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다음’을 맞이하는 혼란의 순간들

이영경 기자

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민음사 | 328쪽 | 1만2000원

[책과 삶]‘다음’을 맞이하는 혼란의 순간들

신인작가 김세희(32)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을 읽다보면, 방 한구석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입사용 자기소개서나 대학 시절 읽었던 책 귀퉁이에 남겨놓은 흔적을 발견한 기분이 든다. 혼란과 동요, 들뜬 열의와 그에 수반되는 좌절 속에 통과해왔던 한 시절의 흔적을 불시에 마주한 느낌. 그런데 얼굴이 화끈거리진 않는다. 다만 그 시절 겪었을 감정의 파문들이 다시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가만한 나날>은 삶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마주치는 ‘첫 순간’에 대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수록된 8편의 소설들은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연인에서 결혼이라는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의 설렘과 불안 등 청년세대의 자화상을 적확하게 그려낸다. 소설 속 ‘청년’들의 이야기가 실감나는 것은 기성세대에 의해 대상화된 청년의 모습이 아닌 지금, 여기의 고민과 목소리들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 스스로 이 시절을 막 빠져나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세희는 “소설을 쓰는 동안 스물아홉에서 서른둘이 되었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 소설을 쓰고 있었기에 그 모든 순간에 나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표제작 ‘가만한 나날’은 사회 초년생이 겪는 혼란과 좌절을 사회 시스템과 결부시켜 그려낸 작품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모티프로 대형 포털사이트의 정보 독점과 상업주의, 도덕불감증에 걸린 기성세대의 모습을 엮어서 그려냈다. 지난해 화제작이었던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 판교 테크노밸리에서 벌어지는 직장인의 애환을 실감나고 재치있게 다뤘다면, <가만한 나날>이 그려내는 사회 초년생의 자화상과 고민은 조금 더 묵직하다.

주인공 경진은 마케팅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다. 대형 포털사이트 블로그에 상품 후기를 남겨, 검색 상단에 노출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은 경진의 적성에 꼭 맞았다. 경진은 좋아하는 책 주인공의 이름을 따 ‘채털리 부인’이란 이름으로 블로그를 운영한다. “이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았고, 내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 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며 일의 기쁨을 느끼는 경진은 도태되는 동료를 보고 은근히 기뻐하고, 자신의 블로그가 포털로부터 ‘저품질’ 평가를 받자 상실감을 느낄 만큼 일에 몰입하기도 한다. 사회와 직장이 시키는 대로 일을 열심히 해왔을 뿐인 경진에게 의외의 사건이 발생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뿌리는 살균제 사건이 터지고,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 ‘채털리 부인’에게 쪽지를 보낸다. 블로그 후기를 보고 그 제품을 샀다가 아이와 자신 모두 피해를 입었노라고, ‘채털리 부인’은 괜찮은지 안위를 묻는 쪽지였다. 목에 호스를 연결하고 있는 사람의 사진을 보며 경진은 멍해진다. 자신의 선의와 열정과 상관없이, 시스템 안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자신이 시스템과 분리될 수 없다는 깨달음 속에 경진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소설가 김세희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은 연애, 취업, 결혼 등에 직면한 사회 초년생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세희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낯선 일을 겪을 때 겁이 많고 혼란스러운 걸 싫어하는데 문학을 통해 변화를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며 “내 작품도 독자들에게 그렇게 읽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봉곤

소설가 김세희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은 연애, 취업, 결혼 등에 직면한 사회 초년생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세희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낯선 일을 겪을 때 겁이 많고 혼란스러운 걸 싫어하는데 문학을 통해 변화를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며 “내 작품도 독자들에게 그렇게 읽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봉곤

입사 초년생의 이야기가 소설집의 한 축이라면 다른 축은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는 연인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연애-결혼-출산’이라는 기존의 루트를 답습하지 않는다. ‘비비탄’(비혼 비출산 탄탄대로)이란 말이 유행하는 초저출산 시대,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오히려 회피와 유예의 대상이거나 경제적 이유로 선택하는 수단이 된다. ‘현기증’은 동거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의 이유가 경제적 문제를 해소하는 수단이 되고, ‘동거’라는 삶의 양식이 여성에게 차별적으로 작동하는 지점을 그려낸다. 원희와 상률은 원룸에서 수년째 동거하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운다. 집을 보러 다니면서 ‘신혼부부’라고 거짓말을 하고, 값싼 중고가전을 들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원희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며 ‘현기증’을 느낀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원희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건 엄마다. 수시로 전화를 하는 엄마는 홀로 사는 여성들에 대한 편견, 혼전 동거가 가족의 망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걱정이란 형태로 원희에게 여과없이 쏟아낸다.

하지만 소설이 희망적인 것은 인물들이 현실을 직시해 현기증을 느낄지언정 기어코 ‘다음’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된 우리는 다른 삶을 꾸려갈 것이다. 지금 혼란의 과정을 통과하는 이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고, 그 순간을 지나와 무감해진 이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혼란의 와중에 있는 이들에겐 ‘다음이 있다’는 위안이 될 것이고, 이미 지나친 이들에겐 잊고 있었던 한 시절과 마음의 무늬들을 상기시켜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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