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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훈데르트바서가 소환한 아주 오래된 언덕-돈의문박물관마을

입력 : 
2019-01-23 15: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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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박물관마을은 문을 연지 15개월쯤 된 작은 문화 공간이다.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 지정되었고, 그 콘셉트에 맞는 단체들이 입주해 있으며 체험, 전시 행사 등도 주관하고 있다. 특히 끊임없이 진행되는 전시 행사는 이 마을을 찾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최근 진행 중인 ‘훈데르트바서 서울특별전’은 이 마을에 관심이 없던 사람조차 소환해낼 만한 걸출한 전시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 또한 잘 살펴 읽어보니 이렇게 마을 단위의 박물관으로 만들 만한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다소 외로워 보이지만, 돈의문이 복원되는 시점이 되면 이 마을은 옛것에서 오늘과 미래를 찾으려는 여행자들의 발길로 뜨거운 언덕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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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적 없는 돈의문이 살려준 백년 마을

돈의문박물관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떠오른 최초의 생각. ‘여기는 젠트리피케이션 걱정이 없겠군’. 이 마을은 박물관마을로 변하기 전, 그러니까 2010대 초반까지는 꽤 활발한 상업지역이었다. 삼성병원, 적십자병원, 금융기관, 언론사 등 규모가 큰 기업들이 주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공시설이 되어 대중음식점이나 카페 등이 장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전의 골목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옥 골목, 근대식 건축물, 일본식 가옥 정도가 대강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게 그렇다. 이 동네가 음식점 밀집 지역이었던 1990년~2010년대 초반 시절 한옥 골목에는 고깃집, 추어탕집, 복집, 칼국수집 등이 줄줄이 있었고, 일본식 건축물과 근대식 건물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맥주집, 일반 식당 등이 문을 열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흔적만 남고 사라져버린 ‘북적북적했던 식당들’이었다. 한때는 이 건축물들까지 모두 헐어버리고 새로운 공원으로 조성하는 작업이 진행된 적도 있었다. 바로 뒤에 위치한 경희궁 등을 생각해 볼 때 공원으로 만들었어도 크게 잘못될 일은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송월동 언덕은 인왕산의 끝자락쯤 되고, 성곽 복원과 함께 사라진 주택들도 적지 않다. 완전히 사라질 뻔했던 이 마을을 되살린 것은 돈의문이다. 마을 바로 아래에 돈의문이 있었고, 언덕 아래에 경희궁이 있고, 길 건너에는 정동, 덕수궁이 있으니 이 언덕을 근대 문화의 연장으로 보고 보존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방향도 그렇게 선회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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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좀 어색하다. 새로운 문화 공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요란한 오프닝 세리머니–막상 가 보면 아직 썰렁한 느낌–결국 시민들 참여가 누적되면서 안정화 –명소화’ 정도로 정리되곤 한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의 경우 2017년 9월에 문을 연지 16개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썰렁한 느낌이다. 찾아간 시점이 겨울이었고, 유독 추웠던 점을 감안해도 그랬다. 그러나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점, 조선시대 때의 한옥과 일제시대 때의 양옥, 우리나라 근대화 시절의 주택과 빌딩이 보존, 복원 형태로 혼재되어 있다는 점, 이곳이 진짜 돈의문이 있던 그 터와 경희궁, 정동, 세종로, 광화문 등으로 연결되는 사대문 초입에 위치한다는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이곳은 한번쯤 천천히 걸으며 음미해볼 만한 문화 공간임에는 틀림 없다. 현재의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조선 시대 때 사대문 안에 위치했고, 사대부들의 집이 꽤 많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경복궁 별궁, 이궁으로 만든 뒤 실질적인 궁궐이 된 뒤, 이곳을 비롯한 주변에는 경희궁 부속 시설이 있었거나 관리들의 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복궁 옆 서촌과 북촌이 그렇듯 말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의 공식적인 기록은 일제시대 때 시작되었다. 돈의동 앞으로는 전차 레일이 있었고 전차는 돈의문 홍예 밑을 오가며 흥인지문과 마포까지 운행했다. 그런데 일제는 전차를 복선화 한다며 조선의 사대문 가운데 하나였던 돈의문을 대책도 없이 강제 철거했다. 철거 과정에 나온 기와, 목재 등은 수집업자에게 팔아 넘겼고, 문화재급 소품들은 총독부에서 접수했으며, 돈의문 문루를 받치고 있던 석축은 분해되어 주변 기반 시설을 위한 토건 자재로 이용되었다. 이게 1915년의 일이었다. 조선 개국과 함께 지금의 사직터널 어귀에 최초로 건축되었다 세종 때(1442년) 지금의 터에 신축된 돈의문은 그로써 건립 474년, 중건(성종, 1711년) 204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실체 없이 그저 돈의문, 서대문, 새문, 신문 등 이름으로만 불리던 돈의문은 2022년까지 복원한다는 서울시의 발표가 있었지만, 앞으로 3년 남은 그 시점을 맞추게 될지는 모르겠다.



