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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지경의 여행 한 잔] 비 오는 날 더블린에서

입력 : 
2019-01-14 04:01:03
수정 : 
2019-01-14 09: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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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소설가 켄 부르언(Ken Bruen)은 말했다. 친구가 한 명일 때와 한 명도 없을 때의 차이는 무한대라고. 음, 그런가? 이 문장에 '여행'과 '술'이란 수식어를 붙여보자. 여행 중, 술친구가 있을 때와 한 명도 없을 때의 차이는 무한대다. 그렇다. 펍을 스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더블린을 여행 중이라면 더욱더. 그럴 때 나 홀로 여행자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기네스를 친구 삼아 펍 순례를 하거나.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다 친구를 사귀거나. 기네스의 본고장에서 기네스를 마시겠다고 홀로 더블린에 간 어느 겨울날, 도착하자마자 우르릉 쾅쾅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간신히 찾아간 숙소는 서늘했다. 창밖은 회색빛이었고, 우박은 금세 비로 변했다. 한숨을 쉬자 뱃속에서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허기를 채우고 목도 축일 겸 브레이즌 헤드(The Brazen Head)로 향했다. 1198년에 문을 연 브레이즌 헤드는 더블린뿐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제일 오래된 펍이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바에서 신문을 읽으며 맥주를 홀짝이는 노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는 두말할 것 없이 기네스를, 식사는 심사숙고 끝에 양고기 스튜를 택했다.

바텐더가 눈처럼 흰 거품이 탐스러운 기네스를 건넸다. 입술에 닿는 구름 같은 거품에 한 번, 부드러운 목 넘김에 또 한 번 놀랐다. 무언의 감탄을 하며 꿀꺽. 마침 옆자리 노신사가 기네스를 한잔 더 주문했다. 바텐더의 이름을 부르는 자세가 단골 같았다. 여기 자주 오시느냐고 슬며시 말을 건넸다. 매일 온다는 그의 답에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이곳에 올 때마다 기네스를 드세요?" "물론이죠. 비 오는 날엔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는 게 최고거든요. 나는 비니라고 해요. 그쪽은?"

통성명 후 기네스를 마시러 서울에서 아일랜드까지 왔다고 하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고 보니 비니 할아버지는 브레이즌 헤드의 연주자였다. 그날은 휴무인데도 들렀다고. 아일랜드 민요 공연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더블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년 중 비가 내리는 더블린 사람들은 기네스 없인 못 산단다. 어느새 우리는 맥주로 동맹을 맺은 사이처럼 친해졌다. 한국어로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칠 정도로.

그 사이,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거리로 나설 기운이 났다. 어쩐지 비 내리는 더블린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펍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어쩌면 비를 피하려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다 비니 할아버지라는 술친구를 만났기에. 여행 중, 술친구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무한대니까.

[우지경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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