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 한글이냐 한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임소정 기자

195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오래전 ‘이날’] 2월11일 한글이냐 한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1999년 2월11일 한자병용 논란 확산

한글전용과 한자병용,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쪽에서는 한자를 쓰면 가독성이 떨어지고 아이들에게 과도한 학습 부담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국어에 한자어 비중이 높으니 한자를 써야 뜻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고, 한자를 배우면 아이들의 사고력이 좋아진다고 주장합니다. 해방 이후 한글전용 정책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한자병용 주장입니다.

20년 전 오늘 경향신문은 정부의 “한자병용 확산 방안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정부 부처간의 이견을 넘어 유관단체, 시민에게로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를 1면 스트레이트 기사와 3면 ‘기자메모’, 4면 ‘사설’, 6면 ‘오피니언’ 등 여러 면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1999년 2월11일자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기사. 기사 제목에는 한자를 병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99년 2월11일자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기사. 기사 제목에는 한자를 병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글전용을 주장해온 한글학회·한국바른말연구원 등 4개 단체는 서울 정부 세종로청사 후문에서 한자병용 추진방침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단체들은 “정부는 정보화·세계화를 내세우면서 한글전용법을 폐기하려는 음모를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등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단체들은 “정부의 방침을 환영한다”며 “이를 계기로 한자혼용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은 시민들 사이에서도 찬성과 반대가 엇갈렸는데, 젊은층이 많이 이용하던 PC통신망에서는 한자병용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합니다.

앞서 문화관광부는 “공용문서·도로표지판 등 실생활에 한글·한자 병용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중국·일본 등 한자문화권 국가간의 교류 및 관광객의 증대에 따라 관광지 도로표지 등에 한자표기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와 형태가 다른데도 말이죠.

이에 대해 행정자치부는 “공용문서에 한자를 병용할 경우 정보화 추진과 행정사무에 비능률을 초래하고 정부정책의 일관성도 해치게 된다”고 반발했고, 건설교통부는 “한자 병기를 확대할 경우 운전자의 시계를 어지럽히고 또 표지판 크기를 키우면 도시미관적·재정적 문제가 생긴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았습니다. 정부 부처간에도 엇박자가 나기 시작한 겁니다.

같은 날 3면에 실린 기자메모

같은 날 3면에 실린 기자메모

기자메모에서는 “한자병용 방침은 공교롭게도 정권교체 때마다 느닷없이 터져나왔다”고 지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글전용을 강조했지만 몇 년 후 여론에 밀려 한자병용을 묵인했고, 문민정부 때는 세계화·국제화 바람을 타고 한자병용론이 고개를 들었다고 합니다. 99년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국제교류 활성화’와 ‘관광진흥’을 한자병용 추진의 이유로 들었습니다. “한국을 찾는 전체 관광객의 71%가 한자문화권인 동남아 사람”이라는 것이었죠.

기사는 문화부는 관련 부처와 미리 협의를 거치지 않고 졸속으로 정책을 추진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교육용 한자 재조정 문제를 주무부서인 교육부와 협의하지 않아 ‘월권행위’라 할 만 하다고 꼬집으면서 “국어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세대를 초월한 광범위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도 덧붙입니다.

1999년 2월11일자 오피니언면에는 양쪽 주장을 대표하는 기고들이 실렸습니다. 각자의 주장에 따라 본문은 물론 기고자의 이름까지 한자와 한글로 대비되는 편집이 눈길을 끄네요.

1999년 2월11일자 오피니언면에는 양쪽 주장을 대표하는 기고들이 실렸습니다. 각자의 주장에 따라 본문은 물론 기고자의 이름까지 한자와 한글로 대비되는 편집이 눈길을 끄네요.

덕분에 한자병용 정책은 의약분업 등과 함께 집권 2년차를 맞은 김대중 정부의 국정 난맥상으로 거론되곤 했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한글전용이라는 정부의 어문정책 기본틀은 확고히 고수한다”고 밝혔지만,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측에서 삭발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김종필 총리의 지시로 그해 7월부터 새로 발급되는 주민등록증에 한자 병기를 추진한 일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주민증에 한자를 병기하려니 주민증 발급 프로그램을 새로 수정해야 했고, 이름에 흔치 않은 한자를 쓰는 사람들도 많아서 컴퓨터에 한자 데이터베이스를 확충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갈 판이었습니다.

정부의 한자병용 방침을 둘러싸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글학회와 한국바른말연구원 등 4개 단체 회원들이 광화문 문화관광부 앞길에서 정부방침 철회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정부의 한자병용 방침을 둘러싸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글학회와 한국바른말연구원 등 4개 단체 회원들이 광화문 문화관광부 앞길에서 정부방침 철회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글전용 정책은 광복 이후 1948년 10월 1일에 공포된 <한글전용에관한법률(한글전용법)>에 따라 ‘대한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규정 등을 통해 추진되어 왔습니다. 이 규정에는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부가조건이 붙었는데, ‘얼마 동안’이라는 표현 때문에 진짜 ‘얼마 동안’이나 한자를 병용해야 하느냐는 것이 늘 논쟁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해당 규정은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면서 ‘공공기관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로 살짝 바뀌었습니다. 공공기관의 공문서를 작성할 때 괄호 안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는 경우는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와 ‘어렵거나 낯선 전문어 또는 신조어를 사용하는 경우’로 한정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도로표지판이나 관광지 안내에 한글과 함께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가 등장한 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나 한글전용이냐 한자병용이냐 논쟁은 잊을만 하면 또 한번씩 터져나옵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4년, 교육부는 초등학교 교과서의 주요 용어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안을 공식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말에는 "주요 한자 300자를 선정해 2019년 초등 5~6학년 교과서의 주요 학습용어 중 용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한자로도 함께 표기하겠다"고도 발표했죠. 그러나 이 정책은 현 정부 들어 폐기된 바 있습니다.

한글전용 정책이 헌법재판소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한자병용을 주장하는 쪽에서 ‘한글전용이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헌법소원을 제기한 겁니다. 그리고 2016년 11월 24일에 나온 헌재의 판단은 재판관 전원일치로 “한글전용은 합헌”이었습니다. 헌재는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항(즉 기본적으로 한글전용을 하고 필요에 따라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병용하는 것)이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공문서는 어떨까요? 한자 대신에 ‘배리어 프리’ ‘수출 인큐베이터’ 등 영어식 외래어가 많이 보입니다. 대체어가 있는데도 영어로 쓴 경우도 많습니다. 이미 일상생활에서 많은 외래어를 사용하는 영향도 있겠지만, 영어로 만들어야 더 그럴듯해 보이는 상황도 있을 겁니다. 한자병용을 놓고는 이렇게나 치열하게 싸워왔는데, 영어는 참으로 쉽게 스며들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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