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게릴라 혁명가를 품고 키운 정글…지리산이 떠오른 건 왜일까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카스트로 반군 본부에 서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지휘본부가 들어서 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 게릴라지역의 모습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쿠바 혁명 당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지휘본부가 들어서 있던 시에라 마에스트라 게릴라지역의 모습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시에라 마에스트라. 평지가 대부분인 쿠바에서 가장 높고 장엄한 산맥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최고봉이 1974m로 한라산, 지리산과 높이가 비슷한 이 산은 여러 면에서 빨치산이 활약했던 지리산을 닮은 곳이다. 게다가 쿠바 제2의 도시로 우리의 부산 격인 산티아고데쿠바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모든 조건이 게릴라전을 하기에는 최적지로서 피델 카스트로가 게바라와 함께 반군활동을 한 곳이다.

산티아고데쿠바를 떠난 버스는 쿠바의 공식적인 국부인 카를로스 마뉴엘 데 세스페데스의 마을 바야모에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대학을 나와 혁명운동을 했던 세스페데스는 1868년 이 중앙광장에서 노예를 해방하고 최초로 쿠바의 독립을 선언한 선각자였다. 그래서 그의 동상에는 이름도 없이 ‘국부’라고 표시해놓을 정도로 그는 국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에 뽑히지만 보수적인 의회와 대립하다가 실각하고 산으로 들어가 스페인군에게 사살당한 불운의 혁명가였다. 그의 생가인 박물관은 애석하게 수리 중이라 문이 닫혀 있었지만 그 앞의 광장은 너무 아름답고 소도시 특유의 한적함에 일정이고 뭐고 떠나기가 싫었다. 그러나 구석에 걸린 ‘그란마, 승리’(그란마는 아래 참조)라는 포스터를 보자 정신이 번쩍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손호철의 쿠바 기행](2)게릴라 혁명가를 품고 키운 정글…지리산이 떠오른 건 왜일까

비포장도로로 들어서 한참을 달리자 길가에 초록색과 갈색으로 칠한 삼각형들이 나타났다. 차를 세워 자세히 보니 젊은 남자의 사진과 함께 이름이 써 있다. 게릴라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동지들의 얼굴과 이름을 새겨놓은 기념비라고 한다. 그 같은 삼각형들이 한참을 이어졌다. 그만큼 많은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차가 가파른 산길에 들어서자 동네 호텔에 들어가 대기 중이던 사륜구동으로 갈아타야 했다. 사륜구동으로 갈아타고 산길을 한 시간 정도 올라가자 작은 산장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산속의 반군본부로 올라가야 한다. 잠자리에 누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쿠바혁명사를 생각해봤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26일 봉기 실패 후 15년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사면운동 덕으로 1955년 출소하여 실패한 봉기의 정신을 이어갈 ‘7월26일 운동’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든다. 그러나 목숨을 위협받자 동생 라울 등과 함께 멕시코로 망명한다. 거기에서 라울의 소개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바라를 만나 의기투합했고 게릴라전을 위해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는다. 1956년 11월25일 82명의 투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산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20명 정원의 작은 요트 그란마를 타고 쿠바로 향한다. 일주일 뒤인 12월2일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가까운 쿠바 동남쪽 해변에 도착한다. 그러나 우수한 화력의 바티스타군이 진압에 나서면서 다수가 사상을 당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포로가 되고 만다. 피델은 동생 라울과 게바라의 생사도 모른 채 보디가드와 의사 친구와 함께 셋이 사탕수수밭에 숨어 있어야 했다. 이 사탕수수밭에서 3박4일을 사탕수수 줄기를 씹고 오줌을 마시며 견뎌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델은 공포와 허기를 이기기 위해 두 사람에게 호세 마르티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피델 카스트로가 드디어 미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피델은 포로가 되느니 자살하겠다고 결심하고 잠을 잘 때는 총을 목에다 대고 잠들었다. 실패한 1953년의 몬카다 봉기에 이어 또다시 비극으로 끝날 것 같은 쿠바혁명에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다. 나흘이 지나자 바티스타군이 반군들을 소탕했다고 판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도 피델은 8일 동안 하수구를 기어 이동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겨 지역 동조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들을 통해 동생 라울의 4인 부대,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고스의 8명의 부대와 만날 수 있었다. 이들 15명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들어가 한 농부를 만났고 지리를 잘 아는 그의 권고에 따라 가까운 곳에 반군본부를 만들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지지자들을 늘려 갔고 ‘반군방송’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선전전을 펴 나갔다. 수차례에 걸친 바티스타의 진압작전을 모두 격퇴했으며 결국 2년 뒤인 1958년 공세에 나서 1959년 1월1일 혁명을 성공시키게 된다.

