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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적 판단에 빛바랜 초대형 IB
한투證 발행어음 수난…‘IB 1호’ 부메랑

  • 배준희 기자
  • 입력 : 2019.01.28 09:26:26
1호 ‘초대형 IB’ 한국투자증권(이하 한투증권)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최근 금융당국이 한투증권의 발행어음 불법대출 의혹을 두고 두 차례 비공개회의를 열었지만 속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서다. 한투증권이 중징계 위기에 내몰리자 증권가에서는 배경과 여파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한국투자증권이 발행어음 불법대출 혐의로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한국투자증권이 발행어음 불법대출 혐의로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격론 오간 제재심

▷한투 vs 금감원 ‘평행선’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지난 1월 10일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한투증권에 대해 발행어음 운용 규제 위반 등을 이유로 일부 영업정지와 과태료 부과, 임직원 직무정지 등 중징계 여부를 심의했다. 오후 2시 30분쯤 시작한 제재심에서 한투증권 의견 진술에 이어 격론이 벌어졌지만 이날 저녁 11시 이후에도 결론이 나지 못했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21일에도 제재심의위를 열고 한투증권의 단기금융업 위반 관련 제재안을 다뤘다. 그러나 막판까지 제재 수위를 확정하지 못했다. 양측 주장이 평행선을 달려 다음 제재심의위는 언제 열릴지조차 불투명하다. 한투증권이 제재 대상에 오른 것은 지난해 5월 진행된 금감원의 종합검사에서 위법행위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한투증권이 특수목적법인(SPC)에 발행어음 자금을 대출해준 것을 문제 삼았다. 거래구조의 큰 골격은 이렇다.

한투증권은 지난 2017년 8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1673억원을 SPC인 ‘키스아이비제16차’에 빌려줬다. 해당 SPC는 이 자금으로 SK실트론 지분 19.4%를 매입했다. SK실트론 지분을 사들인 SPC는 SK실트론 지분을 기초자산으로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를 발행해 빌린 돈을 상환했다. 이 과정에서 SPC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총수익스와프(TRS·Total Return Swap, 잠깐용어 참조) 계약을 체결했다.

핵심 쟁점은 한투증권의 발행어음 조달 자금이 ‘개인’에게 흘러갔느냐 여부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단기어음(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은 50% 이상을 기업금융과 관련한 자산으로 운용해야 하며 개인 신용공여나 기업금융과 관련 없는 파생상품에 이용될 수 없다고 돼 있다.

이 대목에서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힌다. 한투증권 측은 ‘SPC에 대출해준 자금인 만큼 법인대출’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금융당국은 ‘거래의 실질을 따져봤을 때 SPC를 거친 자금이 개인에게 흘러갔기에 개인대출’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금융당국이 초대형 IB 사업의 인가 취지를 문제 삼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혁신기업 자본 조달을 목적으로 발행어음 사업을 허가해줬는데 1호 초대형 IB의 조달 자금이 개인에게 흘러들어간 구도가 되자 ‘정무적 판단’으로 일단 제동을 걸었을 것이란 시각이다.

일선 금융공학 실무부서에서는 ‘한투증권이 억울하게 됐다’는 인식이 꽤 퍼져 있다.

키스제16차가 발행한 2000억원 규모 전단채는 총 20회 발행이 예정돼 있었다. 즉, TRS 계약 기간인 5년에 맞춰 3개월 미만의 전단채를 모두 20번 ‘롤오버(신규 발행 → 상환 → 재발행)’하는 구조다. 그러나 초반 롤오버 과정에서 전단채 만기 불일치 등으로 유동성 이슈가 불거졌다. 쉽게 말해 SPC가 전단채를 찍어 이를 판매한 돈으로 TRS 수익 등을 정산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키스제16차는 전단채를 포기하고 한투증권을 상대로 사모사채를 발행했고 여기에 발행어음 자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사 임원은 “SK그룹과의 관계가 고려됐겠지만 그럼에도 한투증권 측이 엄격한 법리 검토를 거쳤을 텐데 해당 거래가 문제 될 것을 알면서 고의로 추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한투 측도 금융당국에 거래구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시간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TRS 뭐가 문제?

