공정거래위원회 자료). 상황이 이렇자 온라인 쇼핑 업계에서는 홈족 관련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다.

외식 대신 집에서 간단히 술과 음식을 즐기는 트렌드에 ‘홈술’ ‘HMR’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가정용 술을 구입한 ‘1인당 월평균 주류 소비지출’은 2013년 1만800원에서 2016년 1만2300원으로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주점업의 서비스업생산지수는 90.6에서 78.8로 줄었다. 해외에서는 ‘팬츠드렁크(Pantsdrunk)’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북유럽에서 나온 이 말은 ‘집에서 편안하게 속옷만 입고 홀로 술을 마시는 행위’를 뜻한다.

국내 HMR 시장도 2010년 7700억원에서 지난해 4조원 이상(업계 추정치)으로 연평균 30% 넘게 성장하고 있다(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자료). HMR 시장 규모가 향후 10년 뒤 17조원에 이를 것이란 관측이 나올 만큼 향후 전망도 밝다. 집에서 외모를 가꾸는 ‘홈뷰티’ 시장도 활황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국내 가정용 뷰티기기 시장 규모는 4700억원으로 4년 만에 6배나 급성장했다.

전반적으로 홈 관련 매출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홈족의 디테일화’를 엿볼 수 있다. 홈족 트렌드가 몇 년간 지속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란 분석이다.

예를 들어 홈퍼니싱, 홈캉스, 홈쿡 등 구매금액이나 제품이 크고 손이 많이 가는 상품군은 성장률이 낮아지고 대신 홈카페, 홈요가, 홈트레이닝 등 개인적 기호나 미용·체력관리 관련 상품군의 성장률이 높아진 식이다.

G마켓의 경우 홈쿡의 대표 상품인 ‘에어프라이어’는 2016년 판매 성장률이 134%에서 2017년 520%로 급등했지만 지난해에는 108%로 크게 둔화됐다. ‘튀김기’도 같은 기간 18%에서 129%로 증가한 뒤 66%로 내려앉았다. 홈캉스 분야에서도 ‘보드게임’(29% → 29% → 14%), ‘게임 컨트롤러’(41% → 138% → 17%), ‘사운드바’(175% → 10% → 30%), ‘DIY용 목재’(14% → 26% → 10%) 등의 판매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홈카페 상품 중 ‘찻주전자(tae pot)’는 2016년의 전년 대비 판매 성장률이 44%에서 이듬해 179%, 지난해 225%로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옥션에서는 필라테스링, 스쿼트 등 홈트레이닝 제품도 지난해 판매 성장률이 144%, 245% 급등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홈족이 일반화되고 실용적 미니멀리즘 문화가 확산되며 이제는 홈퍼니싱 등 덩치가 큰 용품에서 개인의 미용이나 체력관리, 기호에 특화된 제품 위주로 소비가 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홈족이 대세가 된 원인과 전망은

▶불황·미세먼지…뉴노멀 떠올라

홈족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경제성장이 둔화되며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온라인·SNS를 통한 각종 서비스 발달로 홈족의 편의성이 증대된 데다, 미세먼지 등 환경적 요인으로 역시 외출을 자제하게 된 때문이다.

주윤황 장안대 유통경영과 교수는 “일본에서도 장기 불황이 시작되며 히키코모리 전 단계로 외출을 안 하는 이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홈족 증가가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모바일 쇼핑 등의 발달로 집 안에서도 불편을 못 느끼니 ‘자발적으로’ 홈족이 되는 이들이 늘었다. 여기에 미세먼지 등으로 집 안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향도 높아졌다. 이런 이유로 당분간 홈족의 증가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의 설문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홈족 생활을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집에서 편히 쉬려고’(61.1%), ‘지출을 줄이려고’(49.4%), ‘집에서 할 게 많아서’(47.3%)순으로 답변이 모아졌다.

이제 홈족이 소비 형태의 ‘뉴노멀(새로운 기준)’이 된 만큼 기업들도 이에 맞춰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거품이 꺼지며 경제와 사회가 전반적으로 차분해지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변모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홈족 시대를 이끌어가지만, 요즘은 고령화로 인한 사별, 황혼 이혼 등으로 기성세대에서도 홈족이 늘어나는 추세다. 앞으로는 3인 이상 ‘대단위’ 소비는 감소하고 1인 가구를 타깃으로 한 소포장·소용량·다품종·배달·구독 서비스가 확산될 것이다. 기업들도 이에 발맞춰 제품의 생산 물량과 수명 주기를 짧게 잡고 젊게, 빠르게, 가볍게, 다양하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의 생각이다.

