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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uru in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울루루에 나를 날리고, 너는 너만의 시간을 살아 줘!’

입력 : 
2019-03-27 17: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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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한가운데 위치한 이 바위산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은 이 바위산을 세상의 배꼽인 ‘울루루Uluru’라 부르고, 1872년 영국인 어니스트 자일스는 이 바위산을 발견하고 존경과 아첨의 마음을 담아 호주 수상 헨리 에어즈의 이름을 따 ‘에어즈 록Ayers Rock’이라 불렀다.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 일본인들은 울루루를 이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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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의 성지에서 사랑의 성지로

오스트레일리아, 그 땅 한가운데에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울루루다. 사실 이 바위는 산으로 불러야 한다. 높이 348m, 둘레 9.4km에 이른다. 그런데 이 덩치도 본체의 일부분이다. 지상에 노출된 크기보다 세 배나 큰 덩어리는 땅에 묻혀 있다. 이 바위산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살 만한 지역인 앨리스스프링스까지는 무려 340km를 가야 한다. 즉 사방에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를 달고 있지 않은 이 바위산은 약 5억 년 전 지구의 지각 운동에 의해 땅 밑에 있던 것이 솟아올랐다. 그때부터 이 바위산은 바람과 햇빛에 단련되었다. 울루루는 바람을 타고 거세게 달려오는 모래에 연마되었다. 파이고 무른 부분은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의 모습이 완성된 것이다. 원주민들은 울루루를 경배했다. 그들은 울루루를 ‘세상의 배꼽’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제사도 지내고, 죽은 이의 넋을 하늘로 보냈다.

그들에게 울루루는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관장하는 신성함, 그 자체였다. 원주민들은 이 사막 한가운데 바위산의 존재감만으로도 또한 해가 뜨고 지면서 온몸의 색을 변화무쌍하게 드러내는 찬란함을 경배했다. 새벽, 붉은 기를 안고 해가 뜨면 울루루는 커다란 불이 된다. 그리고 뜨거움이 극에 달하는 한낮에 되면 울루루는 마치 데인 것처럼 검붉은색을 내며 주변을 압도하고 해가 지면 짙은 갈색의 속살을 드러낸다. 자연의 은혜로 삶을 영유하던 원주민에게 울루루는 마치 ‘신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바위산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은 이 바위산을 세상의 배꼽인 ‘울루루Uluru’라 부르고, 영국인 어니스트 자일스는 이 바위산을 발견하고 호주 수상 헨리 에어즈Henry Ayers의 이름을 따 ‘에어즈 록Ayers Rock’이라 불렀다. 또 다른 이름으로 일본인들은 울루루를 이렇게 부른다. 바로 ‘세상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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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츄타국립공원(사진 호주관광청)
1년에 약 100만 명의 관광객이 울루루를 찾는다. 물론 모두 울루루의 정상을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일본인, 특히 연인들에게 울루루 정상은 그들의 사랑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곳이다. 연인들은 험난한 바위산을 오른다. 그리고 정상에서 껴안고 그들은 외친다. “세카츄.” 2003년 일본은 온통 ‘세카츄’ 열풍이었다. 이 ‘세카츄’는 카타야마 쿄이치의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하 『세중사』)를 줄인 말이다. 『세중사』는 비극적이다. 고등학생 사쿠와 아키는 서로에게 첫사랑이다. 아키는 백혈병에 걸려 죽어 간다. 사쿠는 아키에게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이 한탄스럽다. 결혼 사진도 찍고 사랑을 맹세하지만 영원한 이별은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온다. 아키와 사쿠는 워크맨 테이프에 목소리를 담아 마음을 전달한다. 아키는 사쿠에게 소원을 말한다. “세상의 중심인 울루루를 보고 싶다”고. 두 사람은 공항으로 가지만 태풍으로 비행기는 결항되고 아키는 쓰러진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키는 마지막 테이프를 꼬마 리츠코에게 준다. “사쿠에게 전해 줘”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아키는 세상을 떠난다.

