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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라파엘 전파’ 대표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르네상스 이전으로” 빅토리아 미술 최고봉

  • 입력 : 2019.01.28 09:25:58
  • 최종수정 : 2019.01.28 16:51:55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정원에서 창백한 얼굴의 아름다운 한 여인이 두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다. 두 명의 어린 천사들의 현악기 연주에 맞춰 발치에 놓인 빨간 쿠션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작은 오르간을 합주하다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붙이는 모양이다. 천사들의 연주, 분수에서 흐르는 가는 물줄기, 그리고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제외하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황혼 무렵의 모습. 마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바라보는 듯, 모든 것이 극사실주의풍으로 정교하고 세심하게 묘사된 작품. ‘성 세실리아(St. Cecilia, 1895년)’라는 제목의 2m 넘는 크기의 유화다.

‘힐라스와 요정들(Hylas and the Nymphs, 1896년)’. 2018년 1월 미술관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전시를 중단하고 여성의 신체를 전형화하는 작품 전시의 찬반 의견을 묻는 이벤트가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관람객의 원성으로 작품은 일주일 만에 다시 전시됐다. 영국 맨체스터미술관 소장.

‘힐라스와 요정들(Hylas and the Nymphs, 1896년)’. 2018년 1월 미술관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전시를 중단하고 여성의 신체를 전형화하는 작품 전시의 찬반 의견을 묻는 이벤트가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관람객의 원성으로 작품은 일주일 만에 다시 전시됐다. 영국 맨체스터미술관 소장.

음악의 수호신 세실리아를 묘사한 이 작품을 그린 이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년). 그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 미술계를 점령했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대표 화가다. 라파엘 전파는 말 그대로 라파엘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라파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라파엘로를 지칭한다. 즉,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 자연을 섬기는 예술을 표방하자는 것이다. 1848년 왕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몇 명의 젊은 영국 화가들이 무분별하게 르네상스 미술을 모방하던 당대 예술가들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이 단체를 결성했다.

처음 이 단체는 영국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던 영향력 있는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의 보수적인 성향과 맞아떨어지면서 그의 옹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주제와 표현 등이 진부하고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곧 세간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결성된 지 6년 만인 1854년부터는 함께 전시를 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하지만 이들의 화풍은 후배 세대에 많은 영감을 줬는데, 그 대표주자가 바로 워터하우스였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화가 부모가 로마에 거주하던 시기에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그림에는 고대 로마가 배경이거나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데, 아마도 유년기의 추억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온 워터하우스는 이후 줄곧 런던에서 성장했다. 예술가 집안의 분위기 덕분에 늘 미술을 가까이 했고 1871년에는 왕립아카데미에 진학했다. 출중한 솜씨 덕분에 곧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라파엘 전파의 영향이 완연한 작품을 발표한 것은 1880년대 후반경부터다. 신화와 문학적인 주제에 늘 매료됐던 그가 문예운동을 주창한 라파엘 전파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스타일이 원숙해지면서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게 되고 미술 선생으로도 이름을 날리며 왕립아카데미의 정회원, 심의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영예를 누렸다.

‘성 세실리아(St. Cecilia, 1895년)’. 2000년 6월 14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660만파운드(약 95억원)가 넘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면서 라파엘 전파 전체를 통틀어 역대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 기록을 세웠다. 이 경매는 오랫동안 잊혔던 이 미술 양식을 다시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 세실리아(St. Cecilia, 1895년)’. 2000년 6월 14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660만파운드(약 95억원)가 넘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면서 라파엘 전파 전체를 통틀어 역대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 기록을 세웠다. 이 경매는 오랫동안 잊혔던 이 미술 양식을 다시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 세실리아’는 이처럼 그가 화가로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그림의 주인공 세실리아는 누구인가. 집안 강요로 로마 장군에게 시집을 간 후에도 남편에게 천사들과의 합주를 들려주는 조건으로 순결을 지키다 순교해 성인으로 격상된 여인이다. 신화와 문학이 적절하게 접목된 이런 주제는 워터하우스가 가장 선호하는 내용이다. 그는 또한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년)의 시를 무척 사랑했는데, 그의 시 ‘예술의 궁전(The Palace of Art, 1832년)’ 속 구절에서 이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다 위 깨끗한 도시 안… 금박을 입힌 오르간 파이프 근처에서… 성 세실리아가 잠들었네.’

아름다운 장면과 정교한 묘사, 도덕적인 주제 등 모든 것이 맞물리면서 이 그림은 발표와 동시에 미술계와 대중 모두로부터 대호평을 받았다. 이후 암 투병 2년 만인 191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워터하우스의 명성은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후기 인상주의와 추상 미술이 영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대단한 유명세를 누리던 그의 작품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에서 잊혔던 이 작품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0년 6월 14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660만파운드(약 95억원)가 넘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면서다.

이 작품이 그토록 화제가 된 첫 번째 이유는 라파엘 전파 전체를 통틀어 역대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힌 채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라파엘 전파의 다른 영국 화가들도 조만간 시장에서 새롭게 조명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조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코와 나르시스(Echo and Narcissus, 1903년)’. 목을 축이려다가 개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소년과 그런 그를 흠모하게 된 요정에 대한 유명한 신화를 주제로 한 워터하우스의 작품.

‘에코와 나르시스(Echo and Narcissus, 1903년)’. 목을 축이려다가 개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소년과 그런 그를 흠모하게 된 요정에 대한 유명한 신화를 주제로 한 워터하우스의 작품.

그런데 이 경매 결과가 유독 큰 화제가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작품을 구매한 이가 영국의 유명한 뮤지컬 기획자이자 작곡가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였던 것. 그는 ‘오페라의 유령’ ‘에비타’ ‘캣츠’ 등 주옥같은 뮤지컬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아주 어린 나이에 우연히 미술관에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작품을 접한 이래, 그는 열성적으로 미술품 컬렉션을 만들어왔다. 이 미술 양식에 대한 헌신적일 정도로 남다른 그의 열정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례로 채 20세가 되기 전 일이다. 어떻게든 한 작품을 꼭 손에 넣고 싶었던 그는 할머니에게 50파운드(오늘날 약 900파운드, 약 130만원)를 빌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가 원하는 작품을 ‘빅토리아 시대의 쓰레기’라며 일언지하에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할머니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웨버의 컬렉션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등 라파엘 전파의 대표 화가들 작품을 평생 수집했다. 그의 뮤지컬 성향으로 볼 때 진지하고 정열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빅토리아 시대 미술을 좋아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그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이 그 좋은 예다. 결국 50년 넘는 집념 어린 그의 정열적인 수집은 2003년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의 대규모 전시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시는 영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웨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1년에는 ‘라파엘 전파를 향한 열정’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찍기도 했다.

웨버의 집념 덕분인지 라파엘 전파는 오늘날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 미술 양식이 만들어진 영국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사례가 하나 있다. 2018년 1월 맨체스터미술관에서는 워터하우스의 또 다른 대표작 ‘힐라스와 요정들(Hylas and the Nymphs, 1896년)’이라는 작품의 전시를 중단하고 전시장 벽면을 비워둔 적이 있다. 여성 신체를 전형화하는 누드화를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관람객들이 논쟁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벤트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막을 내려야만 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빗발치는 원성과 전시 요청으로 인해 서둘러서 작품을 다시 걸어야만 했던 것. 옳고 그름이나 정치적인 해석 같은 이성적인 판단을 능가하는 작품의 아름다움이 거둔 승리가 아닐까.

[정윤아 미술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93호 (2019.01.23~2019.01.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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