▶한옥, 적산가옥, 슬라브집이 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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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박물관마을의 특징은 이 좁은 터전에 시대별 건축물들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 건축된 일본식 가옥, 1960년대의 개량한옥들, 그리고 1970~1980년대에 유행했던 옥상과 넓은 발코니가 있는 ‘슬라브집’, ‘불란서식’ 집등이 그것들이다. 일본식 가옥들은 일제 강점기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던 1900년부터 해방 무렵까지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에 살면서 건축되었다. 온돌, 다다미, 계단, 복도 등 일본 특유의 양식이 적용되었으나 1950년 이후 건축 용도가 확장, 변화하면서 지금은 골격만 일본식으로 남아있다. 개량 한옥들은 한때 광화문, 서소문, 신문로 일대에 명문 고등학교들이 있을 때 하숙집, 과외방 등으로 활용되다 교육제도가 바뀌고 이른바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서히 식당 등으로 개조되어 운영되어 왔다. 2층 슬라브집들 역시 레스토랑이나 한정식집으로 재활용되었는데, 비스, 아지오 등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매일 몰려드는 손님들로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로 호황을 누린 ‘원조 줄서는 맛집’으로 기억된다. 삼성병원 초입 언덕에 곡선으로 건축된 상업용 건물은 1932년에 처음 지었던 ‘유한양행’ 본사 건물이었고 지금도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문화 예술 관련 커뮤니티, 체험공방 등이 있어서 그들이 주관하는 전시와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고, 커뮤니티 센터에서 주관하는 마을 투어를 통해 시간 여행도 할 수 있다. 나란한 2층짜리 건물 두 곳을 이어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관도 별도로 만들어두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이 골목들이 활황 상권이었던 시절, 대표적인 한정식 집이었던 ‘한정’과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지오’가 지금은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전시관에는 조선시대 돈의문 일대의 역사, 경희궁을 소개하는 서궐도,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돈의문 모습, 근처의 교남동과 새문안동의 1950년부터 2013년까지의 히스토리와 영상, 모형, 새문안 동네 도시재생과 사진갤러리, 사람들 이야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13년은 돈의문 뉴타운 사업으로 이 일대가 철거된 시점을 말한다.

