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쉰 살에 모든 걸 잃었어도 괜찮아, 중년 게이 소설가 레스의 인생찾기

이영경 기자
지난해 퓰리처상 수상작 <레스>는 쉰 살 생일을 앞둔 무명 소설가 아서 레스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를 그렸다. 나이듦과 사랑,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번뜩이는 유머와 반전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황정호(Teo Hwang)

지난해 퓰리처상 수상작 <레스>는 쉰 살 생일을 앞둔 무명 소설가 아서 레스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를 그렸다. 나이듦과 사랑,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번뜩이는 유머와 반전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황정호(Teo Hwang)

레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강동혁 옮김

은행나무/324쪽/1만4000원

미디엄 블루색의 세련된 정장을 빼입은 남성이 있다. 그는 “신선하다기엔 너무 늙었고 재발견되기엔 너무 젊으며 비행기를 탔을 때는 그가 쓴 책에 대해 들어봤다는 사람이 옆자리에 단 한 번도 앉지 않은 아서 레스”다. 쉰 살 생일을 앞두고 사랑도 삶도 일도 모두 수렁에 빠져버린 게이 소설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웃기고, 어이없고, 짠하다. 하지만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그 안에 삶과 사랑에 대한 지혜와 성찰이 들어있다. 201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나이 듦과 사랑의 본질에 관한 경쾌한 소설. 음악적인 산문과 광활한 구조의 책”이라는 평을 받았다.

쉰을 앞둔 아서 레스의 인생 후반부는 ‘비극’으로 점철된 듯 보인다. 9년 동안 함께해 온 연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레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핑곗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세계 여행을 계획한다. 책상 서랍과 메일함 구석에 쌓여 있던 온갖 초청 행사에 모두 참석하기로 한다. 뉴욕에서 멕시코로, 이탈리아에서 독일, 인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인지도 면에서 거의 지하에 있는’ 작가 레스에게 도착한 초청장들이 괜찮을 리가 없다. 여정 곳곳에는 함정과 지뢰들이 숨겨져 있고 레스는 기꺼이 함정에 빠져들고 진탕에 구른다. 퇴로가 없는 그는 ‘굴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레스>는 나이 듦에 관한 이야기다. “굴욕과 실망과 상심과 놓쳐버린 기회, 형편없는 아빠와 형편없는 직업과…인생의 모든 여행과 실수와 실족을 겪고도 살아남아 쉰 살”을 맞는 그에게 50세는 ‘외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같다. “커피를 마시려면, 술을 마시려면,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제야 알아냈는데. 근데 떠나야 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레스의 청춘과 나이 듦에 대한 사유는 그의 사랑 이력과 관계가 있다. 레스는 젊은 시절엔 50대의 천재 시인이자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로버트 브라운번과 함께했으며, 그와 이별한 후 젊은 연인 프레디와 함께한다. 그는 청년기에 중년의 예술가와 만났고, 그의 중년으로 가는 시기엔 청춘의 연인과 함께했다. “레스는 젊은 시절의 기쁨을 너무 잘 알았고, 로버트나 친구들과는 나이 듦의 기쁨-안락함과 평온, 아름다움과 취향, 오래된 친구들과 오래된 이야기들과 와인, 위스키, 물가의 석양-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평생 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그는 항상 청춘과 중년의 틈새에 머물렀던 셈이다. 이제는 꼼짝없이 중년의 편에 섰지만.

<레스>는 사랑 이야기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도도한 스타일의 바보 사랑꾼’이라는 평을 받은 레스는 여행 속에서도 새로운 연인과 만나고 헤어지며 사랑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는다. 사랑은 그에게 “사람을 거울로 쓰겠다는 이 끝없는 욕구, 그 거울에 비친 아서 레스를 봐야겠다는 욕구”이기도 하다. 그는 팔순의 나이가 되어 병상에 누운 로버트와 영상 통화를 나누며 “사랑은 손가락으로 짚을 수 없다”고 말한다.

<레스>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레스는 천재 시인과 사는 것이 어떤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가 나보다 더 사랑한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을 집에 들여 함께 살겠다는데, 허락하는 것만 같다”고 말하고,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충분히 따뜻하긴 하지만 절대 발가락을 제대로 덮어주지는 않는 그런 조각보를 여기저기 때우고 기워야 했다”고 말한다. 소설 속엔 신화와 문학 속 구절과 인물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인용되며 읽는 재미를 더한다.

ⓒ황정호(Teo Hwang)

ⓒ황정호(Teo Hwang)

<레스>는 성소수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부 주에선 동성결혼이 허용되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역사가 긴 미국,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삶의 간극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서 레스는 늙어가는 첫 동성애자다. 그는 쉰 살이 넘은 다른 게이 남자를 본 적이 없다”며 “그 세대는 에이즈로 죽었다. 레스 세대는 종종 쉰 살 이후의 땅을 탐험하는 첫 세대처럼 느껴진다. 어떤 식으로 해내야 하나?”라고 질문을 던질 때, 50대 게이 레스가 선 곳의 풍경이 좀 더 선명히 보인다. 레스가 쓴 첫 번째 소설은 희망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형편없는 게이”라는 평을 듣고, 그가 쓴 최신작은 “백인 중년 미국 남자가 백인 중년 미국인의 슬픔을 품고 걸어다닌다”는 이유로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들려주는 인물이 레즈비언 조라라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인종·성별 등 다양한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백인 중년 게이’의 이야기는 공감의 폭이 넓지 않을 거란 말로 들린다.

무엇보다, <레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소설가 김봉곤은 추천사에서 “완벽한 밀당 컨트롤로 한눈팔 틈을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레스>는 ‘밀당’의 고수다. 레스가 꼼짝없이 굴욕과 망신을 당하고 패배할 거라 생각한 순간, 사소하고 때로는 마법 같은 반전들이 그를 진흙구덩이에서 건져낸다.

여행의 끝, “그 정장 없이는 아서 레스도 없다”던 푸른색 정장도, 여행 가방도 잃어버린다. 대신 썩 어울리는 회색 정장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겐 여전하지만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넌 눈을 가려놓은 사람처럼 그냥 어딜 가든 쿵쿵 부딪쳐댔어…모든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고도 네가 이겼어”라는 친구의 말처럼, 레스는 맨몸으로 삶과 부딪치면서도 결국 ‘자신’으로 살아남았다. 반백 살, 레스의 남은 50년을 응원한다.

[책과 삶] 쉰 살에 모든 걸 잃었어도 괜찮아, 중년 게이 소설가 레스의 인생찾기
저자 앤드루 숀 그리어 ⓒ Kaliel Roberts

저자 앤드루 숀 그리어 ⓒ Kaliel Rob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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