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지음 | 변영근 그림
알마 | 104쪽 | 1만1500원
광화문 한복판에 신이 강림한다. 신은 광채가 나고 얼굴이 희고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다. 신은 남자·백인·이성애자·비장애인의 형상으로 내려왔다. 퇴근 후 홀로 사는 아버지를 위해 밥을 차리는 영희에게 방에 누워 TV를 보던 아버지가 말한다. “역시, 신은 남자로구나….”
국내 대표 SF작가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시나리오 자문을 맡기도 했던 김보영의 신작 소설 <천국보다 성스러운>은 종교와 젠더,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SF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신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내려 혈안이 된다. “코카서스 인종이야” “역시 노인이로군” 등…. 자신과 성별, 인종, 민족이 같은 신을 소환하여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김보영은 총 다섯 개의 짧은 이야기를 이어놓는다. 태초에 신이 성별을 나누고 그 차이를 성역화한 과정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류가 멸망하고 인공지능 로봇만이 생존한 미래에 냉동 보존된 인간 ‘창조자’가 깨어나는 에피소드를 담는다. 로봇은 신을 부활시키려 하지만 깨어난 ‘신’은 비합리적인 요구만을 늘어놓는다. 로봇은 계속되는 실패 끝에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기도 한다.
김보영은 “만약 절대자가 차별주의자라면, 우리는 그 절대성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SF적 상상력과 신랄한 현실 비판을 한데 녹여낸다. 소설엔 변영근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그림 10장이 수록됐다. 알마에서 새롭게 펴낸 SF소설 시리즈 FoP(Forbidden Planet) 시리즈의 첫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