‘경희궁 궁장유적’은 옛 아지오 건물 옆 별개의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궁장이란 궁궐의 담장을 말한다. 지금 경희궁은 본래의 경희궁에 비해 규모가 위축되어 있고, 궁장의 길이도 200m 정도이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원래 경희궁의 궁장은 1.8km에 달했었으나 일제 강점기 시절 도시 계획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발굴된 경희궁장 유적이 경희궁의 규모와 당시 도시 계획으로 변화된 이 지역의 중요한 연구 사료이자 복원을 위한 고증에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는 점은 상식이다. 경희궁장유적 전시장에는 궁장 외에도 조선 시대의 온돌, 근대 건물터 기초, 일제 강점기 건물터 등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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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주민들이 펼치는 문화 활동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실제로 사람이 주거하는 마을은 아니다. 일정한 요건과 자격을 갖춘 문화 관련 전문가들, 단체 등이 곳곳의 공간에 입주해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미술관협의회, 와인 관련 문화 교육, 컨설팅 회사인 ‘디비알디코리아’, 음악 크리에이터 집단 ‘돈의문싸운드연구소’, 미디어 활동가 그룹 ‘DOCS’, 국수를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논하는 인문 예술 콘텐츠 집단 ‘면담’, 도시 조사 연구소 ‘도시연구소’ 등이 그들이다. 시민이나 여행자가 참여할 수 있는 전시, 체험, 투어 등 열린 프로그램들도 많이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체험 프로그램은 ‘내내로NNR 상상공방’에서 주관하는 ‘목공워크숍 상상공방’ 하나다. 내내로의 상상공방은 버려지는 가구를 분해하고 채집하여 예술과 결합한 새로운 사물로 만드는 예술가들의 작업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1월4일부터 2월26일까지, 매주 화요일 10:00~13:00, 금요일 13:00~16:00에 열리며, 예약을 통해 참가 가능하다. 참가비는 쿠폰 구입 형태로 선지불 해야 한다. 쿠폰은 1회 5만 원, 2회 8만 원, 3회 12만 원, 4회 15만 원이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어린이의 경우 부모 동행이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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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데르트바서 서울특별전

요즘 돈의문박물관마을의 최대 관심사는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전시회가 아닐까? 필자 역시 이 겨울에 이 마을을 찾은 이유는 마을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바로 이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훈데르트바서(1928~2000)는 건축가이자, 미술가이자, 패션 활동가이자, 환경운동가로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한 예술가’, ‘건축치료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일생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대명제 하에 분야를 망라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미술, 건축, 디자인, 환경 등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쳤고 그 에너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 에너지의 힘이 크고 오래가는 이유는 훈데르트바서의 ‘창의적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정한 문맹은 쓰고 읽는 것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을, 적어도 그 자신은 철저하게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더파이브스킨(THE FIVE SKIN)’이라는 주제의 흔데르트바서 서울특별전은 돈의문박물관마을 다섯 곳의 공간에서 열리고 있는데,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마을을 오가며 감상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다섯 개의 피부란 ‘자신’, ‘옷’, ‘집’, ‘정체성’, ‘지구환경’ 등을 일컫는데, 각 주제별로 전시 공간을 나눈 것이다. 신문로 강북삼성병원 사거리에서 돈의문박물관마을로 올라가는 계단 꼭대기 오른쪽에 있는 제1전시관에선 ‘네 번째 피부: 정체성’을 주제로 우표시리즈, 그래픽 원화, 환경포스터, 두들시리즈 등이 1, 2, 3층 전시장에서 전시 중이다. 훈데르트바서의 그림, 우표는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생동감, 주목하게 하는 힘, 피식 웃으며 형성되는 공감이 있는, 역시 대가의 작품들이었다. 2전시장에서는 ‘두 번째 피부: 옷’이 전시되고 있다. 단 세 점의 사진과 영상이 전부이지만, ‘다른 생각이 가져오는 창조성’을 생각하게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3전시관의 주제는 ‘세 번째 피부: 집’.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사진, 영상, 드로잉집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그의 곡선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4전시관의 주제는 ‘첫 번째, 다섯 번째 피부: 나와 지구 환경’. ‘핀토라리움’은 훈데르트바서가 설립한 예술 학교로, 그의 자연과 예술의 철학이 담긴 곳이며, 모든 시설 또한 그 콘셉트에 맞춰져 있었다. 이곳은 바로 그 핀토라리움의 재현한 공간으로 자연스럽다 못해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받게 되는 공간이다.

