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인간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가상현실의 위력

홍진수 기자

두렵지만 매력적인

제러미 베일렌슨 지음·백우진 옮김

동아시아 | 352쪽 | 2만원

[책과 삶]인간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가상현실의 위력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의 쓰임새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2009년 영화 <아바타>가 보여준 세상은 여전히 영화 속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세상이 와도 나와는 큰 상관이 없는 게임 속부터 시작할 줄 알았다. 아니다. 가상현실은 이미 우리 앞에, 아니 옆에 와 있다.

저자 제러미 베일렌슨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이자 가상인간상호작용연구소(VHIL) 소장이다. 지난 20년간 가상현실의 심리학, 특히 가상 경험이 자신과 타인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최근 연구는 가상현실이 교육, 환경 보전, 공감, 건강 분야를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한다.

가상현실은 실제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제공한다. 가상현실을 사용할 때, 이용자의 뇌는 실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리적으로 활성화된다. 가상현실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베일렌슨에 따르면 가상현실 체험용 헬멧을 쓰고 가상의 구렁 위 널빤지에 올라간 사람 중 3분의 1은 ‘깊은 구렁으로 발을 디뎌보라’는 말에 따르지 못했다.

가상현실은 실제로도 힘이 세다. 가상현실 속에서 경험한 사건은 인간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주고 결과적으로 행동도 바꾼다. 베일렌슨은 아직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은 가상현실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차근차근 예를 들어 설명한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분야는 스포츠다. 가상현실을 이용하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할 수 있다. 미국 프로풋볼팀 애리조나 카디널스의 쿼터백 카슨 파머는 가상현실을 이용해 경기 중에 발생할 수 있는 250개 상황을 머릿속에 새긴다. 전에는 이런 상황을 플레이북으로 만들어 보고 또 보며 외웠지만 이제는 헤드셋을 켜고 미리 촬영된 훈련 영상을 본다. 그의 시야는 경기 중과 똑같이 재현되고 실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바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미국 유통업체 월마트는 가상현실을 매장 직원 교육에 이용한다. 기존의 훈련 매뉴얼 전체를 가상현실로 만들어 직원들이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월마트는 훈련아카데미 30곳에서 가상현실을 활용한 뒤 성과가 나자 훈련아카데미 200곳 전부에 적용하기로 했다. 짓고 있는 회사 도서관에는 활자로 적힌 매뉴얼과 함께 훈련용 세트도 갖출 예정이다.

지난해 12월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VR 엑스포 2018’에서 관람객들이 건물 내·외관 등을 가상현실 프로그램으로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VR 엑스포 2018’에서 관람객들이 건물 내·외관 등을 가상현실 프로그램으로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가상현실이 기존의 미디어와 현저히 다른 점은 ‘현존감(presense)’이다. 현존감은 ‘그곳에 있는’ 느낌이다. 비디오, 사진, 문자 등 기존 매체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 이 현존감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젊은이가 노인이 될 수도 있다. 노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숙인의 삶을 경험할 수도 있다. 심지어 농장의 가축이 되어 볼 수도 있다. 굳이 ‘육식을 자제합시다’라고 외칠 필요가 없다. 소가 되어 도축까지 당해본 사람이 예전처럼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유엔의 후원을 받아 크리스 밀크가 만든 가상현실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시드라에게 드리운 구름(Clouds over Sidra)>은 가상현실을 이용해 관객과 등장인물의 거리를 없애 버렸다.

이 영화는 관객을 북부 요르단의 자타리 난민캠프 속으로 데려간다. 관객은 캠프 한가운데에 서서 12살 어린이 시드라의 이야기를 듣는다. 뉴스를 통해 들은 난민 8만명은 추상적인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캠프에서 만난 8만명은 현실에 있는 사람이 된다. 밀크는 “전에 다른 미디어 형태에서는 결코 보지 못한 깊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한다”며 “가상현실은 서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가상현실의 순기능만을 이야기하다 보니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두렵지만 매력적인’이다. 폭력 묘사로 악명 높은 비디오게임 ‘GTA’ 시리즈를 가상현실로 체험하도록 개조한 개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것을 만들었다니 소름끼친다. 정말 죄책감을 느낀다.” 또 가상현실이 조작된 경험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매트릭스>가 상상한 디스토피아가 영화 밖으로 펼쳐질 수도 있다.

베일렌슨은 이런 우려를 의식해 책 마지막 장에서 좋은 가상현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첫째, 이것이 가상현실에 있을 필요가 있나 자문해보라. 둘째,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말라. 셋째, 안전하게 하라. 결국 모든 기술은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는 평범한 진리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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