▷부실 계열사 우회지원 악용 소지

TRS 자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기법이 아니고 상품 자체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TRS는 지분이나 지분과 관련된 증권을 재무적투자자(FI)가 인수하는 대신 기업이나 특정 주주가 FI에 일정 수준의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계약이다. FI는 지분가치가 변동해도 보장된 수익률을 이익으로 가져가고 나머지 손익은 모두 계약자인 기업이나 특정 주주가 책임진다. TRS 활용 시 대기업집단은 대규모 자금 투입 없이 지분을 취득하고 계열사 우회 지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FI들은 투자위험은 상대적으로 낮으면서 채권금리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계약 당사자 모두 이익을 보는 구조여서 최근 수년간 자본시장에서는 TRS 거래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TRS가 세간의 입길에 오르기 시작했던 때는 2016년 즈음이다. TRS는 채무보증과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채무보증이 아니어서 일부 대기업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데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공정거래법은 대기업 그룹의 계열회사에 대한 채무보증을 금지하고 있는데 TRS를 이용하면 이 규제를 비껴갈 수 있다.

TRS 논란을 주도했던 단체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친정’인 경제개혁연대다. 경제개혁연대는 2016년 8월 “한진해운이 2014년 말 교환사채(1960억원)를 발행할 때 계열사인 대한항공이 이를 기초자산으로 사채 투자자와 TRS 계약을 한 것은 공정거래법상 채무보증 금지조항을 위배한 것”이라며 공정위에 문제 제기를 했다. 하지만 당시 공정위는 “TRS 계약은 파생상품 거래기 때문에 채무보증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랬던 공정위가 돌연 TRS 문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나선 것은 경제개혁연대 출신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하면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불거졌던 효성의 TRS 거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4월 효성이 TRS를 이용해 조현준 효성 회장의 개인 회사를 부당하게 지원했다며 조 회장 등 경영진과 법인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돼 금감원은 지난해 증권업계 TRS 거래 실태점검에 착수했다.

▶초대형 IB 위축 불가피

▷유상호 부회장 징계여부 촉각

한투증권이 TRS 거래로 중징계 위기에 처하자 증권가는 바짝 엎드린 분위기다. 상당수 증권사에서 TRS 거래 자체를 전면 재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대형 증권사 IB 부서장은 “이미 지난해 금감원의 TRS 점검 이후 국내 IB 대부분 담당부서에서는 보수적인 영업을 주문해왔다. 최근 국내 한 대기업에서 TRS 거래에 관한 논의가 오갔지만 계열사 부당 지원 오해가 불거질 수 있다는 판단으로 해당 딜을 거절했다. TRS가 일종의 대출상품인 만큼 대규모 증자를 했던 초대형 IB 입장에서는 자기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현실적으로 아쉬움이 크다”고 털어놨다.

무엇보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번 한투증권의 TRS 제재 논란이 당국의 정책 방향성을 명확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앞으로 초대형 IB 사업의 활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투자할 만한 자산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고마진이 기대되더라도 향후 문제가 될 수 있는 투자는 꺼릴 수밖에 없어 비슷한 구조의 거래는 다루기 쉽지 않게 됐다”고 우려했다.

한투증권이 영업정지와 임원 제재 등 중징계를 받을지도 관심사다. 금감원은 한투증권에 기관경고, 임원 제재, 일부 영업정지 등의 가능성을 사전 통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재가 확정되면 2017년 당시 대표이사였던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부회장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유 부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사장 입장에서는 첫 임기에서 금감원 제재를 받을 수 있어 편치 않은 임기 초반을 맞게 됐다.

금융당국 입장에서도 자칫 초대형 IB 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적잖은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실장은 “TRS를 악용하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도록 특정 사안과 세부 내용을 중심으로 규제를 보다 세밀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잠깐용어 *TRS 신용파생상품의 하나로 기초자산(주식, 채권, 상품자산 등)의 신용위험과 시장위험을 이전하는 상품이다. 채무보증과 비슷한 효과가 있어 일부 대기업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데 TRS를 활용한다는 지적이 있다.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93호 (2019.01.23~2019.01.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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