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끼리 다 해먹는, 미친 듯이 시끄럽고 통쾌한 왕실 풍자극

이로사 칼럼니스트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는 그동안 영화판에서 보지 못했던 독특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18세기 초 영국을 통치한 여왕인 주인공 앤(올리비아 콜먼) 외에 그의 오른팔 사라(레이철 바이스)와 시녀 출신으로 왕실의 주요 직책으로 신분이 점프한 애비게일(에마 스톤)이 그 주인공이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는 그동안 영화판에서 보지 못했던 독특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18세기 초 영국을 통치한 여왕인 주인공 앤(올리비아 콜먼) 외에 그의 오른팔 사라(레이철 바이스)와 시녀 출신으로 왕실의 주요 직책으로 신분이 점프한 애비게일(에마 스톤)이 그 주인공이다.

18세기 초 영국 왕실이 배경
실존 세 여성을 등장시키나,
역사는 배경으로만 나타나고
셋의 묘한 삼각관계를 그려

여왕은 무능하고 불안정하며
사라는 왕의 연인이자 심복
시녀 애비게일의 욕망이 가세
우아함 뒤에 숨은 ‘개싸움

남성을 노리개로 등장시키고
관객들은 찡그린 채 웃게 되나
각본 완성에 만 9년 걸린 작품
여성영화 팬들은 만족할 만

여왕은 미친년이고, 여왕의 여자들도 거의 미친년들이다. 그들은 제각각 미친 채로, 전에 없이 멋있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주인공인 세 여성은 영화판에 거의 없던 희귀한 인물들이다. 주체적인 여성이고 뭐고, 그들은 올바르지 않다. 못되고 추잡하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고 시끄럽고 불경하며 미칠 듯이 격렬하게 욕망에 가득 차 있다.

[이로사의 신콜렉터]여자끼리 다 해먹는, 미친 듯이 시끄럽고 통쾌한 왕실 풍자극

<더 페이버릿>은 18세기 초 영국 왕실의 궁중 암투극을 소재로 가져온 영화다. 우리에게 익숙한 궁중 암투극은 대체로 남성들의 권력 잡기 놀음이다.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라 해도 그들은 대개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남성의 총애를 받고자 싸운다.

<더 페이버릿>이 주는 극단의 쾌감은 이 관습적 구도를 수차례 뒤집고 이상하게 뒤섞는 데서 온다. 영화는 젠더 간 권력관계를 뒤집고(혹은 마구 휘저어 버리고), 뒤집힌 구도의 주인공들을 외따로 떨어진 기이한 세계에 가져다 놓는다. 영화 속 왕실은 관습을 벗어난 혼돈의 장소다. 왕실 안의 사람들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우며, 주인공들은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경계를 모르고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는다. 각기 매력적인 세 여자 주인공은 화려하고 야단스럽게 마련된 이 기괴한 멍석 위에서 본격적으로 놀아난다. 정치적 욕망부터 내밀한 치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들끼리 판을 짜고 싸우고 날뛰고 다 해먹는다. 거기서 남성들은 거의 아무런 중요성이 없는 부차적인 존재다.

[이로사의 신콜렉터]여자끼리 다 해먹는, 미친 듯이 시끄럽고 통쾌한 왕실 풍자극

미친 여성 트리오의 익살극

주인공 앤(올리비아 콜먼)은 실제로 18세기 초 영국을 통치한 여왕이다. 그의 오른팔이었던 사라(레이철 바이스)와 시녀에서 영국 왕실의 주요 직책까지 신분 상승을 한 애비게일(에마 스톤)도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다. 그러나 <더 페이버릿>은 역사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배경으로만 모호하게 존재한다.

