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병보다 못한 아이들…다큐 같은 극영화 ‘가버나움’

김경학 기자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는 허름한 러닝 셔츠와 팬티 차림의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의사로 보이는 이는 자인의 치아 상태를 살펴본 뒤 “유치가 다 빠진 것으로 봐서 12~13살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고아원이나 소년원으로 보이지만, 관객은 아직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인근 빈민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는 자인과 아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차림새와 달리 표정만 보면 다른 나라의 여느 또래와 똑같은 즐거운 얼굴이다. 두 장면 중 어떤 것이 자인의 과거인지, 현재인지 알 수 없다. 제목이 올라간 뒤 자인은 법정 원고석에 들어선다. 자인이 고소한 이들은 다름 아닌 자신의 부모다. 고소한 이유는 ‘자신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는 자인이 왜 부모를 고소할 수밖에 없었는지 법정과 과거 회상 장면을 번갈아 보여준다.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가버나움>의 주인공은 “유령·기생충 같은 존재” “제조년월일이 있는 케첩병보다 못한 존재” 12살 소년 자인이다. 출생기록조차 없이 살아온 자인은 아동학대와 다름 없는 가정 환경에서 산다. 영화는 자인의 동생들이 몇명인지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어림 잡아 7~8명가량된다. 한 살가량의 막내는 발목에 멀리 마음대로 가지 못하게 쇠사슬을 차고 지낸다. 자인의 가족은 마약 성분이 있는 약을 녹인 “특제 주스”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잡화점에서 가스·식료품 등을 배달하는 일로 생계를 돕는 자인은 어느 날 스쿨버스를 본다. 다 망가져가는 폐차 직전의 승합차지만 자인은 그것도 타지 못하는 신세다. 자인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 부모에게 말한다. 아버지는 “학교는 왜 가려고 하는 거냐” “배달 일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화를 낸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자인을 학교에 보내면 다양한 물품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며 보내자고 한다.

자인은 학교에 가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인은 자신보다 동생을 먼저 챙긴다. 초경한 여동생 사하르에게 생리대로 쓰라고 자신의 상의를 건넨다. 가임 여성이 되면 돈을 받고 이웃에 팔아 넘기는 것을 아는 자인은 사하르에게 조심할 것을 권한다. 자인은 사하르를 위해 함께 가출을 시도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홀로 가출한 자인은 한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체류자 라힐을 만나 함께 지낸다. 식당 종업원, 청소부 일 등을 하는 라힐은 아기 요나스를 몰래 키운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요나스를 뺏기고 추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인은 라힐이 일하는 동안 요나스의 친구 겸 보모가 된다.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레바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가버나움>은 시나리오가 있는 극영화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레바논 감독 나딘 라비키는 난민·불법체류자 등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의 삶을 수년간 관찰한 뒤 영화로 재구성했다. 자인·라힐·요나스·사하르 등 주요 인물 모두가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비전문배우로 거리에서 캐스팅됐다.

라비키 감독은 “영화는 현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며 “배우들은 실제 삶에서 거의 같은 상황을 겪은 이들로,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역할에도 쓴 주인공 자인 알 라피아는 ‘리틀 제임스 딘’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깊이 있는 눈빛 연기 등을 선보인다.

영화는 어른이나 제3자의 시선이 아닌 아이들, 그들의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암울한 현실을 그리지만 ‘혼돈 속 작은 기적’을 의미하는 영화 제목처럼 곳곳에 소소한 웃음, 행복, 희망도 담겨 있다.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4일 개봉. 126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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