『세중사』의 작가 카타야마 쿄이치는 27세 때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그 이후 그가 쓴 책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무명 아닌 무명 작가로 지낸 카타야마 쿄이치는 2001년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한 권의 책을 내놓았다. 그 책이 『세중사』다. 이 달달하고 가슴 시린 청춘 연애 소설은 시장에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유명 여배우 시바사키 코우가 잡지 『다빈치』에 “이 책을 단번에 읽었습니다. 그것도 울면서. 저도 이런 사랑을 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잡지 표지에 시바사키 코우의 말이 헤드 카피로 올라가면서 사람들은 이 책을 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세카츄 열풍’의 시작이었다. 이때가 2002년이다. 2001년 초판 8000부도 다 팔지 못했던 소설은 날개를 달았다. 2003년 100만 부를 넘었고, 2003년에는 무려 300만 부를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일본 문학계의 최고봉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그는 『상실의 시대』로 2003년 6월부터 35주간 판매 1위, 260만 부라는 역대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세중사』는 그것을 단숨에 넘어서며 무려 320만 부나 팔렸다. 그야말로 열풍이었다. 이후 『세중사』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2004년 영화화되었다. 영화 역시 2004년 70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그 해 일본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이 ‘세카츄’ 열풍은 연구 대상이 되었다. 학자들과 언론은 이른바 ‘단카이 세대’, 즉 1970년대생들이 주력 소비층인 30대가 되면서 그들의 ‘10대 시절 향수와 추억’을 소환했다고 분석했다. 즉 사쿠와 아키가 사랑을 주고받는 워크맨, 라디오 심야 방송 등이 그들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 것이다. 물론 사회 현상으로까지 번진 열풍에 비해 『세중사』가 갖는 원형의 힘에 대한 의문과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감성적인 문체, 감정선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이슈 몰이에는 성공했지만 문학적 완성도에서는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것이 평단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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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세중사』로 ‘울루루’를 알게 되었다. 그 뒤 호주에는 울루루를 찾는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 굳건한 바위산에서 자신들의 불멸, 불변의 사랑을 맹세하고, 사쿠를 위로하고 죽은 아키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생각한다. ‘아키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왜 이곳에 오고 싶어 했을까’를. 울루루, 원주민의 성지가 단 한 편의 소설로 한순간에 연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몇 달 후면 울루루의 정상은 인간의 발자국을 허락치 않을 예정이다. 호주 울루루-카타 튜타 국립 공원은 원주민의 성지이며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울루루 정상 등반을 2019년 10월26일부터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등반의 위험성, 이곳 등반을 불편해하는 원주민들의 청원을 들어 ‘신성한 장소’에 대한 예의를 비로소 갖춘 것이다. 울루루는 봉인된다. 사쿠와 아키의 슬프고도 아픈 사랑도, 정상에서 사랑을 맹세했던 수많은 연인들의 굳은 언약도 바위에 새겨진 채로. 그 어떤 것도 아키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마츠모토 사쿠타로(오사와 타카오/고교생 사쿠타로-모리야마 미라이)는 다리가 불편한 약혼녀 후지무라 리츠코(시바사키 코우)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다. 리츠코가 어느 날,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하고는 사쿠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진 것. 사쿠는 친구의 선술집에서 리츠코의 행동을 생각해 보지만 리츠코가 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TV에서는 남쪽 지방에 불어 닥친 태풍 특보가 나온다. 아나운서가 몸을 휘청거리는데 그 뒤로 한 여성이 걸어간다. 자동차가 그 여성 앞에서 급정지한다. 파열음이 들린다. 아나운서도 뒤를 바라본다. 그때, 친구가 소리친다. “사쿠, 저기 리츠코다.” 그렇다. TV화면 속 그 여성은 리츠코였다. 다리를 절며 걸어가는 리츠코. 사쿠는 그곳이 어디인가 금방 알아챈다. 자신의 고향인 시코쿠다. 사쿠는 벌떡 일어나 달린다. 무조건 그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사쿠의 ‘첫사랑’이 있다.

시간은 십수 년 전 사쿠가 고등학생이던 1986년으로 돌아간다. 일본을 이루는 네 개의 섬 중에서 남쪽에 있는 섬 시코쿠의 작은 어촌 마을. 사쿠는 이곳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사쿠는 평범하다. 공부도, 운동도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 오늘은 사토 교장 선생님 추모식이다. 추도사를 읽는 학생 대표는 히로세 아키(나가사와 마사미)다. 그녀는 모든 학생의 우상이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활달한 성격으로 모든 남학생들은 아키를 동경한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학생들은 웅성거리지만 아키는 개의치 않고 추도사를 읽는다.

