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피플&스토리]“막걸리로 온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우리술 박성기 대표가 말하는 막걸리의 가치
-학회ㆍ축제ㆍ협회로 막걸리 저변 확대 꾀해
-한국의 흥 유전자 있는 막걸리 세계화 목표


지난달 31일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의 우리술 본사에서 만난 박성기 대표. [사진=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헤럴드경제=한석희ㆍ이유정 기자] 막걸리는 흔히 ‘앉은뱅이 술’이라고들 한다. 주고받는 잔에 취기가 올라도 사고칠 정도로 만취하는 법은 없다. 대신 몸이 먼저 노곤하고 나른해진다. 기분 좋게 마시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고 마는, 앉은뱅이가 되는 것이다.

박성기(53) 우리술 대표는 막걸리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알맞은 술이라고 강조한다. 맛 보고 즐기며 먹는 술에 막걸리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막걸리로 온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라는 우리술의 미션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인 특유의 흥 문화를 간직한 막걸리는 세계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그는 말한다.

“막걸리를 마시면 탈이 안 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을 거예요. 흥을 돋워주는 막걸리엔 우리 문화의 ‘흥’ 유전자가 이어져 왔죠. 세계적인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도 가봤지만 결국은 얼마만큼 사람들이 즐기고 놀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놓느냐의 문제거든요. 가평에서 ‘자라섬 막걸리 페스티벌’을 개최해오고 있고, 치맥처럼 ‘막통(막걸리와 통닭)’ 축제도 해 볼 생각이죠.”

박 대표는 지난 2000년 막걸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친척이 하던 경기도 가평의 막걸리 회사 ‘우리술’을 인수하면서다. 우리술은 매년 30% 이상씩 매출 성장을 거듭하며 지난해 매출 100억원을 기록했다. 대표 제품으로는 잣의 고소한 풍미가 살아있는 ‘가평 잣 막걸리’가 있다. 가평 잣 막걸리는 지난해 1월 청와대에서 열린 중소벤처기업인ㆍ소상공인 간담회에 만찬주로 선정돼 호평을 받았다.

막걸리 사업에 뛰어들기 전, 박 대표는 노동운동으로 10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졸업 후 금융권 회사에 취업했지만 IMF(국제통화기금) 당시 자의반 타의반 회사를 그만뒀다. 생계를 위협하는 회사의 처사에 노조와 파업으로 맞선 탓도 컸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5학번인 그가 막걸리 사업으로 발길이 닿은 데는 그의 시대가 길러낸 반골기질이 한몫 한 셈이다. 지난달 31일 경기 가평군 조종면에 위치한 우리술 본사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서울에서 가평으로=대학 시절, 가난한 운동권 대학생이었던 박 대표와 함께한 술은 막걸리였다. 지금의 맥주파, 소주파처럼 당시 운동권은 ‘청파’(淸派)와 ‘탁파’(濁派)로 갈렸고 박 대표는 막걸리로 대표되는 탁파를 자처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올라와 자취를 했는데 자취를 하는 친구들은 특히 아침, 점심을 제대로 못 먹고 저녁엔 무조건 막걸리를 먹었죠. 배고프니까. 저녁을 배부른 막걸리로 먹은 거예요.”

박 대표가 대학생활을 한 1980년대, 막걸리는 국내 주류시장에서 80%대의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막걸리는 최악의 상태였다는 게 그의 말이다. 막걸리를 마시면 머리가 아팠다. 당시엔 생산된 지역 내에서만 막걸리를 소비하도록 유통과 판매가 제한됐다. 이런 독점 시장에서 막걸리 업체는 굳이 좋은 술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막걸리를 하루 만에 만들기도 하니 술을 먹고 탈이 날 수밖에요. 이는 막걸리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은 원인이기도 해요. 막걸리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그때 심어진 거죠”

막걸리 제조업자의 면허와 판매를 군 단위로 제한한 규제는 1999년 해제됐다. 박 대표가 막걸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려던 시기다. 막걸리의 주류 시장 점유율은 오랜 경쟁력 하락 끝에 3%대로 떨어져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막걸리 사업을 시작했지만 비전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적자는 한 달에 2000만원을 넘겨 연 2~3억원의 적자를 감당해야 했다. 애초 박 대표의 처남이 대표를 맡고 박 대표가 영업을 맡았지만 1년 후 처남이 백기를 들며 박 대표가 회사를 이끌게 됐다.

“그 당시로는 그래도 10명 이상의 규모가 큰 공장이었어요. 살균 시설도 돼 있었고요. 처남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제게 맡아달라고 했죠. 전 서울에 있었는데, 제가 무엇을 하면 완전히 올인하거든요. 전세고 뭐고 다 빼서 장롱 들고 포천에 있는 처갓집에 갔죠.”

그가 대표로서 가장 잘했다고 자부하는 것 중 하나는 한 번도 직원 월급을 늦춘 적이 없단 사실이다. 매출 1억도 못하고 매달 2000만원씩 빚이 쌓여갔지만 직원들의 월급은 밀린 적이 없었단다. 그는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때 주변에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사무실에 소파를 선물로 준 대학 친구가 전화 한 통으로 1~2억을 빌려주는 친구였으니까. 동생은 제가 사업한다고 하니까 공무원을 관두고 나와 제 밑에 와서 일할 정도로 가족이 단결됐죠.”

박성기 우리술 대표가 가평 막걸리와 가평 잣 막걸리 제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막걸리의 맛을 잡다=박 대표도 사실 막걸리를 마실 줄만 알았지 공정에 대해 무지한 비전문가였다. 하지만 쓰고 달고 들쑥날쑥하는 막걸리 맛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직원들에게 왜 그런지 물어보아도 ‘막걸리는 원래 그렇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게 막걸리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막걸리는 막걸리 공장에서조차 천대받고 있었다.

