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사벽’ 노포와 ‘초신상’ 핫플레이스가 공존하는 시간 여행지, 창원

창원|김형규 기자
옛 마산의 번화가에 조성된 상상길에는 수십년 된 노포가 즐비하다.

옛 마산의 번화가에 조성된 상상길에는 수십년 된 노포가 즐비하다.

경남 창원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뛰어난 도시다. 공업이 발달했으면서도 주남저수지 같은 천혜의 생태관광지가 있어 매력적인 여행지다. 9년 전 마산·창원·진해시가 합쳐져 통합 창원시로 재탄생하며 볼 만한 곳이 더 많아졌다. 여행지로서 창원을 특징짓는 또 다른 요소는 신구 조화다. 창원에선 수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듯 향수에 젖을 수도 있고, 새로 지은 깔끔한 건물 안에 자리 잡은 트렌디한 놀이공간에서 쾌적한 여가 시간을 즐길 수도 있다. 창원의 대표적인 ‘골목투어’ 여행지를 둘러보고 이달 말 개장하는 새로운 관광지도 미리 살펴보고 왔다.

■ “적어도 50~60년은 돼야 노포”

여정은 옛 마산의 번화가인 창동에 조성된 ‘상상길’에서 시작했다. 입구의 보도블록부터 특이했다. 한국 방문을 원하는 외국인 30만여명 중 선택된 2만3000여명의 이름과 국적을 바닥에 새겨놓았다. 한국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상을 활용한 다양한 조형물이 들어서 있고, 밤이면 알록달록한 조명이 빛나 사진 찍기도 좋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상상길을 걷다 보면 대를 이어 영업해온 오래된 가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동행한 노경국 창원시청 관광정책관은 “30~40년 된 가게들은 흔하고 적어도 50~60년은 돼야 노포 소리를 듣는다”고 설명했다.

고려당 공룡빵. 치즈와 햄, 옥수수 등이 들어갔다.

고려당 공룡빵. 치즈와 햄, 옥수수 등이 들어갔다.

“공룡알 나왔습니다!” 1959년 개업했다는 빵집 ‘고려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원이 커다란 쟁반 가득 빵을 들고 나오며 우렁차게 외쳤다. 공룡알은 치즈와 햄, 옥수수가 들어간 큼지막한 빵이다. 남자 어른도 하나 먹으면 끼니로 충분해 보였다. 속에 치즈가 들은 왕관빵, 새우 분말과 피클이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내는 새우바게트 등 다양한 빵을 점원이 일일이 가위로 잘라주며 시식을 도왔다. 평일 오전 비교적 한산한 거리 풍경과 달리 매장 안은 손님들로 붐볐다. 제빵사 12명이 빵을 만들어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판다고 했다. 대구에서 왔다는 성정화씨(54)는 “어렸을 때 사 먹던 버터빵이 생각나서 들렀다”며 양손 가득 빵봉지를 들고 가게 문을 나섰다.

고려당의 베스트셀러 왕관빵

고려당의 베스트셀러 왕관빵

고려당은 과거 마산 청춘남녀들이 즐겨 찾던 미팅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도 빵집 안에 테이블과 좌석이 여럿 마련돼 있다. 가게 한쪽 벽엔 고려당은 물론 전국의 오래된 빵집 이름들이 개업연도와 함께 연표처럼 나열돼 있다. 한자리를 오래 지키며 지역민과 함께해온 가게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고려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1955년 개업해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서점 ‘학문당’이 있다. 학문당은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전국 경제투어’ 때 들러 “지역 문화예술의 거점으로 끝까지 지켜야 할 곳”이라고 치켜세운 곳이다. 학문당도 고려당처럼 1970~80년대 마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젊은이들의 약속장소였다. 친구를 기다리며 책을 뒤적이던 모습이 흔했으나 이젠 귀하게 됐다.

