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 찬다고 어른? 숨 거두는 날까지 노력해야 아름다운 성인이죠”

김지혜 기자

영화 ‘미성년’으로 감독 데뷔한 김윤석

11일 개봉한 영화 <미성년>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배우 김윤석은 이 작품에서 ‘어른의 자격’을 되묻는다. 쇼박스 제공

11일 개봉한 영화 <미성년>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배우 김윤석은 이 작품에서 ‘어른의 자격’을 되묻는다. 쇼박스 제공

10여년 전 ‘멍충지송’이라는 유행어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군 적이 있다. ‘멍청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로 이 말을 지은 이는 다름 아닌 영화감독 겸 배우 김윤석(51)이다. 당시 불혹의 나이에 팬카페를 갖게 된 그는 팬들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죄송함’을 전했다. 2017년에도 그는 ‘사과의 아이콘’이 됐다. 영화 토크쇼 자리에서 “여성 출연진들이 덮은 무릎 담요를 내려주겠다”는 성희롱성 발언으로 비판에 직면했을 때다. 그는 곧바로 사과했다. 시사회장에서도 다시 사건을 언급해 공론화했다. 팬에게 선물받은 페미니즘 도서를 들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했는데도 술에 취해 코를 골고 자고 있죠. 그런데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웁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려 애쓰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윤석은 그의 입봉작 <미성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비판을 피하지 않고, 지적받은 잘못을 사과하고 시정했던 그의 과거 모습들이 문득 스쳐갔다. ‘멍충지송’으로 대표되는 그의 태도는 ‘어른의 자격’에 대한 고민으로,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미성년’ 이야기에 대한 관심으로 뻗어나갔다. 가슴을 죄는 삶의 난제를 용기 있게 마주한 두 여고생과 두 엄마의 이야기, 영화 <미성년>은 그렇게 탄생했다.

‘뻔한’ 중년 남성 외도와 마주한 두 여고생·두 엄마의 용기
시나리오 작업 5년 만에 개봉…염정아도 “신선하다” 출연

“2014년 12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옴니버스 연극을 봤는데, 그간 외도 소재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발견했어요. 어른들이 외면한 문제를 아이들은 끝까지 매달리고 극복하더라고요.” 감독 김윤석으로의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 이 연극은 귀한 선물과도 같았다. 곧바로 희곡을 쓴 이보람 작가를 만나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영화로 나오기까지 꼬박 5년, 험난한 시간이었다. “연극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을 리모델링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집을 새로 짓는 일에 가깝습니다. 투자나 캐스팅에 있어서도 자신이 없었죠.

염정아씨가 ‘진짜 신선한 이야기’라며 출연 제의 하루 만에 승낙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외도라는 뻔한 소재 위에서도 영화는 거침없이 신선하다. 영화는 고등학생 주리(김혜준)가 아빠 대원(김윤석)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윤아(박세진)의 엄마 미희(김소진)와의 외도 끝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성과 아이를 가장의 외도로 인한 희생양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대원이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를 내버려 두고 줄행랑치는 사이 주리와 윤아는 아기를 챙기는 보호자를 자처한다. 대원의 아내 영주(염정아)는 식음을 전폐하거나 울지 않는다. 담담하게 미희를 찾아가고, 윤아를 마주한다.

영화 <미성년>은 삶의 난제를 용기 있게 대면하는 두 여고생(왼쪽 사진)과 두 엄마(오른쪽)의 이야기를 통해 힘 있는 ‘여성 서사’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는다. 쇼박스 제공

영화 <미성년>은 삶의 난제를 용기 있게 대면하는 두 여고생(왼쪽 사진)과 두 엄마(오른쪽)의 이야기를 통해 힘 있는 ‘여성 서사’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는다. 쇼박스 제공

마음이 엉키고 무너져도 주리와 윤아, 영주와 미희는 계속 만난다. 관계와 연대를 형성한다.

가부장이 내팽개친 책임을 어린 여성과 나이 든 여성이 나누어 지는 이 모습, 지극히 여성주의적이다. 김윤석은 “가치 있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고, 이를 구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포지션에 있는 이들이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아빠’라는 부름을 끝내 무시하고 도망쳐버린 대원은 한없이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하게 표현된다. “타고난 악당이 아닌,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약하고 지질한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이죠. ‘익명’에 가까운 인물 대원을 통해 관객들에게 뜨끔한 순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달까요.”

영화의 제목 ‘미성년’도 현장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공모해 결정했다. <오리집 연가>(미희는 오리 음식점을 운영한다), <유원지 불청객>(유원지는 대원과 미희의 데이트 장소다) 등 갖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져나왔다. 그중 ‘미성년’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인이 되지 못한 의미의 ‘미(未)성년’, 아름다운 성인이라는 뜻의 ‘미(美)성년’…. 두 가지 의미로 읽히길 바랐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성인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던지는 영화가 됐으면 했죠. 성인이 되는 건 운전면허증 따는 일과는 다르잖아요. 우리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 노력을 해야 아름다운 성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의 생각은 곁가지 없이 명확하다. 어른의 자격을 갱신하려면, 나이에 상관없이 ‘멍충지송’을 외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차기작을 묻자 그는 “독이 아직 안 빠졌다”며 손사래를 쳤다. 다만 “액션, 스릴러물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을 담은 영화로 승부할 것”이라며 힌트를 남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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