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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 경제라인 ‘학현학파’ 시대 분배 정책 소득주도성장 드라이브

  • 김경민, 박수호 기자
  • 입력 : 2019.04.05 09:35:15
문재인정부 주요 경제부처마다 ‘학현(學峴)학파’ 인사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학현학파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분배경제학을 가르쳤던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따르는 진보 개혁적 경제학자 모임이다. 학현은 변형윤 교수 아호다. 학현학파는 조순학파, 서강학파와 더불어 한국 경제학계 3대 학파로 손꼽힌다. 조순학파는 한국 경제학의 거두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따르는 제자 그룹, 서강학파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이승윤,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 등 서강대 교수 출신이 이끈 학자 관료 집단을 일컫는다.

변 교수는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인 개혁적 경제학자 모임 ‘한국경제발전학회’를 만들어 성장론 위주였던 한국 경제학계에 분배의 중요성을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변 교수는 대화록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을 앓다’에서 “우리 연구실이 지향하는 방향은 ‘인간 중심의 경제학’이었습니다. 주류 경제학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빈곤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연구자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학현학파 주요 인사는

▷이제민·강신욱·장지상 등

학현학파 인사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국민경제자문회의 신임 부의장에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를 임명하면서부터다. 학현학파 인맥인 이 부의장은 경남 합천 출신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경제학 석사,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경제사학회장, 한국경제발전학회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을 두루 역임했다.

장관급인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원래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이 맡았던 자리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여러 차례 쓴소리를 해온 김광두 원장은 지난해 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신 이제민 명예교수가 이 자리를 꿰차면서 현 정부의 두 번째 경제 멘토가 됐다. 김광두 원장은 학현학파와는 대척점에 있던 서강학파의 대표적인 인물. 분배를 중시한 학현학파와 달리 서강학파는 성장을 중시해왔다.

이제민 신임 부의장은 지난해 ‘문재인정부 출범 1년, 한국 경제의 회고와 전망’ 세미나에서 “재벌과 외자에 대해 세금을 더 걷고, 부유층 과세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위주의 재정정책, 부동산 투기 억제가 필요하다고 밝혀왔다. 최근에도 정부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단기적으로 정부가 직접 내수를 부양해야 한다. 노후한 사회간접자본을 개·보수하고 최빈층을 겨냥한 복지를 늘리는 등 확장적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문재인정부 경제정책과 일맥상통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제민 부의장 임명을 계기로 향후 국민경제자문회의 역할에도 관심이 쏠린다. 문 대통령이 의장인 국민경제자문회의는 헌법에 의해 설립된 기구로 전체적인 국가 경제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하는 정부 핵심 기구. 국민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 수립, 국민 복지 증진과 균형 발전을 위한 제도 개선과 정책 수립 등이 주요 기능이다. 국민경제자문회의는 거시경제·민생경제·혁신경제·대외경제분과로 구성돼 있다. 거시경제분과 의장은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민생경제분과 의장은 김홍균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혁신경제분과 의장은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대외경제분과 의장은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맡았다.

이제민 부의장은 국민경제자문회의 홈페이지에 올린 인사말에서 “세계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미중 무역갈등이 진행되는 가운데 투자와 고용이 부진하고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분배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중한 상황에 대처하면서 기본 방향은 흔들리지 않는 쪽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향후 경제정책에서 성장보다 분배를 더 중시할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제민 부의장의 경제철학이 분배를 중시해온 문재인정부 정책 흐름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경제 멘토라는 요직에 등용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경제자문회의가 사실상 국가 경제 방향을 설정하는 핵심 역할을 하는 만큼 향후 학현학파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제민 부의장 외에도 곳곳에 학현학파 인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 강신욱 통계청장,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원승연 금융감독원 부원장 등이 대표적이다.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은 문 대통령 경제철학 ‘J노믹스’의 핵심 이론인 소득주도성장론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다. 대구 출신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제학과 석·박사를 마친 후 동반성장위원회 실무위원으로 일했다. 한국경제발전학회장, 부경대 인문사회과학대학장을 거쳐 2017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부임했다. 청와대 경제정책을 총괄했던 그는 지난해 6월 윤종원 경제수석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학현학파 위상이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그해 9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복귀한 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는 최근 ‘공정경제와 소득주도성장의 선순환’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재벌 개혁은 오랫동안 굳어진 구조적인 문제기 때문에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지만 우리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밝혔다. 특히 홍 위원장은 공정경제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토대라는 입장을 내비쳤다. “경제적 성과가 기여한 바에 따라 공정하게 돌아가면 중소기업 투자가 더욱 활성화되고 혁신을 위한 노력도 배가될 수 있다. 공정한 시장 환경은 경제 주체의 활력을 회복시키고 혁신을 촉진해 일자리와 소득을 늘리는 바탕”이라고 덧붙였다.

강신욱 통계청장도 학현학파 인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연구실장과 기초보장연구실장을 역임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소득보장정책연구실장을 거쳐 지난해 8월 신임 통계청장으로 부임했다. 그동안 빈곤 정책과 소득 분배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진보 개혁 성향 통계학자로 분류된다.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역시 학현학파 인맥이다.

홍장표 위원장, 강신욱 통계청장과 마찬가지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경제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조직학회장,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한국학술진흥재단 사회과학단장을 역임했다. 경북대 경상대학장 겸 경영대학원장을 맡다 지난해 4월 산업연구원장으로 선임됐다. 산업연구원이 정부의 산업정책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만큼 향후 그의 역할에 관심이 쏠린다.