“사장으로 가서 보니, 직원들이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데 다 소주를 먹는 거예요. 막걸리 회사 공장 직원들이 말이죠. 왜 소주를 먹냐고 했더니 막걸리가 맛이 없대요. 그걸 바꾸느라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죠. 직원들은 제가 웃겼을 거예요. 막걸리를 안 먹는 사람은 나와 같이 일할 수 없다며 막걸리를 먹게 하고 세계화시킨다고 하니까.”

박 대표는 막걸리의 맛을 표준화하지 않는 한 산업으로서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막걸리는 다른 술에 비해 표준화가 어려운 술이여서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다.

“가장 염려됐던 건 제가 문과 출신으로, 발효의 메커니즘이나 효모, 출하법 등에 대해 문외한이었단 거죠. 요즘의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란 말처럼요. 이를 배우려 공장에 살다시피 했어요. 포천 처갓집에 있다가 나중엔 공장 옆에 25만원짜리 월세방을 얻어서 가족과 다 같이 옮겨왔죠.”

막걸리는 발효 공정에서 워낙 변수가 많고 기초적인 학문은 거의 없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부딪히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우려고 해도 배울 게 없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양조장을 숱하게 돌아다녔지만 사람들이 안 가르쳐줬단다. 나중에 보니 그들도 몰라서 못 가르쳐준 거란 사실을 알았다. 막걸리 제조는 경험에 기반해 이뤄지는 게 컸고 그러다 보니 조건에 따라 맛이 달라졌던 것이다.

“와인은 한 번만 발효하면 되는 단발효 술이죠. 포도는 자체에 당이 있기 때문에 효모만 있으면 술이 돼요. 그런데 곡물로 만드는 막걸리나 맥주의 경우 곡물 자체는 당이 없어서 이를 바꿔주는 게 필요하죠. 그 역할을 하는 게 누룩곰팡이예요. 맥주는 한번 당화를 시켜주고 그다음 효모로 발효시키는 단행 복발효를 거쳐요. 그런데 막걸리는 당화와 발효가 한 독 속에서 동시에 이뤄져 병행 복발효라 해요. 그래서 일정한 맛이 나기 어려운 겁니다.”

막걸리 맛 표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박 대표는 말한다. 제조 방식 때문에 공장장 등과도 많이 싸웠다는 박 대표는 지금도 연구실을 통해 품질 관리에 가장 신경을 쓴다고 했다. 축적된 연구개발로 데이터를 쌓으며 표준화에 한 발 더 다가서겠단 목표다.

학회ㆍ축제ㆍ협회로 저변 확대할 것=박 대표에 따르면 막걸리는 술의 내용물을 보전하면서 이를 장점으로 살리고 있는 유일한 대중화된 술이다. 기능성(영양소)을 버리지 않고 기호성도 동시에 갖춘 가치 있는 술이란 것이다. 지난 2013년 박 대표는 막걸리 산업 활성화와 세계화를 위해 뜻있는 막걸리 업체들을 모아 막걸리 협회를 만들었다. 지난 2017년까지 협회장을 맡은 그는 경기대 대학원에 양조경영학과를 신설하고, 경기 가평 자라섬에서 전국 600여 종의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매년 여는 등 막걸리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막걸리는 와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능성을 가졌지만 아무런 학문적인 연구도 없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양조학과 관련된 석사ㆍ박사가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됐죠. 경기대학교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대학원에 양조경영학과를 만든 계기예요. 당시엔 특수학과였는데 지금은 일반학과로 자리 잡았죠. 저도 지금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막걸리가 산업화, 세계화가 되기 위해선 학문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박 대표는 말한다. 사업을 하며 몸으로 터득했던 걸 학문적으로 접근하니까 요즘 공부가 정말 재미있단다. 1~2년 안에 학회지를 마련할 수 있는 양조학회를 목표로 학회와 축제, 협회가 기반이 되는 막걸리 산업화를 추구해 나갈 계획이다. 또 막걸리를 언제 마시고, 무슨 안주에 마시고, 어떤 잔에 마시는 지를 스토리 텔링으로 풀어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막걸리의 산업화가 늦어지며 소홀했던 부분이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그다.

“올해 막걸리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2010년대 초반은 업체들로서도 준비되지 않은 막걸리 붐이었죠. 지역 독점으로 막걸리 품질이 떨어졌던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이젠 품질로 경쟁하는 시대가 됐어요. 맛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고 시장에 맡기면 됩니다. 지금 시장에는 좋은 원료로 제대로 발효시킨 프리미엄 막걸리가 계속 나오고 있어요. 막걸리는 원래 농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젊은 층도 데이트를 하면서 막걸리를 즐기죠. 막걸리가 제대로 알려져서 우리술의 미션처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마법같은 활력소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kula@heraldcorp.com

▶박성기 대표가 걸어온길

-1966년생

-1993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졸업(1985년 입학)

-1993년~2000년 동부생명 지점장

-2000년~현재 ㈜우리술 대표이사

-2016년~2018년 경기대 대학원 양조경영학 석사

-2018년 ~ 경기대학원 양조경영학 박사 과정 재학 중

농식품부 (사)한국막걸리협회 회장(前)

농식품부 막걸리수출협의회 회장 (現)

농식품부 (사)한국균학회 부회장 (現)

농식품부 식품산업진흥심의회 위원 (現 )

농수산물유통공사(aT) 자문위원 (現)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