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 만들고, 샛길로 샐 것…이런 여행법이 필연 같은 우연 만들어내요

정지혜 사적인서점 대표·북디렉터

우연한 산보

쿠스미 마사유키 글·타니구치 지로 그림

한나리 옮김 | 미우 | 100쪽 | 7500원

[책 처방해 드립니다]빈칸 만들고, 샛길로 샐 것…이런 여행법이 필연 같은 우연 만들어내요

사적인서점을 열기 전의 일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교토와 도쿄의 책방을 둘러보고 올 계획이었지요. 그런데 출발을 앞두고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최대한 많은 서점을 돌아보는 시험 같은 게 아닌데, 하나라도 더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안달이 났던 탓입니다.

마음의 끈을 고쳐매려고 <우연한 산보>를 꺼내 읽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쿠스미 마사유키(글)와 타니구치 지로(그림) 콤비의 작품이지요. 문구회사에 근무하는 중견 영업사원인 우에노하라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도쿄의 골목골목을 산책하게 되고, 그 여정 속에서 마음에 담은 일상의 풍경들이 녹아 있는 ‘고독한 산책가’의 이야기입니다.

쿠스미 마사유키는 스토리 취재를 하면서 세 가지 규칙을 세웠습니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하지 않을 것. 그때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적극적으로 샛길로 샐 것. 시간제한을 두지 않고 느긋하게 걸을 것. ‘무엇을 할까’가 아닌 ‘어떻게 할까’의 여행법인 셈이지요.

책을 읽고 저 또한 고독한 산책가가 되어보기로 했습니다. 미리 준비한 만큼 보고 오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처음으로 일정표를 빈칸으로 둔 채 떠난 여행이었지요.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간이 지체돼 원래 가려던 목적지를 놓친 날도 비일비재. 그렇지만 쿠스미 마사유키의 말처럼 ‘산책이란 우아한 헛걸음’이 아니던가요.

[책 처방해 드립니다]빈칸 만들고, 샛길로 샐 것…이런 여행법이 필연 같은 우연 만들어내요

그러다 제게도 <우연한 산보>에 나올 법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화를 하며 걷다 원래 경로와는 다른 길로 들어선 참이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가게의 외관에 반해 멈춰 섰고, 슬쩍 들여다보니 앤티크 숍 같더군요. 가게 안을 살피는데 한편에 작은 서가가 보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책을 발견하고 놀란 저는 명함을 건네며 책방여행 중이라 말했고, 가게 주인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책 몇 권을 계산하려다 카운터에서 다람쥐 조각상을 발견했습니다. 파는 물건 같지는 않아 제 명함에 그려진 다람쥐를 가리키며 실은 다람쥐를 좋아해 관련된 책이나 물건을 수집하고 있다 말하고는 혹시 살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쭈었어요. 가게 주인은 고민하다 가격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문의를 받았지만 소장품이라 거절해왔다면서, 왠지 내게는 팔아도 될 것 같다며 웃어주었습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한눈팔지 않고 갔다면,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명함을 건네지 않았다면, 다람쥐 조각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니, 애초에 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연한 산보가 만든 필연한 선물에 감사하며, 언젠가 책방을 열게 되면 카운터에 두려고 다람쥐 조각상을 구입했습니다. 물론 그 조각상은 몇 년 뒤 사적인서점의 마스코트가 되었고요. ‘걷다 보면 반드시 재미있는 가게나 물건이 나오는, 자기 스스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골목’은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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