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회장측 지분 33% 넘으면 방어 가능…현 지분 28.93%
대한항공은 한진칼 통한 간접적 영향력 행사도 어려울 듯

국민 노후자금 644조원을 굴리는 ‘자본시장의 큰손’ 국민연금공단이 재계 14위 한진그룹에 경영참여형 주주권 행사를 한다. 타깃은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180640)이다. 다만 국민연금은 비교적 약한 강도의 경영참여로 여겨지는 ‘정관 변경’만 추진하기로 확정했다. 재계 반발 등을 감안해 상징적인 수준에서 첫 번째 주주권 행사를 실시하겠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국민연금은 지분 10% 이상을 보유한 대한항공(003490)에 대해서는 경영 참여형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을 방침이다. 단기매매차익 반환 규정에 따른 시장 혼란을 우려해서다. 한진칼은 대한항공의 최대주주여서, 국민연금 측 관계자가 한진칼 이사진에 진출하면 우회적으로 대한항공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이번에 사외이사 추천 등 적극적인 경영 개입엔 나서지 않기로 해 한진그룹은 한숨 돌리게 됐다.

국민연금이 재계를 의식해 주주권 행사 수위를 조절했지만, 이번 의결 과정을 지켜본 시장 관계자들은 "앞으로가 더 걱정된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의사결정 참여자들이 서로 다른 말로 삐걱대고 기싸움을 벌이는 등 논의 내내 불협화음을 냈기 때문이다.

조선DB

◇국민연금 "제한적 범위 내에서만 주주권 행사"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는 1일 오전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2019년도 제2차 회의를 열고 한진칼에 대한 경영 참여형 주주권 행사를 실시하기로 의결했다.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에는 이사 선임·해임 또는 직무정지, 자본금 변경,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정관 변경 등이 포함된다.

기금위는 구체적으로 한진칼에 정관 변경을 요구하기로 했다. 기금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회의 종료 후 기자들과 만나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내는 정관 변경 주주제안은 ‘이사가 회사 또는 자회사와 관련해 배임·횡령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 선고 받을 경우 결원으로 본다’는 내용이다. 효력은 형이 확정된 때로부터 3년간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최소한의 상징적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함으로써 오너 리스크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데 다수 의견이 모아졌다"고 했다. 또 "한진칼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10% 미만이라 단기매매차익이 발생하지 않아 연금 수익성 측면에서도 부담이 적다"고 덧붙였다.

국민연금은 이어 "공정하고 투명한 주주권 행사를 위해 기금위를 중심으로 위원들의 의견과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담은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의 제한적 경영참여 선언으로 당장 조양호 회장 해임안이 추진되진 않으나 안심하긴 이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조 회장은 회삿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만약 이번에 국민연금 주도의 정관 변경이 의결되고 추후 조 회장이 금고 이상의 형을 받게 되면 조 회장은 자동으로 이사진에서 물러나게 된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일 서울에서 열린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관 변경 성공 가능성은 희박할듯

정관 변경은 특별결의 사항으로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및 출석주식 총수의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현 경영진인 조양호 회장 입장에서는 33%만 확보하면 안정권인 셈인데, 회장 및 특수관계인의 한진칼 지분이 28.93%에 달한다.

국민연금이 해볼만한 상황이 되려면 앞서 한진칼에 대해 이사 연임 반대와 감사 선임, 사외이사 2인 선임 안건을 낸 강성부 펀드(KCGI) 측과 연대해야만 한다. 그러나 앞서 박능후 장관은 KCGI와 연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강성부 펀드 또한 "우리도 옳다고 하는 길로만 갈 계획"이라고 했다.

다만 주주총회 현장에서 양측이 손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한 변호사는 "상법상 한쪽이 주주제안을 철회하고 다른 쪽 제안에 힘을 실어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한진칼 지분은 KCGI가 10.81%, 국민연금이 7.34%를 보유하고 있다. 또 한국투자신탁운용과 크레디트스위스가 각각 3.81%, 3.92%를 보유 중이다.

◇논의과정 불협화음에 재계는 "불안하다"

기금위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은 역력했으나, 이번 주주권 행사 논의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시장 관계자들은 여전히 우려가 크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부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자책임위), 기금위가 툭하면 엇박자를 내며 매끄럽지 못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엇박자 행보가 노골적으로 나타난 건 지난달 23일 열린 수탁자책임위 회의 때다. 당시 민간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위는 기금위의 지시를 받아 한진그룹에 대한 주주권 행사 여부를 1차적으로 점검했다. 복지부는 회의 종료 직후 "수탁자책임위가 한진그룹 주요 계열사에 대한 경영 참여형 주주권 행사를 다수 의견으로 반대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왼쪽부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그런데 회의 결과가 공개된 후 일부 위원이 "우리는 찬성·반대로 의견을 나눠 낸 적이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한 위원은 "9명이 9개의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뿐인데 복지부가 거기에 자해석을 더해 찬·반으로 집계해버렸다"고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자료를 내기 전 모든 위원에게 확인을 받았는데 뒤늦게 다른 말을 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수탁자책임위는 지난달 29일 한 차례 더 모였는데, 복지부는 이때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회의 전날 밤 위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일정이 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1일 열린 기금위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도 16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하루 만에 숙지해야 했다. 한 위원은 "시간도 없는데 자료 분량은 너무 방대해 솔직히 제대로 다 읽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려고 한 점도 시장 참여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부분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공정경제 추진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 탈법과 위법에 대해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