쿠바에서 가장 높고 장엄한 산맥, 빨치산의 지리산을 닮은 땅
실패 후 다시 일어난 피델 일행 15명이 숨어든 땅
주요 도시에 지지세력 두고 지속적 교란작업 이어간 반군들
그들의 성공은 어쩌면 정글 가득한 쿠바의 지리적 요건 덕 아니었을까

쿠바혁명은 단순히 쿠바라는 한 나라의 혁명을 넘어서 세계사, 특히 제3세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쿠바혁명은 이전까지 제3세계에 대한 지배적인 분석틀이었던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을 폐기시켜 버린 것이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서구와 달리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식민지를 싼 농산물의 공급지와 자신들이 만든 공산품의 소비지로 만들기 위해 식민지의 지주와 결탁해 산업화를 가로막고 반봉건적인 농민 수탈을 온존, 강화한다는 주장이다.

일제 역시 우리의 산업화를 막았으며 조선총독부와 결탁한 악덕지주들의 수탈 때문에 소작농들은 더 늘어났다. 이 같은 열악한 농촌의 상황이 해방정국에서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그리고 일제하에서 악덕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먼 간도로 떠나야 했다. 그들이 바로 ‘조선족’이다. 따라서 식민지는 노동자, 농민이 자주적인 산업화를 바라는 민족자본가와 연대해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을 몰아내는 반(反)제반(反)봉건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혁명, 베트남혁명이 기본적으로 이에 기초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많은 좌파들도 이 이론을 따랐고 북한도 해방 이후 친일파 척결과 농지개혁이라는 초기 혁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반군 사령부로 사용되던 건물의 내부.  손호철 교수 제공

시에라 마에스트라 반군 사령부로 사용되던 건물의 내부. 손호철 교수 제공

문제는 이후 제3세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등 현실이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진영에서 1950년대까지 이 같은 주장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쿠바 공산당도 이 이론에 따라 쿠바는 식민지반봉건사회이며 민족자본가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반제반봉건혁명을 해야 하고 공산당은 이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피델이 혁명을 일으키자 그를 ‘극좌적인 폭동주의’라고 비판했다(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달리 피델은 혁명 성공 전까지는 공산당과 전혀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은 성공했다.

쿠바혁명의 성공은 제3세계 이론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좌파이론가들은 라틴 아메리카가 더 이상 식민지반봉건사회가 아니라 이미 (종속적) 자본주의라는 종속이론을 개진했다. 라틴 아메리카가 못사는 것은 반봉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좌파 정당들 역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기반한 민족자본가 중심의 반제반봉건혁명론을 폐기하고 쿠바혁명을 모델로 한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다음날 사륜구동차를 타고 30분 정도 올라가자 ‘국립 투르퀴노 공원’이란 작은 팻말과 안내지도가 나타났고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말이라는 가이드는 이곳이 해발 900m 정도 되는데,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반군본부는 해발 1050m 지대에 있다고 설명했다. 한참을 내려간다니 갈 때는 그런 대로 수월할지 모르지만 돌아올 때 무더위 속에 오르막길을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됐다. 길은 돌이 많고 자주 진흙길을 만나 걷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정글을 지나가기 때문에 땡볕은 피할 수 있었다. 얼마를 내려갔을까, 탁 트인 전망과 한 농가가 나타났다. 피델 일행이 처음 도착했을 때 식량을 나눠주고 본부를 만들게 도와준 메디나라는 농부가 살던 농가였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한 헛간에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쿠바 국기와 피델의 90세 생일을 축하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가이드가 탐방객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간이 강의실 같은 곳이었다. 농가에서 한 중년 아주머니와 예쁜 딸이 나타났다. 이름을 묻자 “아드리아노”라고 수줍게 답하고 엄마 뒤에 숨었다. 미리 주문하면 돌아올 때 준비해놓는다고 해서 커피와 음료들을 요청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던 시절 카스트로가 머물던 집. 손호철 교수 제공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던 시절 카스트로가 머물던 집. 손호철 교수 제공

