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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성북동 城北洞-길상사에서 사랑을, 심우장에서 기개를

입력 : 
2019-04-10 11: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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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 전 드라마 속 부잣집, 전화를 받으면 대개 “네, 성북동입니다”라는 말은 ‘교과서’처럼 귀에 익었다. 그만큼 성북동은 부자 동네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곳의 진가는 고가의 저택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유명 인사가 아니다. ‘성북동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성북동 집값보다 더 값어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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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어디를 가도 그 동네 토박이 어르신들이 한 자락 늘어놓는 나름의 이야기가 있지만 서울 동북쪽쯤의 마을 성북동은 이야기를 보따리로 쟁여 놓은 곳이다. 성북동은 혜화동, 정릉과 맞닿아 있고 도성 북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북동에 들어서면 바로 길상사를 만난다. 입적한 법정 스님이 1997년에 세운 이 절은 도심에서 만나는 ‘도량’이다. 특히 길상사 마당에 서 있는 마치 성모 마리아 모습의 불상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광활함’을 짐작할 수 있는 ‘진정한 해탈’의 상징이다. 길상사는 본디 대원각이라는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였다.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이다. 어쩌면 그 이름보다 ‘자야’라는 이름이 더 유명한, 대원각, 길상사 그리고 백석과의 인연을 풀어내는 고리다. 김영한은 15세에 결혼했지만 사별하고 기생 자야가 된다. 기예는 물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자야는 당대 최고 모더니스트 시인 백석을 만난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의 불꽃을 피웠지만 백석의 집에서는 기생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백석은 무려 세 번의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다. 백석은 꿈을 이루기 위해 만주로 떠나며 자야에게 동행을 권했지만 자야는 백석의 ‘미래’를 위해 이를 거부했다.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해방 후 백석은 이북 고향에, 자야는 서울에 자리 잡았다. 자야는 대원각을 일으켜 무려 1000억 원대의 재산을 모았다. 자야에게 백석은 영원한 연인이었다. 자야는 법정을 만나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어 달라 수차례 부탁했다. “저기 팔각정이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입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리는 것입니다.” 10년 후 법정은 이곳에 길상사를 세웠다. 백석은 1966년 세상을 떠났고,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했다. 필시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이 내 생의 전부’라던 백석의 나타샤 자야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자야를 사랑한 백석을 만났을 것이다. 사랑이다. 성북동에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심우장이다. 만해 한용운은 이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 남향으로 지어 방에 앉을 때 총독부 건물이 보이는 것을 그는 용납지 않았다. ‘심우尋牛’는 잃어버린 소를 찾는 수행의 단계를 나타내는 불교 언어다. 말 그대로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라는 뜻이다. 만해는 이곳에서 해방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입적했다. 독립을 염원한 불교 개혁가의 한 치 어긋남 없는 치열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으로 이곳에서는 잠시의 침묵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상허 이태준의 옛집 ‘수연산방’, 길가의 돌 하나조차 존재의 의미를 되살린 ‘우리옛돌박물관’, 우리 문화를 보존한 전형필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간송 미술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로 우리 것에 대한 무한 애정을 담아낸 ‘혜곡 최순우의 옛집’도 빼놓을 수 없는 성북동 이야기들이다. [글 장진혁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74호 (19.04.1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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