현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도 학현학파 인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에 이어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경제정책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대접받는다.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그는 문재인 대선 후보 선대위 경제민주화위원장을 역임했다. 지난해 8월부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학현학파 중심 인물로 여전히 시국 관련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좌).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코드 인사 논란을 빚은 강신욱 통계청장(우).

학현학파 중심 인물로 여전히 시국 관련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좌).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코드 인사 논란을 빚은 강신욱 통계청장(우).

▶학현학파 실체 있나

▷DJ·참여정부 시절부터 요직 차지

학현학파가 주목받는 이유는 현 정부의 경제사상·철학의 근간을 제시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사실상 수행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아서다.

학현학파가 부각된 역사는 사실 꽤 오래됐다.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학현학파 출신들이 정부 요직에 올랐다는 소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제학계에서는 학현학파 핵심 인물로 변 교수가 개인적으로 만든 학현연구실 제자 출신을 꼽는다. 변 교수는 1980년 5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해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뒤 서울 광화문에 개인 연구실인 학현연구실을 열었다. 당초 계량경제학자였던 변 교수는 해직 기간 동안 정치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관심을 넓혔다.

당시 학현연구실 출신으로 변 교수 아래에서 수학했던 강철규 전 우석대 총장은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규제개혁위원장, 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위원장,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며 대표적인 학현학파로 떠올랐다.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이진순 숭실대 명예교수(당시 한국개발연구원장), 윤원배 숙명여대 명예교수(당시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도 이 시절 학파 일원으로 인식됐다.

김태동 교수는 지금도 정부 정책에 뚜렷한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그는 지난해 말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주제의 경제시국 토론회에서 “문재인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깃발을 잘 들었다. 세습 재벌 총수를 대변하는 수구 세력의 아우성에 겁먹지 말고 더 철저하게 추진하라”고 강조했다.

이어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인 ‘J노믹스’ 중 공정한 경제를 이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을 이끌고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사기극과는 차별화한 혁신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현연구실은 1984년 9월 변 교수 복직을 계기로 정식 연구 공간으로 출범했다. 이후 1993년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진보경제학자 요람이 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학현연구실을 확대 개편한 서울사회경제연구소 회원을 ‘범(凡)학현학파’로 분류한다.

지금도 변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서울사회경제연구소는 학현연구실이 모체다. 문재인정부 대표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제안하며 명실상부한 정부의 싱크탱크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한상범 경기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해 말 서울사회경제연구소 간담회에서 ‘소득주도성장-소비와 투자의 선순환 모색’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나원준 경북대 교수가 ‘소득주도성장 정책 1년 평가’ 등을 진행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인 변형윤 교수는 가끔씩 연구소에 출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MB정부, 박근혜정부로 이어지면서 학현학파는 차츰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대신 성장정책을 강조해온 서강학파가 전면에 등장했다. 김광두 원장을 필두로 한 서강학파는 박정희정부 시절부터 성장을 중시하며 정부의 수출 주도, 중화학공업 중심 정책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이후 분배 중심의 경제정책이 부각되면서 서강학파 대신 학현학파 영향력이 다시 커지는 모습이다.

학현연구실이 확대 개편된 곳으로 여전히 변형윤 명예교수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

학현연구실이 확대 개편된 곳으로 여전히 변형윤 명예교수가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

▶학현학파 명과 암

▷강신욱 통계청장 코드 인사 논란 빚기도

문재인정부에서 학현학파가 부상하자 공과를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며 여러 뒷말도 뒤따른다.

일단 경제학 전공자 사이에서는 의미 있는 정책 대안을 일찌감치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학현학파가 경제학계에 세운 공이 상당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지난 박근혜 정권은 물론 여야를 막론하고 추진했던 ‘경제민주화’ 정책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 정책은 학현학파에 사상적 지분이 상당히 있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실제 변 교수가 1992년 3월 서울대 교수 정년퇴임 기념으로 그의 제자들과 펴낸 공동 논문집 제목이 ‘경제민주화의 길’이었다. 박근혜정부 출범 전후로 김종인 당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이 이 개념을 주창했던 시기와 비교하면 훨씬 이전부터 학현학파가 체계적인 연구를 했던 셈이다.

다만 한편에서는 이념성이 너무 강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학현학파가 이념 편향성 혹은 정부 입맛에 맞는 논리 개발에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다.

강신욱 통계청장 내정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황수경 전 통계청장은 지난해 2분기 소득분배지표가 악화됐다는 통계를 내놓은 후 전격 경질됐다. 후임으로 강신욱 청장이 내정됐는데 그는 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일하며 소득 불평등과 빈곤에 대해 연구했다.

이와 관련 일부 학계와 야당에서는 “정권 입맛에 맞는 통계를 만들기 위해서 코드 인사가 내정됐다”고 주장,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현학파 출신으로 분류되는 것을 적극 부인하는 교수, 학자가 속속 나오기도 한다. 한 사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학사를 전공하다 보니 진보경제학 관련 논문을 많이 써왔는데 그것만으로 학현학파 인사로 분류했더라. 이런 이념적 프레임 속에 가둬놓으려는 분위기를 경계한다”고 말했다.

학현학파 요람으로 불리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김용복 수석연구원도 “변 교수 스스로가 학현학파라는 실체가 없다고 선언했는데도 연구소를 정치 세력처럼 해석하는 분위기가 있어 조심스럽다. 중립적인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만큼 애초 설립 취지를 곡해하려는 시각이 부담스럽다”며 우려를 표했다.

[김경민 기자 kmkim@mk.co.kr,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2호 (2019.04.03~2019.04.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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