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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동貞洞-100년 역사를 걷다

입력 : 
2019-01-16 1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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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나이테를 두른 정동은 혼자 걸어도 좋은 길이다. 뭔가를 생각해도 좋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가도 된다. 그리 하면 스치듯 정동이 품고 있는 시간이 흘러간다. 그 순간, 내가 밟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다. 정동은 역사다.

꽤 오래 전에 김용범 시인이 펴낸 시집 『슈베르트 마을의 우편 마차』에는 ‘평화의 멜로디’라는 시가 실려 있다. ‘정오가 되면 성공회 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 시내의 한 중앙에서 듣는 종소리는 일종의 슬픔과 같은 것이었다. 음악이 끝난 연주회장에서 악기를 챙겨 들고 떠나는 교향악단의 단원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음악회는 끝났고 사람들은 저마다 평화로운 멜로디 몇 마디씩을 가슴에 안고 돌아가는 쓸쓸한 저녁의 느낌을. 오늘도 정오 성공회의 종소리가 들릴 것이다.(중략)’ 시는 이렇게 한 동네를 그렸다. ‘성공회 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리는 곳’이 바로 서울 한복판 중구 정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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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은 바로 그런 곳이다. 고즈넉한 오래된 궁궐의 돌담 길, 100년 역사를 이끼로, 바랜 색으로 안고 있는 교회당, 대한 제국 말엽에는 가장 많은 외국 공관들이 위치했던 격변의 장소였지만 지금의 정동은 서울 사람들에겐 ‘아련한 향수’의 동네다. 또 있다. 타계한 음악가 이영훈은 이문세의 목소리를 빌어 1988년 불멸의 노래 ‘광화문 연가’를 발표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 덕수궁 돌담 길엔 / 아직 남아 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 밑 정동길엔 / 아직 남아 있어요 /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중략).’

이처럼 정동은 미래적이기보다는 과거의 이미지를 풍긴다. 정동이 품고 있는 유산들을 보라. 시청 앞 덕수궁 대한문에서 시작해 돌담 길을 끼고 시립미술관을 거쳐 신아일보사터,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정동제일교회, 정동극장, 예원학교, 이화여고, 구 러시아공사관터로 이어지는 길과 그 옆 배재학당, 창덕여중, 미국대사관저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 인근의 덕수초등학교까지, 정동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그 존재만으로 한 시대를 꿰어 맞출 수 있는 퍼즐 조각들이다.

애초 정동의 이름은 정릉동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그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을 쓴 곳이다. 세월이 흘러 태조를 이은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의 묘를 경기도 양주 땅에 묻었다. 이렇게 능이 떠난 동네는 자연히 이름 또한 정동이 되었다. 정동의 ‘화양연화’는 19세기 말이다. 개화된 조선에 물밀 듯 들어온 각 국가들은 이곳에 그들의 공사관을 열었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공사관이 들어서고 이들 외교관의 모임 장소인 외교관구락부 역시 1894년에 정동에 자리 잡았다. 고종이 덕수궁을 주궁으로 쓰고 후에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역사를 보면 당시 정동은 대한 제국 정치 권력의 심장부요, 치열한 외교의 대결장이었다. 그 덕분(?)일까. 지금의 정동 토대를 만든 한 인물의 이름도 떠오른다.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다. 그는 정동 제일교회를 세우고 배재학당을 만든 인물로 정동에 신문물의 기운을 심은 선각자다. 그의 아들 도지 아펜젤러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을 발전시켰고 딸 레베카는 이화학당의 틀을 마련했다.

[글 장진혁(아트만텍스트씽크) 사진 이영근]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3호 (19.01.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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