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근 칼럼

‘시민 이동수’의 올가미

이중근 논설위원

살다 보면 덫에 걸리는 수가 있다.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암일 수도, 큰돈을 빼앗아가는 사기꾼의 마수일 수도, 평생 쌓은 명예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횡액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덫이란 것의 실체도 눈에 보이면 적응하기 마련이다. 가장 두려운 덫은 누가 또 얼마나 깊게 쳐놓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때이다. 3년 전까지 시민 이동수도 이런 덫과는 무관하다고 믿었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원수질 일이라고는 없는,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자식들 교육에 노심초사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니까.

[이중근 칼럼]‘시민 이동수’의 올가미

박근혜 정권이 한창 기세를 떨치던 2015년 어느 겨울날 아침, ‘특수’라는 이름이 붙은 한 관세청 부서의 조사관들이 이동수의 회사에 들이닥쳤다. 당황하긴 했지만 이동수는 누군가 단단히 오해를 했겠거니 여겼다. 의료기 업체에 공급한 플라스틱 부품 때문에 참고인으로 조사받아야 한다고 해서 변호사도 없이 조사에 응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갔다. 관세청 문턱을 넘자마자 ‘첨단’자가 붙은 검찰 부서가 나와 마치 대단한 국가기술이라도 유출된 것처럼 집과 회사, 연구소 세 곳을 동시에 덮쳤다. 참고인이 아니라 특허침해 사건의 공범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끝이려니 했는데 이번에는 국세청이 불렀다. 물건은 3억~4억원어치 팔았는데 세무조사는 100일을 했다. 경찰서 ‘지능’팀을 거쳐 검찰로 다시 한번 넘겨진 뒤에야 조사가 끝났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제야 공포가 엄습했다. ‘이 정도면 청와대가 분명한데,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아니면 청와대의 문고리 3인방?’ 머리에 종기가 생겨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런데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특허를 침해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자 수사관들은 그와 거래하던 회사들을 차례로 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출국금지까지 내려졌다. 항변할 여력조차 없는 사이에 알토란 같던 해외주문이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촛불이 한창 타오르던 2016년 겨울,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최순실과의 인연으로 부인 박채윤과 함께 ‘보안 손님’으로 청와대 관저에 들어가 박근혜에게 모종의 시술을 한 ‘비선 의료진’ 김영재 성형외과 원장으로부터 덫이 시작됐다는 것을. 김기춘, 문고리 3인방이 아니라 박근혜가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오히려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죽을 뻔했다.’

문재인 촛불정부가 3년차에 접어든 지금, 시민 이동수는 특허침해 사건으로 재판에 불려다니고 있다. 김영재가 등록했던 특허들이 차례로 취소되고 있지만, 그는 건재하다. 박채윤만 안종범 전 경제수석에게 명품가방을 준 혐의로 감방에 갔다왔을 뿐 김영재는 구속도 되지 않았다. 이동수를 상대로 조사를 벌인 권력기관들도 그대로다. 한때 그는 검찰과 경찰, 국세청과 관세청의 공무원들을 모조리 고발하려다 생각을 접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나섰을 테니까. 나머지는 문재인 촛불정부가 당연히 바로잡겠거니 믿었다.

그러나 이동수의 기대는 비켜갔다. 지난 2년 동안 이동수가 얻은 것은 자신이 얼마나 깊고 견고한 수렁에 빠져 있었는지를 확인한 것이 전부다. 박채윤으로부터 ‘특허를 침해당해 소송이 붙었는데 상대방이 엄청난 로펌을 동원해 나를 압박한다’는 말을 들은 박근혜가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대책을 주문했고, 우병우는 박병대 대법관을 통해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이런 뜻을 전한 사실이 드러났다. 법원이 청와대에 특허침해 소송 자료를 넘긴 정황도 나와 지난해 10월 우병우의 감방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후 수사는 관련 판사들에 대한 영장 기각 등으로 지지부진하다. 시민을 보호하는 데는 너무나 약했던 장치가 덫을 놓은 자들에게는 금강불괴라는 현실에 그는 억장이 무너진다.

최근 김태우 검찰 수사관의 폭로를 보면서 이동수는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촛불정권마저 권력기관의 힘에 기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부 지시를 ‘청부’와 구분하지 않은 채 충실히 따르는 권력기관을 그대로 두는 한, 자신을 옥죄었던 덫은 언제든 되살아난다고 이동수는 믿는다. 촛불정부가 미적거리는지 무능한지는 이동수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시민 이동수에게 가장 끔찍한 말은 “언제까지 적폐청산만 할 거냐. 지겹다”는 것이다. 지난해 박채윤은 법정에서 “남편은 전문직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셈이다.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한다”며 울먹였다. 그날 이동수는 자신을 범죄자로 오해하지 않고 구김살 없이 대해준 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만 없었다면 법정으로 달려갈 뻔했다. 출국금지만 풀렸지 이동수의 몸에 남은 덫의 상흔은 선명하다. 촛불정부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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