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자는 지난 2005년부터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해 그동안 수천 개의 글을 올렸는데, 그중 가장 많은 소재로 삼은 것이 울산 태화강의 비둘기아저씨 관련 기사가 아닐까 한다.

울산 태화강 하류쪽 태화다리밑의 강 부근에서 30여 년간 나무·꽃·새를 돌보던 곽용씨는 비둘기아저씨로 불렸다. 1984년 4월부터 태화강에서 꽃 돌보기를 시작한 그가 비둘기를 돌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4년.

그해 6월 6일 아저씨는 태화강변에 날아온 비둘기 두 마리를 신기해하며 먹이를 던져줬다. 이를 인연으로 다음날 10여 마리, 그 다음날 수십 마리가 찾아왔다. 이런 식으로 모인 비둘기가 그가 세상을 떠난 2017년 겨울에는 수천마리로 불어났다.

하지만 태화강을 찾은 14일, 이곳에 비둘기는 없었다. 겨울에도 그의 손에서 피어나던 동초도 더 이상 아름다운 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의 힘이 이처럼 크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2017년 2월 10일 울산 태화강변 비둘기공원에서 비둘기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분 후 모이를 뿌리자 어디선가 갈매기들이 몰려오고 있다
 2017년 2월 10일 울산 태화강변 비둘기공원에서 비둘기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분 후 모이를 뿌리자 어디선가 갈매기들이 몰려오고 있다
ⓒ 박석철

관련사진보기

   
2019년 1월 14일 울산 태화강변 비둘기공원에는 비둘기가 없었다
 2019년 1월 14일 울산 태화강변 비둘기공원에는 비둘기가 없었다
ⓒ 박석철

관련사진보기

 
그는 2002년 울산강북교육지원청 과장으로 퇴임 한 후 자비를 들여 이곳에서 꽃을 심고 기리고 후에 비둘기 모이까지 주면서 비둘기아저씨로 통했다. 꽃을 돌보기 시작한 건 교육청에 근무하던 때보다 20년 앞선 시점이었다.  

2004년 그와 인연을 맺은 기자는 그동안 아저씨와 관련한 많은 기사를 썼는데, 그 기사 때문인지 그동 각종 신문과 방송에 '신기한 비둘기아저씨'로 소개됐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호각을 불어도 다가오지 않던 비둘기떼가 그의 호각소리에 즉각 모여드는 장면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기자는 한때 곽용씨의 제보로도 많은 기사를 썼지만 몇 년간 그의 전화를 피하기도 했다. 투철한(?) 그의 고발정신에 기자의 심신이 피로하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2017년 이맘때 돌아가셨다. 기자는 그후 한동안 죄송한 마음이 들어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관련기사 : 비둘기 아저씨의 죽음, 울산 태화강 비둘기는 어쩌나)

교육청을 정년퇴직한 뒤 매달 받는 연금 중 일부를 비둘기 모이와 꽃씨를 구입하는데 사용한 그는 그가 오기전에는 밋밋했던 태화강 이곳을 사시사철 꽃이 피고 수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명소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비둘기 아저씨의 이같은 노력이 일부 시민에게는 불편함을 주면서 때때로 민원을 불러오기도 했다. 울산시청이나 중구청에는 "비둘기 오물로 주변환경이 좋지 않다"는 민원이 수시로 들어와 아저씨와 공무원 간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이런 노력들은 후일 지자체장들의 눈에 띄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도 하고 비둘기 모이를 일부 지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태화다리 밑 강변에 모이는 수백마리의 비둘기는 어느새 수천 마리로 변했고 점점 울산의 명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고생하던 아저씨는 결국 2년전 세상을 떠나셨다. 기자는 당시 '이 많은 비둘기를 어찌하나' 하고 걱정도 했지만 그후 아저씨가 없는 이곳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14일 오후 2시 찾은 태화강은 허전했다. 우선, 그 많던 비둘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저씨의 텃밭이던 비둘기공원은 잡초만 우거진 채 텅빈 채로 외로웠다. 아저씨 생전 간혹 이맘때 꽃을 피우던 동초들은 그 화려하던 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한 사람의 흔적이 너무나 아쉬웠다.

아저씨는 1987년 태풍 셀마 홍수 때 태화강으로 떠내려온 작은 나무를 건져 태화강변에 심고 기른 후 커다란 느릅나무로 만들기도 했고 한때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산 조짐을 보이면서 도심을 날아다니는 비둘기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을 때 "비둘기는 죄가 없다"며 곳곳에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저씨의 등 휘어진 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비둘기와 꽃들 또한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비둘기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혹시 아저씨를 찾아 떠도는 것은 아닐까?

태그:#곽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