한 남학생이 사쿠에게 말한다. “아키는 참 의연해. 그치?” 사쿠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사쿠에게 그녀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다.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스쿠터를 타고 집으로 가는 사쿠. 작은 골목길, 계단에 아키가 앉아 사쿠에게 말을 건다. “사쿠, 나 스쿠터 타 보고 싶어.” 사쿠의 허리를 잡은 아키는 신이 나 있다. “아키, 붙지 말고 좀 떨어져.” “왜? 가슴이 붙어?”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된다. 사쿠는 꿈만 같다. 동경하던 아키가 ‘내 여자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키는 라디오 심야 방송을 즐겨 듣는다. 사쿠도 덩달아 심야 방송을 듣는다. 아키는 워크맨 플레이어를 갖고 싶었다. 사쿠는 이를 알지만 사 줄 능력이 안 된다.

심야 방송을 듣던 사쿠의 귀가 쫑긋해진다. 사연을 보내서 당첨되면 워크맨 플레이어를 상품으로 준다는 것. 그날부터 사쿠는 어떤 사연으로 보내면 당첨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사쿠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매일 꾸벅꾸벅 졸면서 라디오를 듣는다. 드디어, 라디오에서 사쿠의 사연이 흘러나온다. “학예회에서 줄리엣 역을 맡은 여자 친구에 대한 사연입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백혈병에 걸려 결국 천국으로 떠나 버렸다는 가슴 아픈 첫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사쿠는 아키에게 워크맨 플레이어를 줄 수 있어 기뻤다. 거짓 사연을 보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음 날, 아키는 사쿠를 차갑게 대한다. 알은척도 안 하고 웃어 주지도 않는다. 사쿠는 아키가 냉담하게 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키는 사쿠에게 테이프를 전달한다. 테이프에는 아키의 말과 마음이 담겨 있다. 사쿠 역시 테이프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아키에게 전달한다. 사쿠는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녹음해 아키에게 전해 주고 아키는 사쿠에게 미소 짓는다.

두 사람은 친구와 함께 마을 앞 무인도에 간다. 세 사람은 무인도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친구는 은근히 사쿠와 아키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피한다. 해변 바위 언덕 위에 아키가 서 있다. 밑에서 쳐다보는 사쿠. 그 순간 아키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놀란 사쿠는 아키에게 달려간다. 정신을 잃은 아키. 사쿠는 빨리 마을로 와 구급차를 불러 아키를 태운다. 출발하는 구급차. 사쿠는 구급차의 뒤를 정신 없이 달려 쫓아간다. 그에게 지금, 그 어떤 것도 아키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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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의 시간을 살아 줘” 아키는 사실 백혈병이다. 죽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사쿠가 심야 방송에 보낸 사연을 듣고 화를 냈던 것이다. 사쿠는 자책한다. 마치 자신 때문에 아키가 병에 걸린 것처럼 경솔한 마음과 거짓말을 후회한다. 아키는 격리 병실에 입원했다. 사쿠는 아키가 보고 싶다. 매일 병원을 찾지만 아키를 만날 수가 없다. 그래도 사쿠는 아키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두 사람은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 심부름을 어린 여자아이가 한다. 그 꼬마 아이는 두 사람의 사랑의 메신저인 것이다. 사쿠는 아키에게 혼인 증명서를 갖고 가 청혼을 하고 결혼 사진을 찍자고 말한다. 사쿠는 턱시도를 입고, 아키는 하얀 면사포를 입고 나란히 선다. 돌아가신 사토 교장 선생님의 첫사랑이던 사진관 할아버지는 두 사람을 위해 멋진 사진을 찍어 준다.

사쿠는 사진으로라도 아키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었다. “아키, 인생이라는 게 하루하루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지금 둘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 아키는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 한다. “사쿠, 나는 거기에 가고 싶어. 호주 원주민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원주민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있어. 바로 울루루야. 난 세상의 중심에 가고 싶어.”

