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신청 서비스 안내

퇴로 막힌 재건축 해법은 어디에

  • 김경민 기자
  • 입력 : 2019.04.12 08:49:05
  • 최종수정 : 2019.04.12 09:29:02
‘부동산 대장주’로 불리던 서울 강남 재건축 시장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정부가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안전진단 강화 등 각종 규제를 쏟아낸 데다 서울시 재건축 심의도 늦어져 주요 단지 재건축 사업이 사실상 ‘올스톱’된 상태다.

참다못한 입주민들은 단체행동에 나섰다.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주민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항의집회를 여는가 하면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 조합은 재건축 심의 지연에 항의하는 대형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신탁방식 재건축 등으로 규제를 피하거나 재건축 대신 아예 리모델링으로 방향을 선회한 단지도 적잖다.

서울 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순항할 수 있을까. 딜레마에 빠진 재건축 사업 향방을 분석해본다.



은마·잠실5단지 심의 지연에 주민 반발

재건축 차질 땐 주택 수급 불균형 심화


“집값 상승이 우리 탓이냐” “(무너질까) 무서워서 못 살겠다”.

지난 3월 2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주민 300여명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은마아파트 정비계획안에 대한 ‘재건축 도시계획위원회 상정’을 요구하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지난해 8월 서울시가 요구한 정비계획안을 제출했지만 6개월 넘게 묵묵부답이다. 재건축 인허가 의무를 무시하는 무책임한 행정으로 더 이상 피해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79년 준공된 은마아파트는 4424가구가 거주하는 강남 대표 재건축 단지다. 2003년 재건축 조합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지 16년가량 지났지만 아직까지 재건축 사업은 답보 상태다. 서울시 첫 심의단계인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퇴짜를 맞은 탓이다.

2010년 재건축 안전진단 D등급을 받은 뒤 야심 차게 재건축을 추진했지만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은마아파트 추진위원회는 2015년 말 주택 재건축 정비계획안을 수립하면서 49층 재건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받기 위해 150억원을 들여 2016년 9월 국제현상설계공모까지 했지만 서울시 인허가 문턱을 넘지 못했다. 추진위는 2017년 10월 35층으로 정비계획안을 전면 수정하고서도 서울시 심의에서 다섯 차례 고배를 마셨다. “지은 지 40년이나 돼 누수, 단전 등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데도 재건축을 계속 막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게 주민들 불만이다.

초과이익환수제, 안전진단 강화 등 정부 재건축 규제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등 주요 재건축 단지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초과이익환수제, 안전진단 강화 등 정부 재건축 규제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등 주요 재건축 단지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재건축이 지지부진하면서 은마아파트 시세는 하락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 1월 은마아파트 전용 76㎡ 실거래가는 14억원으로 지난해 9월 최고가(18억5000만원)보다 4억5000만원가량 떨어졌다.

송파구 랜드마크 단지인 잠실주공5단지도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조합은 ‘서울시민 다 죽인다 약속 어긴 박원순 시장’ 등의 항의성 문구를 적은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은마아파트처럼 서울시청 앞에서 주민들이 모여 재건축 심의를 촉구하는 항의집회를 열기로 했다.

잠실주공5단지 주민들이 뿔난 것은 새 단지 설계인 국제현상설계공모안 확정 절차가 1년가량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지는 2017년 서울시 제안에 따라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재건축 설계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3월 현상공모 당선작을 선정한 뒤 그해 4월 조합에 결과를 통보했다. 조합은 이를 단지 설계안으로 의결했다.

당초 서울시는 공모 후속 과정을 수권소위원회에서 빠르게 처리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심의안 상정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이번 공모안에는 총 36억원가량이 소요됐다. 조합은 서울시 심의가 계속 미뤄질 경우 국제현상설계공모 당선안을 폐기할 예정이다. 조합 측은 “서울시가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하면 절차를 간소화해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과도한 무상 기부채납을 강제하는 등 인허가를 볼모로 한 행정 갑질 때문에 사업이 멈춰 섰다. 사업이 장기간 지연되면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금 부담까지 지게 됐다”고 토로했다. 은마아파트처럼 잠실주공5단지 집값도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19억원 안팎이던 전용 76㎡ 매매가는 최근 16억원대로 떨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울 재건축 단지 매매가는 연일 하락세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지난해 10월 넷째 주 이후 20주 연속 떨어졌다. 비록 일부 재건축 단지 급매물이 소화되면 반짝 반등하는 분위기도 엿보이지만 대세 상승으로 보기는 이르다는 관측이 많다. 김은진 부동산114 리서치팀장은 “일부 서울 재건축 단지 급매물은 소화됐지만 추격 매수가 없어 본격적인 반등세로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건축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것은 정부의 고강도 규제 영향이 크다.

