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결국엔 불평등을 야기하는 절대적 공평의 오류

목광수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

정의의 아이디어

아마르티아 센 지음·이규원 옮김

지식의 날개 | 560쪽 | 3만3000원

[책과 삶]결국엔 불평등을 야기하는 절대적 공평의 오류

경제학·철학을 넘나든 학자 센
독창적 ‘비교적 정의론’ 제시

명백한 ‘부정의’를 제거하면서
공적 추론을 통한 ‘정의’의 실현
다원성을 배제한 롤스와 차별
비제도적 영역의 정의도 중요시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과와 철학과 교수인 아마르티아 센의 <The Idea of Justice>가 10년 만에 <정의의 아이디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국내에 출판됐다. 2009년 이 책을 원서로 처음 접했을 때, 이 책이 한국 학계와 사회에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에 한국어 번역서에 대해 반가움이 남다르다.

이 책은 경제학과 철학을 넘나들면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해온 독창적인 학자 센의 평생에 걸친 연구 성과물들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센은 경제학 분야에서 사회적 선택이론과 후생경제학을 발전시켰고, 철학 분야에서는 ‘인간 개발과 역량’(Human Development and Capability)이라는 학제 간 연구 학회와 저널을 탄생시킬 정도로 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역량접근법을 제시했다.

이 책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이 그가 중시하는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통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 책은 자신에게 제기되었던 그동안의 비판과 오해에 대한 해명도 담고 있어 센의 논의에 관심 있는 다양한 연구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일반인에게도 쉽고 명료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쓰여졌다는 데 있다. 일상 속에서 정의 실현을 도모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센의 논문에 친숙한 학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논증들이 잘 녹아들어 이렇게 쉽고 간결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센 특유의 수려한 문체와 동서양을 넘나드는 박식함이 나타나는 문학적 인용, 특히 자신의 고향인 인도의 역사와 문학을 통한 논의 전개는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대 철학 저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학문성과 넓은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이다.

기존 학계의 논의가 갖는 한계를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 센의 독창적인 연구 결과물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잘 짜여 있는 이 책은 <정의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존 롤스(2002년 작고)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센도 이 책 곳곳에서 롤스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어 둘 사이에 학문적 차이가 크지 않다는 오해가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책은 1부 2장의 제목이 ‘롤스와 그 너머’(Rawls and Beyond)인 것처럼, 롤스의 정의론의 한계를 넘는 ‘비교적 정의론’(the theory of comparative justice)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롤스와 뚜렷이 구별된다. 더욱이 센은 자신의 ‘비교적 정의론’의 학문적 뿌리를 애덤 스미스, 콩드르세 등 비주류 계몽주의 전통에서 찾고 있다. 이는 롤스 정의론의 철학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토머스 홉스, 임마누엘 칸트, 존 로크 등의 주류 계몽주의 전통과 대비된다. 이런 철학사적인 계보 분류는 롤스의 논의와 센의 논의가 정의론에 대한 입장에서 분명히 구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논증되는 논의를 재구성해 보면,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적어도 세 가지 지점에서 롤스의 정의론과 내용적으로 차별화된다. 첫째, ‘비교적 정의론’은 단일하며 초월적인 정의의 원칙을 모색하기보다는 명백한 부정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롤스는 우리 자신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지능이 높은지 낮은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등의 조건을 모르는 상황에 있다면 모든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지 보다 쉽게 합의할 수 있다고 여겼다. 롤스는 이런 상황을 ‘무지의 베일’ 뒤의 ‘원초적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센은 롤스처럼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의 장치에서 ‘무지의 베일’을 쓴 합의 당사자들이 정의의 원칙을 모색하는 방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재판할 때 주관성을 버리겠다는 뜻으로 두 눈을 헝겊으로 가린 정의의 여신처럼, 자신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등의 조건을 모르는 상황에 있다면 보다 합리적인 정의의 원칙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르티아 센은 개개인의 실제 상황과 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산술적 ‘평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센은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제시되는 열린 공평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재판할 때 주관성을 버리겠다는 뜻으로 두 눈을 헝겊으로 가린 정의의 여신처럼, 자신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등의 조건을 모르는 상황에 있다면 보다 합리적인 정의의 원칙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르티아 센은 개개인의 실제 상황과 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산술적 ‘평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센은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제시되는 열린 공평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롤스와 같은 주류 정의론자들이 추구하는 정의의 원칙 없이도 우리가 가진 도덕적 감각과 이성적 검토를 통해 노예제와 같은 명백한 부정의를 발견하고 제거하는 정의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센의 분석에 따르면, 주류 계몽주의 전통을 따르는 정의론은 롤스의 정의론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제시하는 데 골몰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단일한 정의의 원칙을 만장일치를 통해 합의하기 위해 다양한 목소리를 임의적으로 배제한다. 그뿐만 아니라 만장일치 합의를 위해서는 경합하는 여러 개의 가치들 중 특정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해야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닫힌 공평성이며 다원성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각자 중요시 하는 가치들은 나름의 정당한 근거들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제시되는 열린 공평성을 추구해야 하며, 발견된 부정의를 제거하면서 조금씩 정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현실 속에서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공적 추론’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기존의 공적 추론이 이상적 상황에서의 만장일치 합의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면, 센은 자신의 사회적 선택이론 연구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명백한 부정의에 대한 공적 추론을 통한 부분적 비교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더욱이 이러한 공적 추론이 서구 사회의 산물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동서양 전통 속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으로서의 공적 토의로서의 민주주의를 새롭게 제시한다.