1955년 처음 문을 열어 반세기 넘게 마산 시민들의 명소로 사랑받은 학문당 서점

1955년 처음 문을 열어 반세기 넘게 마산 시민들의 명소로 사랑받은 학문당 서점

학문당이라는 이름은 창업주의 호 ‘문당’에서 따왔다. 당시로선 드문 3층 건물을 올려 서점을 만들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파격이다. 22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서점을 꾸려온 권화현 대표(61)의 작은 사무실에 들어가 봤다. 책상 앞 창문에 “쪽팔리게 살지 말자”고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무슨 뜻인지 묻자 대뜸 퉁명스러운 반말이 돌아왔다. “요즘 쪽팔리게 사는 놈들이 한둘이가.” 꾹 참고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최근 20년 동안 마산에 서점이 하나도 새로 생긴 게 없다. 이게 안 쪽팔리나.”

서점이 더 생기고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어야 지식·출판 산업도 살고 삶이 풍성해지는 법인데, 지금 우리 사는 꼴이 너무한 것 아니냐는 힐난이었다. 단순히 시대 흐름에서 비켜난 장사꾼의 한탄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서점이 새로 생기기는커녕 있는 것도 다 문을 닫는데… 방법이 없다 아이가.” 권 대표의 자녀들은 서점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책벌레라면 문 닫기 전 학문당 방문을 버킷리스트에 올려야 할 것이다.

학문당 권화현 대표가 책상 앞 창문에 붙여놓은 문구가 인상적이다.

학문당 권화현 대표가 책상 앞 창문에 붙여놓은 문구가 인상적이다.

■ 마산 골목길 ‘뉴질랜드 가정식’

상상길 산책은 자연스럽게 바로 붙어 있는 창동예술촌으로 이어진다.

예술촌은 쇠퇴해가는 마산 원도심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1년부터 창동의 빈 점포 50여개를 지역 문화예술인들에게 창작공간으로 제공하면서 형성됐다. 좁은 골목에 공공미술 작품과 포토존을 설치하고 야외 전시공간도 조성해 문화예술 특화거리로 꾸몄다.

막 문을 연 ‘창동갤러리’에 첫 관람객으로 들어갔다. 마침 창녕 출신 생태사진가 하해룡의 백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저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산과 들을 헤맸을까 싶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쇼팽의 즉흥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선율이 흘렀다.

창동예술촌에는 아기자기 예쁘게 꾸민 카페와 찻집이 많아 산책이 즐겁다.

창동예술촌에는 아기자기 예쁘게 꾸민 카페와 찻집이 많아 산책이 즐겁다.

창동예술촌 곳곳엔 ‘문화창작공작소’와 예술학교, 교육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지역 예술인들이 사진, 공예, 디자인, 조각 등 분야별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도예·금속·유리에서 플라스틱까지 공방 종류도 다양해 선물이나 기념품을 구입하기에도 좋다.

북카페를 겸한 헌책방 ‘영록서점’에서는 레코드와 CD, 카세트테이프 등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들을 함께 팔고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X세대 기자는 ‘X세대 최신가요’라고 쓰인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잠시 즐거운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뉴질랜드 가정식을 내는 카페 ‘리빙앤기빙’

뉴질랜드 가정식을 내는 카페 ‘리빙앤기빙’

창동예술촌 골목은 예쁘게 꾸민 갤러리와 공방, 잡화점, 찻집이 모퉁이마다 튀어나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굳이 길을 찾거나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산책하기 좋았다. 그렇게 걷다 뉴질랜드 가정식을 판매한다는 카페 ‘리빙앤기빙’을 만났다. 가게 안에는 뉴질랜드에서 공수한 민속공예품과 각종 소품들이 빼곡했다. 확장공사 중인 가게 한쪽 벽은 뉴질랜드 신문을 덕지덕지 발라 무심한 듯 독특한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20년 뉴질랜드 이민생활을 마치고 작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조현제 사장(59)은 “뉴질랜드에 살 때 우리가 먹던 것, 애들 도시락 싸주던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 내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고 했다. 메뉴는 감자 샐러드와 에그 베네딕트를 한 접시에 내는 ‘올 블랙스’(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의 애칭)와 키위, 계란, 닭 가슴살을 버무린 샐러드 ‘실버 펀’(뉴질랜드의 상징으로 통하는 양치식물 이름) 두 종류다. 커피를 곁들인 세트 메뉴 가격은 1만원.