대표적인 정책이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다. 준공 시점 새 아파트 가격에서 추진위 승인 당시 공시가격과 개발 비용, 정상 주택가격 상승분 등을 뺀 금액(초과이익)이 조합원 1인당 평균 3000만원을 초과할 경우 최고 50% 부담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정부는 지난해 1월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를 대상으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금을 추정한 결과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구)의 경우 조합원 1인당 평균 4억4000만원, 최대 8억4000만원에 이르는 단지가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재건축 조합원 1인당 많게는 수억원씩을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강남구 압구정 구현대 등 일부 아파트는 재건축 부담금을 염려해 사실상 재건축 사업 추진을 중단하기도 했다. 부담금 탓에 초기 단계 재건축 단지마다 주민 동의를 얻기 어려운 만큼 향후 재건축 사업이 지지부진할 우려가 크다.

이뿐 아니다. 투기과열지구 내 조합원 지위 양도 금지, 안전진단 기준 강화 등 잇단 규제도 악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지난해 2월 재건축 아파트 안전진단 평가 항목별 가중치에서 구조 안전성 비중을 20%에서 50%로 올리고 주거환경평가 비중을 40%에서 15%로 낮췄다.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라도 무너질 위험이 없으면 사실상 재건축이 어려워졌다. 그만큼 재건축 문턱이 한층 높아졌다는 의미다. 또한 투기과열지구 내에서 조합을 설립한 재건축 단지는 조합원 지위 양도가 금지된 상태다. 지난해 9·13 대책 이후 금융권 이주비 대출까지 막히면서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신청하고 이주 시기를 조율하는 재건축 주민들은 속이 타들어간다.

▶은마아파트 재건축 심의 다섯 번 퇴짜

재초환·안전진단 등 규제 갈수록 강화

올 들어서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시가 올 하반기부터 재건축 사업 초기 단계에 단지 디자인과 높이, 배치 등을 포함한 사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로 해 논란이 뜨겁다. 천편일률적인 ‘성냥갑 아파트’를 줄이고 도시 미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지만 재건축조합의 사업 자율성이 침해되고 결국 사업비가 급증할 우려도 크다. 재건축 초기 단계인 서울 양천구 목동 일대 1~14단지, 압구정 재건축 단지 등이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주택 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조합 스스로 설계에 신경 쓰면 얼마든지 성냥갑 아파트를 탈피할 수 있는데 또 다른 규제를 양산하는 듯싶다. 서울시가 개별 아파트 밑그림까지 결정하면 재건축 사업 속도가 더욱 늦어질 우려가 크다”고 꼬집었다.

한태욱 동양미래대학 경영학부 교수는 “서울시가 재건축 초기 설계 단계부터 모든 사안을 관리감독하게 돼 재건축 아파트 가격 하락 추세는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건축 단지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예 재건축 사업을 늦추거나 리모델링으로 돌아서는 단지도 속속 나타나는 중이다. HDC현대산업개발을 시공사로 선정한 잠원 한신로얄 리모델링 조합은 2개 층을 수직증축해 237가구의 ‘신반포아이파크’를 짓기로 했다. 잠원동아, 개포대청아파트도 리모델링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광진구 워커힐아파트처럼 일반분양을 포기하고 1 대 1 재건축을 추진하는 단지도 부쩍 늘었다.

집값 급등을 우려한 정부가 재건축 규제에 안간힘을 쓰지만 무작정 재건축을 막으면 오히려 집값 급등 후폭풍을 불러올 것이란 우려도 적잖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은 지 30년 이상 된 주택 비중은 전체 주택의 20%를 넘는다. 2030년이 되면 서울 아파트 절반 이상인 56%가 준공 30년을 맞는다. 주택 수요가 많은 서울시의 경우 새로 아파트를 지을 땅이 없는 만큼 재건축이 막히면 추후 공급부족 사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윤재호 메트로컨설팅 대표는 “재건축 규제 강화로 조합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줄어 재건축 사업성이 악화됐다. 향후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이 급감해 수급 불균형이 재연될 수 있다”고 전했다. “주택 공급을 늘리려면 재건축 규제 완화가 절실하다”는 김대철 한국주택협회장 주장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음 기사 보러 가기◀

[특별취재팀 = 김경민·강승태 기자 / 사진 = 윤관식·최영재 기자 / 그래픽 : 신기철]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3호 (2019.04.10~2019.04.16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