둘째, ‘비교적 정의론’은 제도뿐만 아니라 비제도 영역에서의 정의 실현을 추구한다. 기존의 정의론은 정의 실현을 중시하면서도 제도적 측면에만 몰두한 나머지 비제도적 측면에서 야기될 수 있는 부정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경향이 있었다. 롤스를 포함한 기존의 정의론자들은 일단 제도적 영역이 정의롭게 구현되면 비제도적 측면과 관련된 사회구성원의 행동방식과 의식이 자연스럽게 정의로워질 것이라는 낙관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제도적으로 정의로운 사회 구조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의 왜곡된 문화와 인식으로 인해 자존감이 상실되고 모욕감을 느끼는 부정의를 종종 경험한다. 여성차별을 처벌하는 법제도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여성을 차별하는 관습과 인식이 자동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센은 사회 제도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비판하면서 비제도적 요소도 중요시하는 ‘비교적 정의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셋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역량접근법을 토대로 전개된다. 기존의 정의론은 사회적 재화를 분배할 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평등’을 추구해야 할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센은 ‘평등’이라는 하나의 지표만을 척도로 삼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자원이 동일하게 주어져도 그것을 활용해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실제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모두에게 똑같이 초코파이 하나씩을 나눠주는 것이 언뜻 공평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개인의 덩치나 활동량을 고려하지 않은 분배라면 결국 평등하지 않은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와 같다. 인권, 민주주의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센의 역량접근법은 제도적·비제도적 측면을 모두 고려해 점진적으로 부정의를 제거해 감으로써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의 실천적 토대가 된다.

[책과 삶]결국엔 불평등을 야기하는 절대적 공평의 오류

이번에 출판된 <정의의 아이디어> 한국어판을 읽어보니 센의 수려한 문체가 오히려 한국어 번역에서는 어려움으로 다가왔을 텐데도 잘 읽혀졌다. 400쪽이 넘는 대작일 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 경제학, 법학, 문학 등 다방면에 능통한 센의 박식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했을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진다. 다만, 욕심이겠지만 이 책의 가치를 알고 공부해온 분야별 연구자들이 번역 과정에서 협업했다면, 일부 눈에 띄는 개념어들의 불일치와 낯섦을 줄여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조금 더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은 잠깐 주목받다 사라지는 책이 아닌,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꾸준히 읽히면서 연구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Today`s HOT
폭풍우가 휩쓸고 간 휴스턴 개혁법안 놓고 몸싸움하는 대만 의원들 영국 찰스 3세의 붉은 초상화 총통 취임식 앞두고 국기 게양한 대만 공군
조지아, 외국대리인법 반대 시위 연막탄 들고 시위하는 파리 소방관 노조
총격 받은 슬로바키아 총리 2024 올림픽 스케이트보드 예선전
광주, 울산 상대로 2-1 승리 미국 해군사관학교 팀워크! 헌던 탑 오르기 미국 UC 어바인 캠퍼스 반전 시위 이라크 밀 수확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