“그래, 아키. 우리 둘이 가자.”

고통스런 투병 생활에 지친 아키. 그녀는 갑자기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한다. 병실에서 나온 아키는 바닷가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사쿠는 아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사정하고, 애원해 아키의 마음을 돌린다. 병실로 돌아온 아키. 조금 진정된 그녀를 보고 사쿠는 생각한다. ‘나는 아직 몰랐다. 믿는다는 건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 몰랐다. 새벽이 있다 해도 눈을 뜨지 않으면 아침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눈을 뜨더라도 새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키!’

병이 깊어지는 아키. 아키는 이제 사쿠를 만날 힘도 없다. 두 사람은 카세트 테이프로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아키는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보고 싶다’고 사쿠에게 말한다. 사쿠는 그 말을 마음에 담는다.

사쿠는 아키가 너무 애처롭고 그런 아키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무엇을 희망이라고 하는 걸까. 무엇을 절망이라고 부르는 걸까. 무엇을 살아 있다는 하는 걸까. 무엇을 죽는다고 하는 걸까.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쿠 역시 서서히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사쿠, 나 울루루를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아키. 두 사람은 공항으로 달려간다. 택시 안, 아키는 힘없이 고개를 사쿠에게 떨군다. “생각났어, 사쿠 생일이 11월3일이지. 내 생일은 10월28일. 그러니까 사쿠가 세상에 태어난 후 내가 없었던 적은 단 1초도 없었어.” 공항. 사쿠는 호주행 비행기 표를 알아본다. 밖에는 사납게 비가 내리고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린다. 태풍이 분 것이다. 사쿠와 아키는 기다린다. 하늘이 파란색이 될 때까지. 하지만 비바람은 더 심해진다. 얼마 후, 야속하게도 공항 안내판에는 모든 비행기가 ‘결항’이라는 표시가 뜬다.

“사쿠, 우리 갈 수 없는 거야?” “아냐, 갈 수 있어. 아키, 기다려 봐.”

사쿠는 공항 직원을 붙잡고 울부짖는다. “오늘 가야 해요. 지금 가야 한다고요. 우리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요.” 아키가 쓰러진다. 사쿠는 아키를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그래, 내가 살아온 날 중에 아키가 없었던 날은 없었다.’ 아키는 모든 힘을 잃었다. 그녀는 이제 죽어 가고 있다. 사쿠는 이제 아키의 얼굴을 볼 수도 없다. 아키는 사키에게 말한다. “내 병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걸 슬퍼하거나, 괴롭다거나, 외롭다거나 생각하는 건 분명히 이해력 부족일 거야. 사쿠, 살아 있다는 건 어떤 걸까. 죽는다는 건 어떤 걸까. 가끔씩은 내가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사쿠는 이제 아키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병실을 찾아온 사쿠는 겨우 일어선 아키를 껴안는다. 아키는 울고 있다. 사쿠는 울음을 참으며 생각한다. ‘이 목소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키가 웃을 수 있다면 나는 평생 웃을 수 없어도 상관없다. 만약, 아키가 울고 싶어 하면 난 평생 울지 않겠어. 만약 아키 대신 죽으라고 한다면 기꺼이 죽어 주겠어.’

아키는 죽기 직전, 테이프에 목소리를 담는다.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에게 마지막 테이프를 부탁한다. “사쿠에게, 부탁해!” 어린 여자 아이는 테이프를 사쿠에게 전달하기 위해 빗속을 달린다.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는 차에 치인다. 테이프가 길에 떨어진다. 그 어린 여자아이는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며 사는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고 충격으로 순간의 기억을 잃어 버렸다. 아키의 마지막 테이프는 결국 사쿠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다시 현재. 리츠코는 이삿짐을 정리하다 테이프를 발견하고 이를 들어 본다. 그리고 기억을 되살린다. ‘그래, 그때 내가 테이프를 전달했어야 했어. 아키의 마지막 목소리였는데….’ 그리고 편지를 남기고 무작정 시코쿠로 떠난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다. 그 어린 여자아이는 리츠코였다. 그리고 리츠코가 테이프를 전달할 주인공은 바로 약혼자 마츠모토 사쿠타로인 것이다. 리츠코는 사쿠에게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린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 이 테이프를 전달해서…. 10년이 더 걸렸어요. 미안해요, 사쿠.” 사쿠는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는 그 테이프를 손에 들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테이프에서는 아키의 마지막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미래의 마츠모토 사쿠타로에게. 사쿠, 난 깨달았어. 행복이란 건 참 단순한 거야. 사쿠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거지. 분명히 그런 하루하루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어제처럼 손을 잡으면서 살 수 있었으면 해. 내가 사쿠의 손을 끌어당기고 사쿠가 우리 아이의 손을 잡고 그런 식으로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해.”

