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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REPORT] 제2차 美·北 정상회담 결렬이 남긴 것-패만 보여주고 빈손, 김정은 ‘하노이 100시간’

  • 신헌철 기자
  • 입력 : 2019.03.11 11:37:26
지난 2월 28일 밤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을 둘러싼 밤공기는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2차 미북정상회담이 예상 밖 결렬로 끝난 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숙소인 멜리아호텔로 향했다. 식당을 예약했다고 하니 별다른 검문도 없이 호텔로 안내됐다. 진을 쳤던 기자와 경호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적막한 호텔은 북한이 다시 마주한 현실을 상징하는 듯했다.

22층 숙소에 칩거한 김 위원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한은 회담 결렬 불과 몇 시간 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을 내세워 미국 측이 설명한 결렬 원인을 반박하는 심야 기자회견을 했다. 양측 주장을 종합해보니 하노이 회담 테이블에서 오간 대화의 윤곽이 드러났다.

회담이 결렬된 가장 큰 원인은 첫 거래에서 각자가 내놓은 물건값에 대한 현격한 인식 차였다.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의 가치를 100원으로 매겼다. 그리고 유엔 제재 전체를 무력화하는 ‘5개 결의안 해제’를 대가로 요구하는 초강수를 뒀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영변에 30원만 매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연락사무소 개소 등 관계 개선 조치 정도면 충분한 대가라고 응수했다. 제재 완화는 안 되지만 ‘예외’라도 얻어가려면 영변에다 하나를 더 얹어 팔라고 요구했다.

김 위원장이 이를 거부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북한이 원하는 거래 방식 자체를 흔들었다. 여러 번 거래를 반복할 게 아니라 한 번에 ‘빅딜’을 하자는 역제안을 꺼냈다. 북한이 보유한 핵, 미사일, 생화학무기까지 모든 대량살상무기(WMD)를 폐기할 것을 확약하라는 압박이었다. 대가는 어음으로 주겠다고 했다.

▶예상 밖 결렬…北 핵보유 전략 확인

정치 레토릭 걷어낸 효과는 긍정적

하노이 회담 결렬은 결국 김 위원장의 정세 오판, 그리고 판을 깨도 손해 볼 게 없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배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마음이 급한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을 100원에 덜컥 사줄 것이란 기대는 명백한 착각이었다.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외교안보수석)은 “북측은 영변 핵시설만 폐기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핵물질을 계속 더 만들 속셈이었는데 이번에 차단된 것”이라며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는 한미연합훈련 중단의 가치도 안 된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능력은 미래핵, 과거핵, 그리고 현재핵으로 나뉜다. 영변이 현재핵과 미래핵의 중심인 것은 맞지만 전체 대량살상무기로 보면 비중은 적다. 북측 제안을 수용했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이 아니라 거래에 처음 나선 초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은 실무협상에서보다 정상회담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 믿는 실수를 저질렀다”며 “미국인은 말보다 행동을 믿는다는 점도 인식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웃으며 김 위원장 손을 잡고 “그래도 도발은 안 할 거지”라며 회담장을 떠났다. 북한은 협상 지렛대는 잃고 전략은 모두 노출한 셈이 됐다. 비핵화를 최대한 늦추거나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남으려는 속내가 드러났다. 김 위원장이 베트남에 머문 100시간, 그리고 평양부터 하노이까지 왕복 130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앞으로가 문제다. 핵·미사일 실험이 없는 상황은 당분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허들을 다시 높여버렸고, 김 위원장은 자포자기할 수 있다. 미국은 리비아식 핵협상으로 돌아가 압박 수위를 더욱 높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내적으로도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면서 대안 없는 비판이 소모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물론 ‘진실의 순간’을 마주한 것은 성과라면 성과다. 사랑이니 친구니 하는 허황된 ‘레토릭(수사)’을 걷어내자 양측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명확해졌다. 아울러 청와대의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내포한 한계점도 더욱 명확해졌다. 조급증을 버리고 멀리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다. 돌아가면 힘이 더 들겠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워싱턴 = 신헌철 특파원 honzul@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99호 (2019.03.13~2019.03.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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