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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종각 鐘閣-종각, 전성시대의 회귀를 기다린다

입력 : 
2019-04-03 17:23:00
수정 : 
2019-04-04 15: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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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31일이 되면 1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곳이 있다. 자정이 되면 대한민국 모든 방송국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곳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내보낸다. 바로 보신각 타종식이다. 종이 울리고 지난 1년의 아쉬움과 다가온 새해의 기대가 교차하는 곳, 바로 ‘종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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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는 이름과 함께 그 지역을 상징하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 수식어는 대개 자연발생적이다. 남대문은 시장, 여의도는 금융, 광화문 일대는 관공서, 청담동은 명품, 북촌은 한옥 등이다. ‘젊음의 거리’라는 수식어에서 연상되는 지역은 어디일까? 신촌, 홍대, 강남역 등 1020세대가 즐겨 찾는 곳일 테다. 그리고 종로 2가 파고다 공원에서 종로 1가 영풍문고 사이, 청계천을 접한 지역의 또 다른 이름이 ‘젊음의 거리’이다. 이 이름은 ‘젊은이들’이 자생적으로 붙인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지역 구 그리고 ‘젊은이들의 선택’을 기대하는 이곳 가게들의 이심전심이 낳은 결과물이겠다. 본래의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곳, 바로 종각이다. 말 그대로 큰 종을 매단 종루가 있던 곳이라 종각이라 불렀다. 종각의 전성시대는 조선 시대부터다. 서울이 수도가 된 1394년 이후 조선은 서울에 사대문과 사소문을 만들고 그 문들을 경복궁과 연결시켰다. 즉 경복궁 주문인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고, 동대문에서는 종로를 가로질러 남대문에서 오는 길과 만나게 했다. 또 동대문으로 연결되는 간선에는 왕실 물자를 공급하는 육의전을 비롯 점포를 설치해 백성들의 소비를 담당케 했다. 이 시전들이 수백 년을 두고 범위를 넓혀 가면서 자연스레 종로는 1가부터 6가까지,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물품과 돈이 쌓이고 사람이 오가는 곳, 즉 시장은 도시의 중심이자 번화가다. 해방 이후 종각은 명동과 함께 서울의 핫플레이스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당대 거부 박흥식이 지은 화신백화점은 종로의 자부심이었다. 화신백화점의 라이벌은 1930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미쓰코시백화점. 두 백화점은 종로와 명동, 한국 자본과 일본 자본이라는 대결 구도도 형성했었다. 1970년대 당시엔 종각은 그야말로 완벽한 젊음의 거리였다. 제일, 대일, 아이템플, YMCA 등 입시 학원이 밀집했고, 지금 종로 1가 다이소 매장 자리에 있던 1907년 예수교 서회가 문을 연 종로서적은 휴대폰이 없던 시절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굳이 ‘젊음의 거리’라고 이름 짓지 않아도 청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 종각의 맛은 의외로 서민과 추억이다. 직장인의 영혼 음식인 해장국의 성지 청진옥은 1937년 문을 열었고, 빈대떡으로 유명한 열차집은 1957년부터 양복 입은 신사들도 드나들었다. 제일은행 본점 뒤 삼양식품은 값싸고 맛있는 라면을 팔아 ‘책가방은 무겁고 지갑은 가벼운 학생’들이 즐겨 찾았다. 그러나 꽃이 피면 시드는 법.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옮겨졌다. 종각 전성시대는 화신백화점과 종로서적의 퇴장, 학원가의 이전으로 저물었다. 이제 종각은 2030세대를 기다린다. 다양한 가게들이 문을 열고 그들의 방문을 기대하지만 예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한 치 아래 파고다공원이 있는 종로 3가는 ‘도심의 섬’이 된 지 오래고, 윗동네 광화문과 옆동네 무교동은 나름의 개성으로 종각의 힘을 막아 내고 있다. 그래도 종각 사람들은 은은히 넓게 울려 퍼지는 보신각 종소리처럼, 종각의 힘이 다시 살아나리라 믿는다. [글 장진혁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자료사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73호 (19.04.0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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