■ MLB 부럽지 않은 야구장

창원엔 기존 마산야구장을 대신해 프로야구 NC 다이노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될 ‘창원NC파크’가 오는 18일 개장한다. 지난 7일 들른 새 야구장은 이미 공사를 마치고 내부 단장이 한창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장처럼 경기장 어디서나 필드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볼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실제로 구장 곳곳을 도는 동안 녹색 잔디가 깔린 그라운드로 향한 시야가 시원했다. 경사도 12.1도의 완만한 기울기로 그라운드와 최대한 가깝게 배치했다는 관람석은 70% 이상이 내야를 관람할 수 있는데, 실제 앉아보니 경기 몰입도가 기존 야구장과 확연히 다를 거라는 게 느껴졌다.

이달 18일 개장하는 창원NC파크의 테이블석

이달 18일 개장하는 창원NC파크의 테이블석

총 사업비 1270억원을 들인 새 야구장은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에 2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내야엔 테이블석, 외야엔 잔디관람석이 있고 경기장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32개의 스카이박스에선 각종 모임이나 비즈니스 미팅도 할 수 있다.

중계석에서 바라본 창원NC파크. 2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전체 관람석의 70%는 내야 관람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중계석에서 바라본 창원NC파크. 2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전체 관람석의 70%는 내야 관람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프로야구 경기는 1년에 72번 열리지만, 창원시는 경기가 없는 나머지 293일도 항상 개방하는 ‘연중무휴’ 놀이공간으로 야구장을 운영할 계획이다. 경기장 한쪽에는 홈팀 NC 다이노스의 기념품숍과 팬카페, 레스토랑, 야구교실 등이 들어서고 야구장 투어프로그램도 연중 운영될 예정이다.

창원NC파크의 기자실. 야구장 대부분 시설은 이미 시설이 완비돼 올해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창원NC파크의 기자실. 야구장 대부분 시설은 이미 시설이 완비돼 올해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진해해양공원 안에 오는 29일 문 여는 ‘99타워’도 창원의 새 ‘핫플레이스’를 노리는 여행지다. 높이 99m의 타워 꼭대기에는 스카이라운지와 함께 안전줄을 매고 건물 외부로 난 아찔한 난간을 한 바퀴 도는 ‘엣지 워크’와 ‘짚트랙’이 운영된다. 짚트랙은 99타워가 세워진 음지도에서 맞은편 소쿠리섬까지 1.2㎞ 거리를 줄을 타고 내려가는 공중하강 체험시설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 체험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처음엔 실망했다가 막상 99타워 꼭대기 출발지점에 오르고 보니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남다른 스릴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볼 만한 곳이다.

99타워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소쿠리섬. 이달 말 ‘짚트랙’이 개장하면 밧줄에 매달려 맞은편 소쿠리섬까지 1.2㎞를 하강하는 스릴있는 모험을 즐길 수 있게 된다.

99타워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소쿠리섬. 이달 말 ‘짚트랙’이 개장하면 밧줄에 매달려 맞은편 소쿠리섬까지 1.2㎞를 하강하는 스릴있는 모험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잘 가꾼 여행지를 선호한다면 들를 만한 곳이 창원에 한 곳 더 있다. ‘진해보타닉뮤지엄’은 2017년 봄 문을 연 경남 최초의 사립수목원이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가정주부였던 김영수 대표(57)는 우연히 아이슬란드에 여행을 갔다가 사람들이 몰리는 수목원을 보고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3만3000여㎡(1만평) 부지의 수목원을 열었다. 진해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복산 중턱에 위치한 이곳의 온실과 야외 정원에선 1000여종의 나무가 사철 꽃을 피운다. 지금은 노란 풍년화와 분홍 만병초, 푸른 물망초, 하얀 변산바람꽃이 새초롬한 꽃망울을 막 터뜨린 참이다.

진해보타닉뮤지엄의 온실엔 사철 야생화가 꽃을 피운다.

진해보타닉뮤지엄의 온실엔 사철 야생화가 꽃을 피운다.

진해보타닉뮤지엄 이끼정원에 핀 변산바람꽃

진해보타닉뮤지엄 이끼정원에 핀 변산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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