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앞에 무능한 정부…한국의 트라우마를 헤집다

김경학 기자

영화 ‘쿠르스크’

잠수함 참사를 그린 영화 <쿠르스크>의 한 장면.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잠수함 참사를 그린 영화 <쿠르스크>의 한 장면.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는 러시아 해군 장교 미하일(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행복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미하일의 어린 아들은 욕조에서 잠수 기록을 세웠다며 엄마 타냐(레아 세이두)에게 자랑한다. 가족과 장난을 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미하일은 전우 파벨의 결혼식을 다른 전우들과 함께 준비한다. 보드카 등 축하연 준비를 위해 해군의 긍지인 해군 시계를 서슴없이 맡긴다. 이들 모두 말이 전우지 어릴 때부터 한동네서 같이 자란 친구로,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다.

결혼식 다음날 ‘쿠르스크’는 훈련을 위해 출항한다. 점보제트기 2배 너비에 축구장 2개를 합친 것보다 더 길었던 초대형 핵잠수함 쿠르스크는 러시아 해군 북부함대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출항 이틀 뒤 두 차례에 걸친 내부 폭발로 118명의 선원 대다수가 사망한다. 함 후미에 있던 미하일 등 23명은 살아남아 가라앉은 쿠르스크 내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린다. 침몰 소식을 접한 영국 해군 준장 데이비드 러셀(콜린 퍼스) 등 국제사회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러시아 정부는 보안을 이유로 완강하게 거부한다.

<쿠르스크>는 2000년 8월12일 노르웨이 바렌츠 해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작가 로버트 로댓이 쿠르스크 사건을 다룬 <어 타임 투 다이>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감독은 <셀레브레이션>(1998) <더 헌트>(2012) 등을 연출한 덴마크 출신 토마스 빈터베르그다. 쿠르스크 침몰은 부족한 예산에 따른 구형 어뢰 탑재, 격실 차단 체계 부실, 주먹구구식 운영 등에 의한 사실상 인재였다.

영화는 미하일을 중심으로 궁핍하고 무능하지만, 여전히 냉전시대 사고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의 모습을 담담히 그린다. 러시아 북부 함대를 책임지던 그루친스키 제독은 훈련 모습을 보며 “20년 전엔 훈련 규모가 지금의 3배였다”며 “이제 누가 적인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한다. 멀쩡했던 구조함은 타이태닉 관광용으로 미국에 팔았고, 유일하게 남은 구조함은 너무 오래돼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한시가 급한 골든타임이지만 예비 배터리가 없어 충전에 12시간을 허비한다.

영화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개인과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국가를 대조하기도 한다. 미하일은 폭발로 핵 추진시설 비상 냉각장치가 고장이 난 상황에서 “빨리 후미로 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추진시설 담당자는 “이대로 도망가면 체르노빌 꼴이 날 것”이라며 끝까지 임무를 다한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취임 직전이던 러시아 정부는 먼저 도움을 주겠다는 영국 해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파 축소에 급급해한다. 선원이 전원 생존했다고 오도하는가 하면, 유족의 질문에 “안보기밀을 이유로 말씀드릴 수 없다”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는 것을 다 알고 입대한 것”이라는 뻔뻔한 대답으로 일관한다. 또 잠수함 침몰 위치가 수심 200m도 되지 않지만 500m라고 거짓 브리핑을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유족에게 “당신이 전문가냐”는 말로 핀잔을 준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합작한 유럽 영화지만 바닷속에 가라앉은 진실과 여파 축소, 은폐에 혈안인 정부, 남겨진 이들의 슬픔 등 여러모로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 16일 개봉. 117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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