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단체는 영국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던 영향력 있는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의 보수적인 성향과 맞아떨어지면서 그의 옹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주제와 표현 등이 진부하고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곧 세간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결성된 지 6년 만인 1854년부터는 함께 전시를 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하지만 이들의 화풍은 후배 세대에 많은 영감을 줬는데, 그 대표주자가 바로 워터하우스였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화가 부모가 로마에 거주하던 시기에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그림에는 고대 로마가 배경이거나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데, 아마도 유년기의 추억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온 워터하우스는 이후 줄곧 런던에서 성장했다. 예술가 집안의 분위기 덕분에 늘 미술을 가까이 했고 1871년에는 왕립아카데미에 진학했다. 출중한 솜씨 덕분에 곧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라파엘 전파의 영향이 완연한 작품을 발표한 것은 1880년대 후반경부터다. 신화와 문학적인 주제에 늘 매료됐던 그가 문예운동을 주창한 라파엘 전파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스타일이 원숙해지면서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게 되고 미술 선생으로도 이름을 날리며 왕립아카데미의 정회원, 심의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영예를 누렸다.
그림의 주인공 세실리아는 누구인가. 집안 강요로 로마 장군에게 시집을 간 후에도 남편에게 천사들과의 합주를 들려주는 조건으로 순결을 지키다 순교해 성인으로 격상된 여인이다. 신화와 문학이 적절하게 접목된 이런 주제는 워터하우스가 가장 선호하는 내용이다. 그는 또한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년)의 시를 무척 사랑했는데, 그의 시 ‘예술의 궁전(The Palace of Art, 1832년)’ 속 구절에서 이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다 위 깨끗한 도시 안… 금박을 입힌 오르간 파이프 근처에서… 성 세실리아가 잠들었네.’
아름다운 장면과 정교한 묘사, 도덕적인 주제 등 모든 것이 맞물리면서 이 그림은 발표와 동시에 미술계와 대중 모두로부터 대호평을 받았다. 이후 암 투병 2년 만인 191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워터하우스의 명성은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후기 인상주의와 추상 미술이 영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대단한 유명세를 누리던 그의 작품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에서 잊혔던 이 작품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0년 6월 14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660만파운드(약 95억원)가 넘는 높은 가격에 낙찰되면서다.
이 작품이 그토록 화제가 된 첫 번째 이유는 라파엘 전파 전체를 통틀어 역대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힌 채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라파엘 전파의 다른 영국 화가들도 조만간 시장에서 새롭게 조명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조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머니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웨버의 컬렉션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등 라파엘 전파의 대표 화가들 작품을 평생 수집했다. 그의 뮤지컬 성향으로 볼 때 진지하고 정열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빅토리아 시대 미술을 좋아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그의 대표작 ‘오페라의 유령’이 그 좋은 예다. 결국 50년 넘는 집념 어린 그의 정열적인 수집은 2003년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의 대규모 전시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시는 영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웨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1년에는 ‘라파엘 전파를 향한 열정’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찍기도 했다.
웨버의 집념 덕분인지 라파엘 전파는 오늘날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 미술 양식이 만들어진 영국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사례가 하나 있다. 2018년 1월 맨체스터미술관에서는 워터하우스의 또 다른 대표작 ‘힐라스와 요정들(Hylas and the Nymphs, 1896년)’이라는 작품의 전시를 중단하고 전시장 벽면을 비워둔 적이 있다. 여성 신체를 전형화하는 누드화를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관람객들이 논쟁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벤트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막을 내려야만 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빗발치는 원성과 전시 요청으로 인해 서둘러서 작품을 다시 걸어야만 했던 것. 옳고 그름이나 정치적인 해석 같은 이성적인 판단을 능가하는 작품의 아름다움이 거둔 승리가 아닐까.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93호 (2019.01.23~2019.01.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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