호주의 울루루. 사쿠는 붉은색 바위산의 정상에 선다. 아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키를 생각하며 그녀의 유분을 세상의 중심에 뿌린다. 아키를 느낀다. ‘따뜻함도 느낄 수 없고 무게도 느낄 수 없는 날아갈 듯한 새하얀 가루, 그게 아키였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사쿠는 아키의 음성을 듣는다. ‘사쿠, 내 재를 울루루의 바람 위에 뿌려 줘. 그리고 너는… 너만의 시간을 살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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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날로그의 감수성, 워크맨 영화는 슬프다. 첫사랑, 백혈병, 마지막 소원, 영원한 이별 그리고 소름 돋는 반전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자칫 유치할 수도 있지만 가슴 아픈 사랑은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된다. 도쿄 같은 대도시가 아닌 시코쿠의 작은 어촌 마을. 이 영화의 무대 역시 순수한 사랑을 더욱 진하게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시간은 1986년이다. 21세기적 눈으로 바라보면 1980년대는 그야말로 ‘순수의 아날로그 시대’였다. 영화는 이 사랑과 동의어인 순수의 키워드를 적절하게 사용했다. 라디오 심야 방송, 손 편지 그리고 워크맨 플레이어와 카세트 테이프다. 사쿠와 아키는 카세트 테이프로 사랑을 확인하고 소통한다.

음성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는 듣는 이에게 ‘직접적인 화자話者’가 된다. 그리고 시간의 순차성은 과거와 현재를 묘하게 연결한다. 녹음하는 순간은 현재지만 그 테이프를 재생하는 순간은 과거의 시점이 된다. 이 영화에서 키워드는 두 개다. 하나는 장소로서 호주의 울루루이고 두 번째는 장치로서의 키워드인 워크맨이다. 워크맨의 생일은 1979년 7월1일이다. 워크맨은 이날 시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가격은 3만3000엔, 누구나 갖기 어려운 고가의 제품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였지만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그 뒤 워크맨은 녹음, 재생, 라디오 시청, 이어폰 감상, 음악 플레이어 등등 점차 다양한 기능을 첨가하며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소니는 이 워크맨으로 TV에 이어 전 세계를 장악하는 1위 상품의 명성을 이어 나갔다. ‘비디오가 라디오를 죽였다’는 말처럼 ‘워크맨은 LP를 사라지게 했다’ 할 정도로 워크맨의 위력은 대단했다.

1980년대 워크맨은 일종의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워크맨은 초창기 휴대폰, 자동차 키 등처럼 카페에서 자랑스럽게 테이블에 꺼내 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워크맨의 몰락은 MP3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껏 20여 곡을 담을 수 있는 워크맨이나 그보다 음질이 뛰어나지만 용량에서 큰 차이가 없던 CD 재생 플레이어는 수백 수천 곡을 디지털로 담을 수 있는 MP3가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다. 2001년 애플사의 아이팟의 등장과 함께 사람들은 음악을 재생해서 듣는 방법에서 용량, 음질에서 비교할 수 없는 카세트 테이프를 일고의 주저도 없이 버린 것이다. 이후 음악 재생 시장은 애플 즉 미국 주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쩌면 소니의 전성시대도 워크맨과 함께하다가 워크맨의 퇴장과 함께 쇠퇴기에 접어든 것이다. 즉 아날로그의 마지막 기기이자 도구가 사라진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속에 등장한 워크맨을 보면서 잠시나마 추억에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포토파크, Daum 영화, 호주정부관광청 공식 사이트]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포토파크, Daum 영화, 호주정부관광청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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