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정치 주무르는 경제학을 향한 신선한 돌직구

정유진 기자

이코노크러시조 얼 외 2명 지음·안철흥 옮김

페이퍼로드 | 308쪽 | 1만6800원

[책과 삶]정치 주무르는 경제학을 향한 신선한 돌직구

신고전학파 독점의 영국 대학
정해진 정답 모형만 가르치는
경제학 수업 방식 낱낱이 고발

비판적·독립적 사고력 키우는
모두를 위한 ‘사회적 학문’ 강조
한국 경제학도들에게도 시사점

이 책의 저자들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성장한 세대이다. 한국의 ‘IMF 세대’처럼 소위 경제 전문가의 정책 탓으로 가장이 실직하고, 집안 자산이 반 토막이 나면서 고통을 받은 아픈 경험이 있다.

‘경제적’ 결정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경제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마주한 경제학은 기대와 너무 달랐다. 이 책은 경제위기를 배태한 원인 제공자임에도 끄떡없이 대학을 독점하고 있는 신고전학파를 향해 날리는 신참 경제학자들의 경고장이다.

저자들은 모두 2010년대에 영국 맨체스터대학에 입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 책의 제목인 ‘이코노크러시’(Econocracy)는 저자들이 만든 신조어이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시민이 통치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를 응용해 만든 이코노크러시는 ‘경제학이 통치하는 사회’를 가리킨다.

이코노크러시의 가장 큰 무기는 일반 사람들이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경제 언어’이다. 시민들은 비용편익, 상호출자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정보에 근거해 민주적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코노크러시에서 시민들의 선택과 참여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최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자국채’ 논란에서도 정작 납세자인 시민들은 용어를 이해하는 것만도 벅차 논의에서 제3자로 밀려나지 않았던가.

이코노크러시는 경제학이 과학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항상 ‘최적화’와 ‘균형’을 들먹이는 신고전학파는 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설계해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비용편익 분석이다. 이들은 모든 복잡한 사회문제를 숫자로 환원해 금전적 가치를 매긴다. 이들이 ‘최적화’를 도출해 내는 수학적 공식에서 인권, 보건, 고용안전은 뒷전으로 밀린다. 저자들은 “경제학은 정치적 논의에 객관적인 판단 근거를 제시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정치를 지배하며 정치의 목표를 교묘하게 수정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이코노크러시의 산실이 돼버린 대학 경제학 수업을 낱낱이 고발한다. 2012년 경제학 교육의 개혁을 요구하며 맨체스터대의 경제학도들과 ‘포스트크래시 경제학회’를 창립한 이들은 맨체스터대와 케임브리지대, 런던정경대 등 러셀그룹(영국 명문대학 리그)에 속한 7개 대학, 174개 전공과목의 수업안내서와 시험문제를 전수조사했다. 그 결과 교과과정의 55%와 시험문제의 48%는 ‘모형’을 다루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완전하게 갖춰진 형태로 하늘에서 떨어진’ 모형 속 경제만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영국 런던정경대의 한 강의실에서 <이코노크러시>의 저자 중 한 명인 카할 모런(오른쪽)이 이 책의 출간을 홍보하면서 ‘경제학계가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쓴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유튜브 캡처

영국 런던정경대의 한 강의실에서 <이코노크러시>의 저자 중 한 명인 카할 모런(오른쪽)이 이 책의 출간을 홍보하면서 ‘경제학계가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쓴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유튜브 캡처

핵심 과목 시험 중에서 비판적인 평가나 독자적인 견해를 묻는 문제는 겨우 8%에 불과했다. 저자들은 “대학 졸업생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자질이 있다면 비판적이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대학의 경제학 수업은 “경제 이슈를 옳고 그름이 분명한 순수한 기계적인 문제로 치환시키면서” 일련의 모형과 수학적 공식을 통해 정해진 ‘정답’을 도출하는 방법만 가르친다.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학생의 토론과 비평이 수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데 비해 경제학은 신고전주의학파 이론들로 채워진 교과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맨큐의 교과서는 7개 대학 모두에서 거시경제학의 ‘경전’처럼 활용되고 있다. 저자들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IS-LM 그래프를 그리는 것밖에 없었는데, 사회학과 학생이 우리보다 오히려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고 말한다.

이들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고전학파가 경제학 교육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함을 지적할 뿐이다. 저자들은 “만약 포스트케인스학파의 금융불안전성 가설 같은 것을 경제학계가 좀 더 진지하게 주목했다면 금융위기에 더 잘 대처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학 현장에서 생태경제학, 마르크스학파, 포스트케인스학파 같은 다른 학파의 경제학 수업은 접할 기회가 없다.

저자들은 경제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하게 ‘모두를 위한 학문’이며, 전문가에게만 맡겨 놓기에는 너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이코노크러시에 대항할 ‘시민경제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쉬운 경제학 강좌를 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이런 논의가 오히려 경제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를 더욱 조장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놓치지 않는다. 사회적 관심이 경제에만 집중되는 상황 자체가 이코노크러시를 탄생시킨 근본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에만 초점이 모아지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경제적 논의들이 일시에 소거되어 버린다. 그래서 저자들은 경제학을 잠시 잊고 민주주의부터 다시 배우자고 말한다. 비경제적 가치와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저자들처럼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경제학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는 학생들은 ‘리싱킹 경제학’이라는 단체를 결성, 국제 네트워크를 형성해 힘을 모으고 있다. 현재 이 단체에 동참한 대학은 전 세계 60여개에 달한다. 아직 한국의 경제학도들에게 이런 움직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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