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서 미워하는 엄마와 딸, 모녀관계로 그려낸 여성의 역사 <친애하고, 친애하는>

이영경 기자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을 펴낸 소설가 백수린을 지난 6일 서울 마포 서강대학교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모녀 사이의 모순적이고도 복잡한 관계를 그려낸다. 김정근 선임기자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을 펴낸 소설가 백수린을 지난 6일 서울 마포 서강대학교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친애하고, 친애하는>은 ‘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모녀 사이의 모순적이고도 복잡한 관계를 그려낸다. 김정근 선임기자

딸은 엄마를 부정한다. 대부분의 딸은 엄마를 보며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서양과 동양,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며 모녀의 역사는 대부분 이렇게 쓰여졌다. 소설가 백수린(37)의 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현대문학)은 ‘할머니-엄마-나’의 삼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모녀 간의 갈등과 애정, 원망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를 그려낸다.

“박사 논문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소설에 대해서 썼어요. 그의 소설에서 엄마와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어요. 그리고 번역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문맹>에서도 모녀관계가 나왔어요. 모녀관계가 늘 비슷하게 변주되는 게 흥미로웠죠.”

백수린을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불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소설을 쓰는 그는 보부아르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보부아르 같은 유능한 여성들이 처음엔 엄마를 좋아하다가도 아빠의 세계로 넘어가고 엄마의 세계와 단절되더라. 그리고 말년에 화해가 시도되는 이야기가 반복됐다”며 “여성들의 보편적인 서사를 한국식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친애하고, 친애하는>에서 변주되는 모녀의 이야기는 이렇다. 배우지 못한 할머니와 성공지향적 엄마, 그리고 ‘나’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반작용처럼 존재한다. 할머니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무시하고 때론 폭력을 행사했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아는 할머니는 엄마에게 살림 대신 공부를 시킨다.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유학을 떠나고 대학 교수가 되어 사회적 성취를 좇는다. ‘나’는 매사에 확실한 엄마와 달리 갈팡질팡한다.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휴학을 하고 진로도 미래도 불안하기만 하며 ‘엄마를 실망시킬 것’이 두렵다. ‘나’는 엄마의 요구로 말기암인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되고, 할머니를 통해 비로소 엄마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건 ‘엄마’다. 딸과 엄마의 역할을 거부하고 오로지 사회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듯한 엄마는 냉담하기만 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할머니를 통해서 ‘나’는 엄마를 서서히 이해하게 되는데, 삼촌이 사고로 죽자 할머니가 “죽으려면 차라리 네가 죽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말은 엄마에게 평생의 상처와 멍에로 남았을 것이다.

“엄마는 냉정한 게 아니라 서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남성 사회에서 생존하는 법을 습득하면서 그 외의 감정적·정서적 부분 퇴화시킨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죽은 남동생 몫까지 자기가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가졌을 거예요.”

백수린 소설가. 김정근 선임기자

백수린 소설가. 김정근 선임기자

‘나’는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결혼하고 출산을 하지만 뒤늦게 자신의 일을 찾아 ‘일 가정 양립’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배우지 못한 할머니, 성공만을 추구한 엄마, 일과 육아 모두 챙기기 위해 분투하는 ‘나’의 모습은 여성의 사회적 변화를 보여준다. 백수린은 “자칫 주인공이 정상가족 내에서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식으로 여성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타협적 결론으로 읽힐까봐 고민을 많이 했다. 이혼을 시킬까, 혼자 아이를 키우게 할까 고민했지만 소설 속 인물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설은 할머니 세대부터 ‘나’로 이어지는 다양한 여성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배경처럼 보여준다. “못생긴 여자애들은 뭐든 열심히 하잖아”란 말을 듣고 ‘나’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영혼의 일부가 갉아먹힌 기분이 들었다는 부분, ‘나’의 동아리 동료가 고시 공부를 하면서 “성공하면 미래의 아내 얼굴이 바뀐다”는 농담을 하는 부분 등이 그렇다. 백수린은 “모녀관계가 특수한 관계가 되는 이유는 가부장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녀관계가 왜 서로를 아프게 하는지 이야기하려면 가부장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서사를 더욱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할머니의 자매와도 같은 친구다. 할머니의 성당 친구인 글로리아 할머니는 4·19 시위에 참여했으며, 참여 군중 중 여성이 다수였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백수린은 “모녀서사를 넘어 여성들의 역사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남성 위주로 기술되어 있는 현실에서 여성들의 역사는 사적인 친애의 영역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만의 작은 역사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백수린의 엄마 역시 항상 바쁜 워킹맘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진 여성들은 소수였다. 그런 여성이 남자의 세계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사는 게 외로운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소설을 쓰며 인물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많이 느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백수린은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품 ‘시간의 궤적’에서도 여성들 간의 친밀한 관계와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는 “과거 ‘여류작가’ ‘사적인 소설’ 등의 수식이 붙으며 여성 작가 스스로 검열이 많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검열 없이 여성 스스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성 서사에서 결핍된 부분을 채우는 게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설이 그려내는 모녀 사이의 감정의 파고와 궤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엄마에 대한 감정과 기억을 섬세하게 건드린다. 책장을 덮고 나면 문득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이다. 친애하는 마음을 담아서.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엄마와 딸, 모녀관계로 그려낸 여성의 역사 <친애하고, 친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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