한참을 더 내려가자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더위 속에 숨을 헉헉거리며 계속 언덕을 올라가자, 나타난 것은 기둥만 한두 개 세워놓고 짚을 쌓아놓은 집터 같은 곳이었다. 가이드는 게바라가 운영했던 야전병원인데 새로 보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 의대 출신인 게바라는 대학 때 배운 의학지식으로 반군의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8년 전 들렀던 아바나의 혁명박물관에서 그가 사용했던 치과용 펜치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동행한 두 명의 치과의사들을 불러 기념촬영을 해줬다. 조금 더 오르자 오른쪽으로 가면 반군지휘소와 반군라디오가 있다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힘을 내서 다시 걸어 올라가자 정글이 사라지고 잔디밭 같은 넓은 빈 공간에 잔디를 깎아 흙이 노출된 공간이 나타났다. 피델이 최고지도자가 된 뒤 이곳을 방문할 때 사용한 헬기착륙장이라고 한다. 이제 지휘본부에 다 왔다는 이야기라 너무 반가웠다.

지휘본부는 그런대로 큰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역사적 현장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대부분의 동지를 잃고 고작 15명이 이곳에 도착해 이 건물을 지으며 혁명의 의지를 불태웠을 것을 생각하니 그 돈키호테 같은 낙천성에 존경심이 들었다. 본부 가운데에는 작전 수행을 위해 실제 산악지형을 축소해 만들어놓은 커다란 시에라 마에스트라 지형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피델이 사용했을 낡은 타자기, 여자 전사들이 군복 제작에 사용했던 낡은 재봉틀이 눈이 띄었다. 이곳이 여자 전사 11명을 포함한 250명의 반군들이 활약했던 곳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오른쪽 언덕 쪽에 혁명군의 목소리였던 ‘라디오 반군’ 방송국이 나타났다. 라디오 반군이야말로 이곳에서 전국으로 방송하며 전국 방방곡곡에 지지자들을 만들고 조직한 혁명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내려가자 깊은 계곡에 작은 초가집이 나타났다. 내려가 보자 ‘피델의 집’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피델의 숙소였다. 매우 간소한 그의 집에서 인상적인 것은 피델의 큰 키만큼 큰 침대였다. 나도 한 키 하는 만큼 누워보고 싶었지만 출입금지여서 포기했다. 아래쪽으로 다른 시설들이 있었는데 계단이 폭우로 유실되어 내려갈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우려한 대로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중간에 농가에 들러 아드리아노의 예쁜 미소에 취해 부탁해놓은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농가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고 올라 출발점에 도착해 사륜구동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8시간 이상 이동한다기에 계곡물에 밀린 빨래도 하고 멱도 감았다. 60년 전 피델과 게바라가 목욕을 하며 혁명의 열기를 식혔을 계곡물에 누워서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정글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지리산 계곡에서 멱을 감고 있는 착각이 들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바티스타의 막강한 정규군이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250명의 반군을 진압하지 못하고 이들에게 패배했으니 쿠바혁명의 성공은 바티스타군의 무능함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반군들은 250명에 불과했지만, 주요 도시에 지지세력을 두고 파업 등 지속적인 교란작업을 통해 바티스타 정권을 괴롭히고 소모시켰다. 그러나 이현상이 이끌던 남부군 등 지리산에서 고립되어 정벌당한 해방정국에서의 빨치산과 비교할 때 쿠바혁명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은 정글로 가득한 쿠바의 지리적 여건이 아닐까? ‘지리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쿠바와 같은 열대밀림도, 중국처럼 마오쩌둥이 국민군을 피해 1만㎞의 장정을 했던 거대한 영토도, 베트남같이 정글로 이어진 인근 국가(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갖지 못한 남부군은 지리적 여건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날 밤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장에서 잠을 자고 있자니 꿈속에 1949년 겨울 동계토벌작전에 의해 추위와 배고픔 속에 죽어갔던 많은 빨치산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기이하게도 그 얼굴들 속에는 피델과 게바라의 얼굴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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