전시를 본다기 보다, 그냥 그 안에 잠시 안거나 눕고 싶은 심정이랄까? 4전시관에서 골목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서대문여관’이라는 세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재개발 전까지 여관으로 영업을 했던 이곳은 현재 ‘세븐픽쳐스’라는 예술 디자인, 유통 단체가 입주해 있는데,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화가, 디자이너는 물론, 성수 수제화 장인, 가수 유노 윤호 등의 작품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계단을 내려와 신문로 큰 길가에 있는 ‘체험관’에는 ‘살아있는 미술: 나선의 미학’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훈데르트바서는 직선보다는 곡선을, 사각보다는 스트라이프를, 대칭보다는 비대칭을 사랑했다. ‘사람들은 항상, 왜 두 개의 다른 양말을 신으셨습니까, 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왜 꼭 두 짝을 똑같이 신어야 합니까’라고 답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시선과 관점’을 가졌을 때 삶의 방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느끼게 하는 극명한 메시지이다. 체험관은 그저 마카펜이나 크레용으로 ‘참가자만의 나선을 그려보는 기회의 벽’이다. 훈데르트바서 서울특별전은 2월24일까지 열린다.

화목토일 10:00~18:00 / 수금 10:00~20:00 /월요일 휴관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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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박물관마을 주변 문화재

오래된 동네이니만큼 오래된 건축물, 문화적 가치가 살아있는 공간들도 근처 송월동, 행촌동, 신문로, 교남동 곳곳에 있다. ‘딜쿠샤’는 1919년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로 타전한 AP통신 특파원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1923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은 부부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한 뒤 오랜 세월 방치되었는데, 2005년에 비로소 이 집의 이름이 ‘딜쿠샤’이고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되었다. 확인 작업을 한 사람은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로, 그는 테일러 부부의 아들이자, 어린 시절 딜쿠샤에서 살았던 ‘브루스 T 테일러’의 ‘내가 살던 집 좀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두 달간의 조사 끝에 실체를 확인해 주었다. 딜큐샤는 서울시 문화재로 등록되어 복원 작업 중이다. 딜큐샤란 힌디어로 ‘매혹, 기쁨’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18세기에 축조된 영국령 인도의 건물 이름이기도 하다. 딜쿠샤에 대한 이야기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증유물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전에서 더욱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이니 꼭 들려서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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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에서는 딜쿠샤의 역사와 뒷 이야기, 딜쿠샤를 만든 테일러 부부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상, 부부의 생애, 그들이 강제 추방된 사연 등과 함께 호박목걸이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호박목걸이’는 메리 린리 테일러의 목걸이이자 그녀가 1917년부터 1942년까지의 서울 생활을 기록한 자서전의 제목으로,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정리하여 1992년에 출판했다. 자서전 ‘호박목걸이’에는 그들이 서울 행촌동 언덕에 살았던 당시에 보고 느끼고 체험한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 민속 신앙, 금강산 유람 등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길 건너 삼성병원 안에 위치한 경교장도 들려볼 만한 문화재이다. 경교장은 1938년에 지은 일본식 주택이다. 당시 친일파 거부였던 최창학이 별장으로 건축하며 이름을 ‘죽첨장’으로 했었다.

해방 직후 소유주인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했는데, 김구는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을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인 ‘경교’를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도록 했고, 지금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김구는 바로 이곳 경교장에서 1949년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되었다. 김구가 암살당한 뒤 경교장은 다시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삼성재산에서 구입, 병원 본관으로 사용하다 서울시와 함께 문화재로 보전 중이다.

경교장에는 김구의 집무실, 회의실, 암살 현장 등이 공개되어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9시부터 6시까지 무료 개방 중이다.

이밖에 돈의문박물관마을 근처의 문화 명소로는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의 성곽 변천을 볼 수 있는 월암근린공원, 송월동 기상청 별관 등이 있다. 사거리 건너 정동길로 들어거면 조선의 개방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많은 문화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4호 (19.01.2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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