▷온라인 편의성 증가로 외출 ‘불필요’

홈족 이유 ‘집에서 편히 쉬려고’ 1위

‘온정 메말라’ 분노조절장애 우려도

한편에서는 홈족의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잖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혼자 집에서만 생활하면 결국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무엇이든 집에서 혼자 하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안 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사랑이나 온정이 메말라 조금만 불편해도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물론 기술의 진보로 홈족 증가는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기술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간 본연의 사회성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여행, 캠핑 등 지역 커뮤니티 문화를 활성화해 전통적 가치관의 복원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홈족 가문’ 족보 총정리

‘캥거루·니트’ 지나 ‘비혼·욜로’로 거듭

홈족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이종의 생명체가 아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한 인류가 호모사피엔스에 이른 것처럼, 시대 변화에 따라 개개인 성향이 차근차근 달라진 결과다. 그야말로 ‘사회적 진화’의 산물인 셈이다. 현재 홈족이 나타나기까지의 ‘족보’를 총정리해봤다.

홈족의 뿌리는 의외로 ‘캥거루족’으로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캥거루족은 졸업 후 자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 사는 청년을 일컫는다. 2000년대 들어서는 40~50세가 돼서도 70~80대 부모에 의존해 사는 ‘중년 캥거루족’까지 나타났다. 부모에 기생한다는 의미에서 ‘패러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이라고까지 불린다.

홈족의 핵심 특징은 혼자 즐기는 문화, 즉 ‘싱글’이라는 점이다. 수많은 독신 남녀를 양산한 캥거루족을 홈족의 조상으로 봐도 무방한 이유다.

캥거루족은 ‘히키코모리족’으로 진화했다. 부모와 함께 살기는 하지만 대화가 통할 리 만무. 외부 소통 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가 돼버렸다. 혼족의 성향이 더 강해진 것이다. 히키코모리는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무기력하고 이상 행동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대두된 용어다. 히키코모리는 ‘틀어박히다’라는 뜻의 일본어 ‘히키코모루’의 명사형으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이를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방콕족’이라는 말로 불렸다.

이들의 탄생은 경제 불황과 무관하지 않다. 히키코모리족은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일본 장기 불황의 끝자락에서 나타났다. 한국 방콕족 등장 역시 1998년 IMF 금융위기와 시기가 겹친다. 히키코모리와 방콕족의 친척뻘인 ‘니트(NEET)족’도 마찬가지다.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말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이다. 어린 시절 일본 장기 불황을 몸소 겪으며 자라난 청년인 ‘사토리 세대’도 비슷하다. ‘달관 세대’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경제활동에 의욕이 없고 결혼을 멀리하며 허리띠만 졸라매는 공통점을 지녔다. 한국에서는 ‘N포 세대’로 이름만 달리한 비슷한 무기력증이 청년 사이에서 나타났다.

시대적 우울함을 견뎌내기 위해 인류는 최근 또다시 진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개인 만족감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으로의 변화다. 무작정 아끼기보다는 ‘쓸 때는 쓴다’는 점에서 달라졌다. ‘포기’ ‘달관’ 등 부정적 단어로 점철된 이전 세대와 달리 어감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도 특징적인 변화다.

2010년 이후 등장한 ‘욜로(YOLO)족’이 대표적이다. ‘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로 이들은 ‘한 번뿐인 인생, 즐기자’는 사상을 탑재했다. 노후 대비를 위해 근검절약만이 미덕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라도 즐기겠다는 게 핵심이다. ‘스몰럭셔리족’도 비슷하다. 지출 규모 자체를 늘리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이 행복을 느끼는 특정 분야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게 포인트다.

이 같은 ‘자기 만족주의’와 맞물려 등장한 또 하나의 집단이 ‘비혼(非婚)족’이다. ‘할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느낌이 강했던 과거와 달리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현재를 즐기고 만족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결혼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난다는 발상이다. 1인 가구 비중이 높고 지출도 마다 않는 홈족의 특징은 비혼족의 대거 유입에서 비롯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정인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비혼이 늘어나면서 홈족의 소비 시장 내 영향력이 커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비혼 1인 가구 지출은 전체 처분가능소득의 77%나 된다. 다인 가구 평균인 71%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소비성향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잠깐용어 *홈족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일컫는 말. ‘집은 주거공간’이라는 인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취미나 여가생활까지 즐기는 모습을 보인다. ‘히키코모리’나 ‘방콕족’과 달리 자발적으로 집에 머무는 것을 즐긴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나건웅 기자 wasabi@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3호 (2019.04.10~2019.04.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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