두드러지는 것은 왕실이란 기괴한 세계 안에 놓인 세 여자의 삼각관계다. 이들은 선도 악도 아니고 제각각 복잡한 심리를 가진 인물들이다. 영화 속 왕실은 여왕인 앤과 그의 심복인 사라가 지배하고 있다. 앤은 대제국의 통치자이지만 무능력하고 불안정한 인물이다. 그는 아이처럼 관심과 사랑에 굶주린 채 과거 자식을 잃은 슬픔을 토끼 17마리를 키우는 것으로 달래고 있으며, 신경증, 통풍, 섭식장애 등 각종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사라는 앤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그의 연인이자 심복이다. 여기에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려는 욕망으로 무장한 새로운 시녀 애비게일이 들어오게 되면서, 앤의 총애를 얻기 위한 사라와 애비게일의 무한 투쟁이 시작된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 숨차게 음모와 계략을 주고받는다. 이들의 투쟁은 왕실의 우아한 언어를 빌리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비열한 개싸움에 가깝다. 국가권력의 핵심 장소에서 여성들이 벌이는 사적이고 외설적인 언행은 부조리하고 통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들은 전쟁과 세금을 논하는 가운데 파티와 스타킹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제국의 통치자인 여왕이 외설적인 말들(“네가 너무 맛있어 보여” “쟤가 입으로 해주는 게 너무 좋거든”)을 마구 내뱉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목을 조르고 뺨을 후려치고 내동댕이치고 격렬히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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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영화는 그간 남성 서사가 주된 영화를 보는 것이 지루했다는 듯, 관습에서 벗어난 여성 캐릭터를 갈구하는 팬들의 ‘짤’로 유용히 쓰일 법한 수많은 근사한 장면들을 선보인다. 사라와 애비게일이 태연하고 험하게 말을 타는 모든 장면, 둘의 파워게임을 근사한 대사와 함께 상징적으로 담아낸 총 쏘는 장면들, 귀족 남성에게 “마스카라 번졌네요. 화장이나 고치고 오세요”라고 말하는 장면. 특히 애비게일이 특유의 장난스러운 태도로 남성을 거칠게 대하는 모든 장면이 인상적이다. 애비게일은 신분 상승을 위해 마샴(조 앨윈)과 결혼하지만 매번 그의 우스꽝스러운 성적 유혹을 무시한 채 오직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의 일에만 관심을 둔다(“사내새끼가 어디 감히 여자를 놀려!” “쉬이이잇! 내가 중요한 걸 생각할 때는 조용히 하고 있어”).

반면 영화 속 남성들은 주로 왕실의 과장되고 화려한 우스꽝스러움을 보여줄 때 등장한다. 그들은 대체로 예쁜 멍청이들이다. 그들은 우아한 클래식 곡으로 채워진 궁중 장면에서 뽀글머리 가발과 하이힐, 프릴이 잔뜩 달린 옷차림으로 빨간 볼연지와 펭귄 입술의 과잉된 화장을 한 채 수박씨 같은 커다란 점을 멋으로 붙이고 등장한다. 그들은 그런 차림으로 “남자는 언제나 예뻐 보여야 해”라고 말하고, 왕실 안에서 오리 달리기 시합에 열을 올리거나 벌거벗은 사람에게 과일을 집어던지며 노는 시끄러운 유희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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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한 가짜 디스토피아에서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무미건조하고 괴이한 가짜 디스토피아를 즐겨 그리는 작가다. 전작 <송곳니>(2009)에는 아이 셋을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킨 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양육하는 변태적인 부모가 등장하며, <더 랍스터>(2015)는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할 운명에 처한 이들이 모여 있는 커플 메이킹 호텔이 그 배경이었다. 최근작 <킬링 디어>(2017)의 주인공 외과의사는 수술 중 의료사고로 사망한 환자의 아들로부터 ‘우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신의 가족 중 하나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하나의 기이한 의례와 법칙을 가진 부조리한 시스템에 갇혀 있다. 그 세계는 끔찍하지만 우스꽝스럽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그 덫에 걸린 인간들에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관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다가 찡그린 채 차갑게 웃게 된다.

<더 페이버릿>의 18세기 왕실은 란티모스의 미학을 실현하기에 꽤 적절한 장소다. 왕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장식과 치장, 귀족들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감독은 로 앵글과 광각 렌즈 등 극단적인 카메라로 이곳의 거대한 규모와 화려함을 왜곡해 비춘다. 그것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다른 차원에 외따로 떨어진 이상한 감옥에 갇혀 짓눌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만 <더 페이버릿>의 인물들은 과거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만큼 무력하지는 않다. 거의 신이 지구를 내려다보듯 인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던 카메라는 좀 더 인물들 가까이에 붙었고, 관객은 한결 인물의 내면에 이입하기 쉬워졌다. 그들은 동일하게 한정된 세계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야단을 피우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다니고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은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과거 그의 영화들이 그랬듯 결국 복잡하고 모순된 다면체인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로 나아간다. <더 페이버릿>은 각본을 완성하는 데만 9년이 걸렸고, 이 때문에 수많은 다른 판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란티모스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는 언제나 3명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그것은 기존의 영화판에서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이고, 바로 그 점이 그를 이 프로젝트로 이끈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9년 만에 완성된 영화는 비관습적 여성 영화를 고대해 온 이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로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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